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30분경, 평화롭던 텍사스주 댈러스를 뒤흔든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차 안의 남자는 쓰러졌고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정체불명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남자는 바로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였다. 그의 죽음은 미국인들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6월 30일 방송된 JTBC <세계다크투어>에서는 '미국이 사랑하는 스타 대통령의 죽음-케네디와 암살범의 마지막 날' 편을 방송했다. 지금까지도 세계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조명한 것이다. 미국사 전문학자인 김봉중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다크 가이드로 나섰다.

'스타 대통령' 케네디
 
 JTBC <세계다크투어> 한 장면.

JTBC <세계다크투어> 한 장면. ⓒ JTBC

 
케네디는 미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스타 대통령'으로 꼽힌다. 역대 가장 젊은 나이(당선 당시 43세)에 당선된 대통령이자 준수한 외모와 입담, 개혁적인 이미지, 명문가 출신의 엄친아라는 화려한 배경으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을 논할 때 항상 세 손가락안에 꼽히는 인물로 남아있다. 미국인들은 왜 그토록 케네디 대통령을 좋아할까.
 
"국가가 여러분에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케네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통령 취임 연설이다. 자칫 잘못 전달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지만, 케네디의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임팩트 있는 언변과 조화를 이루며 강렬한 메시지를 발산했다.
 
케네디가 당대의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이른바 '뉴 프론티어', 미래의 미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케네디 정권은 1960년 문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의 도약을 위하여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케네디 사망 6년 후인 1969년, 미국은 닐 암스트롱을 통하여 인류역사에서 가장 먼저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한다. 또한 케네디 정권은 세계의 개발도상국에 미국 청년 위주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파견하여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전파했다. 이밖에도 교육과 복지, 인종차별 폐지 등 개혁적인 정책들을 제시했는데 모든 미국인들이 세계 최고 국가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뉴프론티어 정책의 핵심이었다. 
 
당시 케네디의 대중적 인기는 당대의 유명배우이자 미남 스타의 대명사였던 로버트 레드포트를 뛰어 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명문가였던 케네디의 가문은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재력가로서 대중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케네디는 당시 미국의 유명 여배우이자 섹스심벌인 마릴린 먼로와 염문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또한 케네디가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한 1960년대는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이 보급되던 시대였다. 이전까지의 TV는 정치적으로 소비되기보다 오락용으로서의 기능이 강했다. 하지만 TV 보급이 확대되고 대통령 후보들의 TV토론이 생중계되는 시대가 되면서 외모와 입담을 겸비한 케네디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1960년대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대선 토론 당시 라디오로 청취했던 시청자들은 모두 닉슨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정작 TV로 본 시청자들은 케네디의 압도적인 승리라는 평가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시청각을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TV를 통한 '이미지 정치'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 케네디의 급부상의 이유였다. 
 
케네디 암살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남긴다. 딜리 플라자는 댈러스 웨스트엔드 역사지구에 위치한 도시공원으로 바로 케네디가 암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던 케네디는 대통령 재선을 앞두고 가장 인기가 떨어지던 델러스 지역의 지지율 회복을 위하여 선거유세차 방문했던 상황이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 부부는 지붕이 열린 오픈카에 경호원 없이 운전사와 텍사스 주지사 부부와 동승했다. 당시 예상을 뛰어넘은 댈러스의 환영일파에 고무된 주지사 부인이 "이제 댈러스 사람들이 대통령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겠죠?"라고 말을 건네자, 기분이 좋아진 케네디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No, you certainly can't)라고 화답했다. 이것은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됐다.
 
케네디 암살이 이루어진 지역은 주변에 높은 건물과 탁트인 광장이 위치해 있었다. 저격수가 숨어서 타깃을 노리기에 좋은 위치였고, 경호하는 입장에서는 보안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는 불과 6초 사이에 두발의 총격을 받고 차량 안에 그대로 쓰러졌다. 케네디를 저격한 첫 발은 목을 관통했고 두 번째 총탄은 머리를 크게 훼손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대통령 암살에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케네디를 태운 리무진은 그대로 인근의 파크랜드 병원으로 직행했다. 8분만에 병원에 도착한 케네디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불과 20분 뒤에 공식적인 사망판정을 받았다.
 
