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형법 제269조 낙태죄에 헌법불합치를 결정한지 꼬박 3년이 흘렀다. 한국은 '임신중절이 범죄인 국가'라는 불명예 리스트에서 빠졌으나 실제 여성의 삶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낙태'는 여전히 금기다.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 미디어가 그리는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다. 한국 미디어 속 '임신 중단'이란 불가능하진 않지만 불가해한 선택이다. 영화 〈브로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MBN 예능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이하 고딩엄빠)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갸륵한 여자"를 연출한다. 다른 선택을 한 존재는 완전히 치워진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 tvN

 
최근 종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고등학생 영주는 진학을 위해 임신 중절 수술을 받고자 한다. 영주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출산하기로 마음을 돌리자 남자친구는 영주의 손을 잡아주며 활짝 웃는다. 이들 커플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 역시 미혼모 소영이 아기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둘을 보살피는 이야기다.
 
 MBN 예능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2〉

MBN 예능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엄빠2〉 ⓒ MBN

 
실제 청소년 부모의 모습은 어떨까? 예능 〈고딩엄빠〉는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일반인 출연자가 등장한다. 제작진은 기획의도에서 "새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기특한 선택을 한 이들의 실제 생활인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이를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겠다"라고 밝혔다.

화면 속에는 어렵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숭고한 모성애만 남는다. 물론 기특하게도 모두 출산을 스스로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임신·출산을 선택하는 곳인가'는 물음표로 남는다.

다른 선택 한 여성 앵커
 
 애플TV+ 드라마 〈더 모닝 쇼(The Morning Show)〉주인공 브래들리 잭슨(리즈 위더스푼)과 알렉스 레비(제니퍼 애니스톤)

애플TV+ 드라마 〈더 모닝 쇼(The Morning Show)〉주인공 브래들리 잭슨(리즈 위더스푼)과 알렉스 레비(제니퍼 애니스톤) ⓒ Apple TV+

 

한편, 다른 선택을 한 인물이 있다. '애플TV+'의 오리지널 드라마 〈더 모닝 쇼〉 는 방송국 내부를 배경으로 한다. 새로 발탁된 앵커 브래들리는 시청률 1위 아침 뉴스 '더 모닝 쇼' 생방송 중 이렇게 발언한다.

"저는 이 방송을 보는 어린 소녀들이 완벽한 어린 시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저 멍청한 짓 많이 했어요. 정학도 당했고, 열다섯 살 때는 낙태를 했어요."

이 고백은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온다. 프로 라이프(pro-life) 진영이 하차 요구가 빗발치자 브래들리는 자괴감에 빠진다. 이때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린 건 바로 '소녀들'이었다.

"오늘, 미시시피주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소녀들은 '더 모닝 쇼'의 새로운 앵커 브래들리 잭슨에 지지를 표하기 위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브래들리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그녀처럼 나도 내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은 여섯 시간 가까이 행진 중인데, 이는 여성이 임신 중절 클리닉까지 이동하는 평균 시간을 뜻합니다."

브래들리는 소녀들을 위해 발언했고, 소녀들은 이에 응답했다. 단순히 픽션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장면은 실제 사건과 닮아있다.

임신 중절 고백한 유명인들
 
 방송인 비지 필립스

방송인 비지 필립스 ⓒ Busy Toninght

 

2019년 5월 7일, 방송인 비지 필립스는 자신의 토크쇼 〈비지 투나잇〉에서 임신 중절 사실을 고백했다. 당시 미국은 조지아, 앨라배마, 오하이오주 등에서 연달아 낙태 금지 법안이 생겨나며 '로 대 웨이드(미국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의 권리에 낙태할 권리가 포함되는지에 대한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뒤집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미국 여성 네 명 중 한 명이 낙태를 경험합니다. '나는 낙태한 여자 본 적 없는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저를 압니다. (You Know Me.) 저는 열다섯 살 때 낙태했습니다."

이 고백은 해시태그 '#YouKnowMe 운동'으로 발전했다. 배우 밀라 요보비치, 자밀라 자밀, 키키 팔머 등 유명인이 잇따라 임신 중단 경험을 고백하며 연대했다. 비지 필립스는 "낙태금지법은 여성의 임신 중단을 막지 못한다. 다만 여성의 안전을 위협할 뿐"이라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우려하던 일은 현실이 됐다. 2022년 6월 미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고, 이제 미국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법으로 제한할 수 있다.
 
 가수 켈리 클락슨이 드라마〈더 모닝 쇼〉에 카메오 출연해 브래들리 잭슨을 위해 노래하는 장면

가수 켈리 클락슨이 드라마〈더 모닝 쇼〉에 카메오 출연해 브래들리 잭슨을 위해 노래하는 장면 ⓒ The Morning Show 트위터 계정

 
누군가는 힘든 여건에도 책임감 있게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한 모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책임감보단 '원치 않는 임신'을 낭만화하는 미디어의 무책임에 가깝다. 현실에서 '원치 않는 임신'이란 거룩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공포와 다름없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영화 <브로커> 속 '영주와 소영의 세계에 브래들리 잭슨과 비지 필립스가 있었다면' 하고 상상해 본다. 어떤 선택을 했든 드러낼 수 있고, 그 선택에 연대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면? 세계관은 모든 인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세계에는 '임신, 그다음은 출산과 양육'이란 당위만 존재한다. 나는 소녀들이 내 몸에 관한 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힘을 감각하길 바란다. 힘은 홀로 생겨나지 않는다. 연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에겐 브래들리 잭슨과 비지 필립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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