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중반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회현상을 뜻하는 '열정페이'라는 말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해외에서는 '무보수 인턴'이라고 불리는 열정페이는 특정업무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꿈을 가진 사회 초년생을 턱 없이 낮은 임금으로 과한 업무에 시달리게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만 해볼 수 있는 경험' 또는 '선배들도 모두 겪었던 일을 배우는 단계'라는 그럴 듯한 말로 무마시킨다.

사실 대한민국의 군필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 시절 자신도 모르게 열정페이의 폐해를 피부로 경험한 바 있다. 군인들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20대 초·중반 시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에 입대해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자신의 전공과 재능, 그리고 노동력을 군부대에 '착취' 당한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작업을 도맡아 한 병사에게 주어지는 '포상'은 그 어떤 이득도 없는 소대장이나 행정보급관의 관심 뿐이다.

군대 만큼이나 열정페이의 폐해가 심하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패션계다. 특히 저명한 패션잡지의 편집장은 소속 에디터들은 물론이고 디자이너와 모델 등 관련업계 종사자들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2006년에 개봉한 데이빗 프랭클 감독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최고의 패션잡지 '런웨이'를 이끄는 편집장과 초보비서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보여주며 관객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무려 제작비의 9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무려 제작비의 9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 (주)퍼스트런

 
아카데미 후보 21회에 빛나는 '리빙 레전드'

김혜자 배우와 윤여정 배우, 나문희 배우 등은 뛰어난 연기와 모범적인 생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도전으로 후배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배우들이다. 할리우드에도 일흔이 넘은 나이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배우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2010년 미국 국가 예술 훈장을 수상한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더욱 특별한 대우를 받는 여성배우다.

1970년대 초반부터 영화와 연극, TV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하던 메릴 스트립은 1979년 더스틴 호프먼과 열연을 펼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은 완벽하게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폴란드어까지 공부하며 열의를 보인 1982년작 <소피의 선택>을 통해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인정 받았다.

1988년 <어둠 속의 외침>을 통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메릴 스트립은 1990년대에도 <죽여야 사는 여자> <리버 와이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은 2002년 <어댑테이션>으로 통산 13번째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르면서 고 캐서린 햅번의 아카데미 최다후보 기록(12회)을 넘은 '레전드 배우'에 등극했다.

메릴 스트립은 2006년 떠오르는 신예스타 앤 해서웨이와 함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출연해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 역을 맡아 소름 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3500만 달러의 많지 않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세계적으로 3억 26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2008년에는 뮤지컬영화 <맘마미아!>를 통해 뛰어난 노래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2012년 <철의 여인>을 통해 영국 총리였던 고 마가릿 대처를 연기하며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메릴 스트립은 2017년1월 골든글러브 공로상을 수상한 후 품격 있는 연설로 큰 찬사를 받았다. 영화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메릴 스트립은 아카데미 3회 수상(주연상 2회, 조연상2회)과 노미네이트 21회라는 엄청난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여성배우다.

온갖 고생하다가 퇴사 후 보스에게 받은 찬사
 
 메릴 스트립(오른쪽)은 코미디 요소가 강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출연하고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메릴 스트립(오른쪽)은 코미디 요소가 강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출연하고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주)퍼스트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2003년에 출간됐던 로렌 와이스버거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되는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역시 각색과정에서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원작에서는 일과 가정,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완벽한 인물로 묘사되는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가 영화에서는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해져 남편과 이혼을 하는 등 조금은 인간적인 면이 강조된 것이 대표적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최고 볼거리는 역시 미란다 프리슬리에 완벽하게 녹아 든 메릴 스트립의 탁월한 연기였다. 앤 해서웨이 역시 런웨이의 인턴사원 앤드리아 삭스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지만 미란다 그 자체로 변신한 메릴 스트립의 열연 앞에선 큰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대중적인 코믹 드라마 장르였음에도 메릴 스트립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유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국내에서도 전국 170만 관객을 모았고 2017년에는 재개봉됐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는 뉴욕의 화려한 패션과 생활, 그리고 완벽한 직장상사 미란다의 카리스마, 온갖 시련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며 최고의 패션잡지 '런웨이'에 어울리는 직원이 된 앤드리아의 성장스토리 등 20~30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는 마음에 들면 고개를 한 번, 정말 마음에 들면 두 번 끄덕이고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낼 때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런웨이'에서 퇴사한 앤드리아는 '뉴욕 미러'의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에 건너편에서 차를 타려던 미란다와 눈이 마주친다. 아무 반응 없이 무심하게 차에 탄 미란다는 차에서 앤드리아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앤드리아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낸 것이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경쾌하게 흘러가긴 하지만 사실 앤드리아는 심할 정도로 지나친 노동착취를 당한다. 보스가 원하는 취향의 커피를 사오고 힘들게 회의를 준비하는 과정까지는 그나마 비서 업무의 연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보스 자녀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해리포터> 미발매 원고를 구해 오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갑질'이자 심각한 노동착취에 해당한다(하지만 앤드리아는 '지인찬스'를 활용해 <해리포터> 미발매 원고를 구해온다). 

까다로운 사수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에밀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앤드리아의 직장 선배였다.

에밀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앤드리아의 직장 선배였다. ⓒ (주)퍼스트런

 
자고로 군대나 직장에서는 자신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사수'를 잘 만나야 한다.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꼼꼼한 사수를 만나면 일을 배우는 것은 물론 생활이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앤드리아의 사수이자 미란다의 수석비서 에밀리는 상당히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앤드리아가 일에 익숙해 지면서 두 사람도 점점 친구처럼 가까워지고 앤드리아가 퇴사하면서 명품들을 모두 에밀리에게 선물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미워할 수 없는 앤드리아의 사수 에밀리 역은 영국 출신의 배우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블런트는 <울프맨>과 <걸리버 여행기> <루퍼> <엣지 오브 투모로우> <콰이어트 플레이스> <메리포핀스 리턴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작년에는 <콰이어트 플레이스2>와 <정글크루즈>로 코로나19 시대에 두 편이나 북미 흥행 1억 달러를 돌파한 배우가 됐다.

앤드리안이 힘든 직장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물심양면으로 앤드리아를 도왔던 나이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이젤은 회장과 딜을 한 미란다에게 버림 받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프랑스 편집장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이젤을 연기한 배우는 <퍼스트 어벤저>에서 '약골'이던 스티브 로저스를 슈퍼솔저 실험에 참가시키는 어스킨 박사 역으로 유명한 스탠리 투치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슈퍼모델 지젤 번천이 카메오에 가까운 조·단역으로 출연해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영화 초반 에밀리의 회사 내 절친으로 두 차례 등장하는 번천은 앤드리아의 패션을 보고 "쟤는 도대체 무슨 치마를 입은 거야?"라고 비웃는다. 2004년 <택시: 더 맥시멈>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던 지젤 번천은 공교롭게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후 영화 활동을 중단하고 패션계로 돌아갔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