케네디를 저격한 범인은 24살의 청년인 리 하비 오스왈드였다. 그는 당시 학교 도서보관소였던 건물 6층에서 이탈리아제 38구경 라이플로 케네디를 저격했다. 오스왈드는 총 3발을 쐈고 이중 2발이 케네디에게 명중했다.
 
오스왈드는 저격 이후 바로 도주했다. 경찰이 건물을 빠져나오던 오스왈드와 마주쳤으나 같은 건물에 있던 직원이 오스왈드의 신분을 확인해주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왈드는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가 권총을 챙기고 다시 밖으로 나와 거리를 배회했다.
 
오스왈드의 행적에 수상함을 느낀 한 경찰이 검문을 하려고 하자 오스왈드는 4발의 총알을 쓰고 그 자리를 달아났다. 총을 맞은 경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스왈드는 어두운 영화관으로 도주했으나 추격해 온 경찰들에게 포위당하여 격렬한 저항 끝에 결국 체포됐다.

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
 
오스왈드는 왜 케네디를 암살했을까. 오스왈드는 체포되고 나서 "자신은 희생양(Patsy)에 불과하다"이라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대통령 암살 조사위원회는 오스왈드가 청소년기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인물이며, 과거 소련에 망명했다가 현지 생활 적응에 실패하며 4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귀향한 과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일용직을 전전하며 별볼일없는 삶을 살던 오스왈드는, 급기야 최고의 유명인인 미국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삐뚤어진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오스왈드는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케네디가 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오스왈드는 댈러스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된 대통령의 퍼레이드 동선을 보고, 언제 자신이 일하던 건물 앞을 지나가게 될지를 파악했다.
 
댈러스 경찰은 대통령 암살로 국민적 분노를 자아낸 오스왈드를 좀더 안전한 장소에서 취조하고자 교도소를 이송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오스왈드가 경찰서 지하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 의문의 남성이 달려들어 근접거리에서 오스왈드를 저격했다. 오스왈드는 갈비뼈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이러니하게 케네디 대통령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오스왈드의 이송과 저격 장면도 TV에 그대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오스왈드가 이송된 병원도 케네디가 저격 당하고 이송된 병원과 동일했으며, 오스왈드 역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케네디와 오스왈드를 모두 진료했던 의사 말콤 페리는 대통령 암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만나는 기묘한 상황을 맞이하고도 반응은 덤덤했다고.
 
오스왈드를 저격하여 현행범으로 체포된 인물은 댈러스의 한 나이트클럽 사장이었던 잭 루비였다. 루비가 마피아의 사주를 받아 오스왈드를 암살했다는 '마피아 연계설'은 당시 유명한 음모론이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루비는 마피아와의 연관성이 약했고, 오히려 케네디의 열혈팬으로 밝혀지며 순수하게 대통령의 복수를 위하여 오스왈드를 노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스왈드에 이어 루비마저 1967년 교도소에서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암살사건의 진실과 배후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묻히게 됐다. 루비는 사망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든 사실은 절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내 사건이나 동기의 진실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많은 이득을 보는 자들, 나를 이러한 상황에 몰아넣을 만한 숨은 동기를 지닌 자들이 사실을 숨겨버릴 테니까"라며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남겼다.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한 이후에도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의문점은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첫 번째는 케네디를 향하여 날아온 총알의 방향이다. 저격 위치상 오스왈드는 뒤에서 케네디를 저격했지만, 당시 영상에서는 케네디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앞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처럼 보인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총알이 뒤에서 날아와도 고개가 뒤로 젖혀질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암살 당시 현장에서 오스왈드를 도운 비밀요원이 있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이른바 엄브렐라맨(우산을 든 남자)이라고 불린 남자는 케네디의 차량이 접근하자 맑은 날씨에 갑자기 우산을 펼쳐들었고, 그에 맞춰 차량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오스왈드와 엄브렐라맨, 그리고 운전기사까지 케네디 암살에 공모했다는 의혹이다.

