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 CJ ENM

 
'안개 속에선 모든 것이 공평하다'라고 언젠가 내 졸시에 쓴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썼을까? 그 이유를 지금 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안개는 불가시성을 기반으로 자기 세력을 넓히곤 하는데, 바로 그 불가시성으로 인해 너와 나의 구분, 높고 낮음의 구분, 그리고 멀고 가까움의 구분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당초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인지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뿐.

안개 이야기로 운을 떼는 이유가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흘러나온 OST,  정훈희의 '안개' 때문이다. 사실 '칸느'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예의 그 다운 화려한 미장센을 선보이며 감독상을 수상하고, 탕웨이나 박해일의 놀라운 연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됐다. 거기에 더해 김신영을 비롯한 여러 특별 출연자들의 면면도 화제성을 이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영화 전반을 휘몰아치게 만드는 이 노래에 대한 언급은 화제성에 비해 너무 단출하지 않은가 싶다. 아직까지는. 난 영화를 보는 내내 박찬욱 감독이 이 노래 '안개'를 여기저기에 깔면서 스토리를 진행하는 의도에 대해 필요 이상 다각도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사실,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에 맘을 뺏긴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이 영화의 놀라운 모티브가 출발했다고 한다. 하여 영화의 공간적인 배경은 물론이고 시간적인 흐름에서도 '안개'는 숱한 것을 내포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미장센의 대가 박찬욱이 숨겨 놓은 몇 가지 단서들 중 가장 강한 설득력을 지닌 것이 바로 '안개'이므로.

특히나 화면을 흐릿하게 만들어 일시에 숨을 죽이게 하는 몰입감 극강의 그 안개 말고도, 정훈희의 목소리를 타고 전달되는 '안개'의 음률은 세상 가장 끈적함으로 다가오는데, 약간의 비음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안개'는 우리의 눈으로 보거나 몸으로 느끼는 안개보다 훨씬 눅눅하고 은밀하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 CJ ENM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 정훈희 '안개' 가사

1967년에 발표된 우리 가요 또 하나의 명곡이다.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인 이봉조가 만든 곡으로, 이 노래를 취입했을 때 정훈희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이었다. 열일곱의 나이로 세상 끈적하고 흐느적거리고 듣기에 따라 퇴폐적일 수도 있는 노래를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소화해낸 것이다.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안개가 가지는 모호하고도 환상적인 특성 때문인지 안개를 소재로 한 노래들도 많고 많지만 정훈희의 '안개'처럼 안개가 가진 속성에 가깝게 목소리만으로 이미지를 구축한 가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박찬욱 감독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영화의  OST로 낙점한 것은 아닐까 잠시 짐작해 봤다.

아주 가끔 노래방에서 내 안의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기 위해 불렀던 노래 두 곡이 있는데, 하나는 이수미의 '내 곁에 있어 주'였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이 노래 정훈희의 '안개'였다. '내 곁에 있어 주'로 소녀적 감성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뭔가 아련한 느낌,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굴고 싶을 땐 '안개'를 선곡해 불렀다. 

"가시나, 집어 치아라! 니 안 같다."
"뭐꼬? 니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었나! 놀랬대이."


듣는 이들에 따라 호불호는 극명했지만, 분명했던 것은 이 노래가 생각보다 부르기 쉽지 않아서 애를 먹었던 데 있다. 사연 있는 여자처럼 굴고 싶어도 정훈희의 음색, 그 발끝에도 못 미쳤으니 어쩌면 당연했던 결과일지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왠지 나와는 맞지 않는 곡 같아 이후론 다시 불러 볼 엄두를 못 냈던 거 같다. 하지만 부르기는 어려워도 언제 들어도 좋은 곡이긴 하다. 특히 영화에서처럼 적재적소에 흘러나와 영화적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왠지 음험하고 공포스럽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해석도 분분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늘 그렇듯 관객에게 '안개'라는 메타포를, 영리하게도 이 노래를 통해 관객에게 던져 놓고는 씨익~ 웃고 있는 건 아닐까. '숙제가 제법 어려우니 머리를 써서 잘 풀어보시오' 하고.

참, 영화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안개'는 정훈희·송창식이 영화 <헤어질 결심>을 위해 듀엣 버전으로 다시 녹음한 곡이라고 한다. 정훈희가 단독으로 부를 때와 비교해 훨씬 담백하다. 노래는 같은 곡이라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될 수도 있고, '잠시 흐림' 정도로 그칠 수도 있다. 노래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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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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