1978년 케네디 암살 청문회에 불려나온 엄브렐라맨의 정체는 루이스 위트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케네디 암살과 우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또한 위트는 과거 2차대전 당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뮌헨 협정)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케네디 대통령보다는 그의 아버지였던 조지프 케네디(당시 주영 미국대사)에게 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대통령을 경호해야 할 경호원들은 암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은 총소리를 환영인파의 축포 소리로 착각했다고 밝혔다. 놀랍게도 케네디의 경호원들은 실전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심지어 경호원들은 케네디를 진료하던 의료진과 충돌하기도 했다. 의료진은 텍사스 주법에 따라 사망사건 담당의사가 부검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경호진은 이를 거부하여 급기야 총으로 의료진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경호원들의 암살 개입설과 총알방향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음모론이 퍼져나왔다.
 
 JTBC <세계다크투어> 한 장면.

JTBC <세계다크투어> 한 장면. ⓒ JTBC

 
그런데 케네디의 현장 부검을 막은 것은 부인인 재클린으로 밝혀졌다. 재클린은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서 정확한 사망원인을 조사하려고 했던 것. 케네디의 시신은 결국 워싱턴 DC의 해군병원으로 이송되어 부검이 진행됐다.

또한 관을 열고 조문객을 맞이하는 기존 미국 장례식 문화와 달리, 케네디의 유족들은 총격으로 머리 반쪽이 날아간 대통령의 참혹한 시신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시신에 뭔가 중요한 비밀을 감춘 것이 아니냐는 시신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케네디 암살의 배후로 거론된 세력 중에는 놀랍게도 미국 정보국인 CIA도 있었다. 케네디는 당시 미국의 근심거리였던 쿠바 침공작전 실패를 둘러싸고 강경책을 주장하던 CIA를 불신하게 됐고, 장기집권중이던 앨런 멀레스 CIA 국장을 경질하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이유로 오스왈드의 배후에서 바로 CIA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
 
하지만 미국 암살진상조사위원회는 10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모든 음모론이 사실무근이고, 케네디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시간이 흐르고 2017년과 2021년에 추가로 당시 사건에 대한 보고서들이 공개되었지만, 세간의 각종 음모론과 달리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케네디 암살에 대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루한 팩트보다, 자극적인 가십거리나 가짜뉴스를 더 선호하는 대중의 속성, 케네디 같은 유명한 인물이 한낱 오스왈드라는 개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믿고싶지 않다는 심리가 음모론을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케네디 대통령은 사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지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라 적힌 글귀는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은 케네디의 영향력을 상징하고 있다. 케네디가 사망 3일전, 참모들과 댈러스 방문 일정을 회의하며 "It's tough day(힘든 날이 되겠군)"이라는 어록을 남겼다는 일화는, 바로 그의 미래를 암시한 불길한 복선이 됐다.
 
케네디 암살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으로 회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부분은, 비극의 흔적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오히려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미국인들의 태도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장소에는 도로에 두 발의 총격을 받은 위치까지 표시되어 있다. 오스왈드의 저격이 이루어졌던 건물은 현재 '식스 플로어 뮤지엄'이라는 이름으로 케네디의 생애를 전시하는 추모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또한 케네디가 사망했던 병원, 오스왈드의 하숙집, 그가 체포된 영화관과 당시 앉았던 좌석, 오스왈드를 검문했던 경찰이 저격당하여 사망한 자리에는 추모 팻말이 설치되는 등, 모두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그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봉태규는 "우리 나라도 비극적인 사건을 그저 잊으려고 하기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억할 것들은 보존하고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장동민은 가해자 오스왈드의 집까지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자칫 모방 범죄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조심스럽게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현재까지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지나간 잘못이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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