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 일본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핵무기 보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일본 집권 자민당은 현행 방위비를 약 5조 4천억 엔에서 10조 엔으로 두 배 가까이 확대하겠다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미 2012년 아베 정권 출범 이후 방위비 증강을 지속해왔으며,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중국과의 영토 분쟁 등을 내세워 방위력 강화의 당위성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은 최근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일본이 평화헌법(일본국헌법 9조1항)을 파기하고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며 우려의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의 주변국들은 과거 방위력 강화를 통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제국주의 일본의 부활'이라는 데자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6월 2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일본침몰, 자멸을 불러온 태평양전쟁'편을 통하여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다. 일본 전문가인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서, 태평양 전쟁의 대표적인 3대 전투(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오키나와 전투)를 돌아보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현대 세계사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봤다.

일본을 더 큰 수렁에 몰아넣은 중일전쟁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전격 기습으로 시작된 진주만 공습은 태평양전쟁의 서막이었다. 일본은 1차대전 직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일본은 1차대전 당시 전쟁물자 판매로 큰 이익을 남기면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일본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88함대 프로젝트' 등을 발표하며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
 
이에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1921~1922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고 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에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들을 불러들여 상호 영토 불가침과 해군력 군축, 중국에 대한 이해조정 등에 대한 협정을 맺는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30년 런던에서 열린 해군 군축회의에서 일본과 군사력 축소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의 팽창을 또 한번 견제했다.
 
일본과 미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는 1931년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은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을 견제하던 미국은 만주사변을 침공이라고 비난했다. 국제연맹은 1933년 제네바 회의를 열고 진상조사 끝에 참가 44개국 중 42개국 찬성 투표, 반대 1표(일본), 기권 1표(태국)로 일본의 만주 점령이 불법 침공이라는 보고서 결과를 인정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는 제국주의와 반미감정에 기반한 극우세력이 등장하며 갈등이 악화됐다. 평화외교와 군축을 추구하던 하마구치 오사치-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역시 잇달아 극우 강경파들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방일중이던 유명 희극인 찰리 채플린도 이때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 사회의 광기가 있었다.
 
일본은 만주침공을 불법으로 인정한 데 반발하여 국제연맹을 탈퇴했고, 1934년에는 워싱턴 군축조약마저 파기하며 본격적으로 해군력을 포함한 군비 증강에 나섰다. 1936년에는 육군 장교들이 천황 친정의 국가개조를 주장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2·26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군부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일본은 천황을 방패막이로 삼은 '전쟁국가'의 길로 들어산다.

1930년대 전세계를 휩쓴 경제대공황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자 군부는 외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쟁을 감행한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자원을 수탈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1937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난징 시민 수십만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난징대학살을 일으켜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은 일본을 더 큰 수렁에 몰아넣었다. 일본은 석유와 철, 부품 등을 모두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중국의 거센 저항에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군수물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와 외교적 압박까지 직면했다. 미국이 더 나아가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폐기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자, 수출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수출-수입의 길이 모두 막히고 큰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과의 전면전' 결론 내린 일본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고립되어 가던 일본에게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2차세계대전이었다. 유럽 열강들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시선이 쏠린 틈에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열강들의 식민지를 노려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미국을 견제했다.

미국은 타국의 영토와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태평양의 현상유지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다. 간이 커진 일본은 급기야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과의 전면전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미 해군을 무력화시키기위하여 진주만 공습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진주만 공습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훗날 A급 전범)와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였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이를 나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야마모토는 태평양 함대가 있는 미국의 급소, 진주만을 빠르게 공격하여 승기를 잡고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미국도 일본의 수상한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필리핀 정도를 생각했을 뿐, 설마 주력 함대가 있는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은 미군이 예상한 상상밖의 범위에 있었다.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먼드 킴멜 제독은 일본의 공격을 받은 지역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함대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항공기를 비행장 한가운데 모아놓도록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진주만 공습 때 피해가 더 커지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의 두 가지 핵심 목표는 태평양 함대의 완전한 무력화와 비행장 항공기 파괴였다. 약 1시간 50여 분간 2차에 걸친 공격으로 1177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민간인을 포함하면 3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군함 18여 척, 항공기 188대 등이 파괴됐다. 반면 일본은 약 29대의 항공기와 6대의 군함, 약 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진주만 공습은 겉보기에 대성공처럼 보였지만 일본은 결정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항공모함을 지휘하던 나구모가 더 이상의 손실을 우려하여 오일탱크와 병참기지를 타격하자는 3차공격 제안을 거부했다. 주요 인프라가 보존된 태평양 함대가 회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이었다. 또한 일본의 핵심 타깃이었던 항공모함이 외부에서 작전을 수행하느라 진주만 공습의 재난을 피할 수 있었고, 이미 기습공격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결국 미국의 항공모함을 한 척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는 훗날 태평양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분노한 미국은 이튿날 진주만이 공습 당한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규정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1차대전을 겪고 반전정서가 강하여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미국이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자원 입대자가 넘쳐날 만큼 민심이 180도 뒤바뀌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의 성공에 도취되어 본격적으로 태평양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공습 6개월 만에 동남아시아 일대는 일본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은 보존된 항공모함 전력과 장거리 폭격기를 활용하여 1942년 도쿄 공습을 시작으로 복수전에 돌입한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이후 약 600년 만에 본토를 공격 당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다.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된 미드웨이 해전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미국과 일본 해군의 첫 전면전은 미드웨이에서 벌어졌다. 일본은 태평양 중심에 위치하여 전략적 요충지였던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하고 하와이에 있던 미국의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격파하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 앞서 벌어진 1942년 5월 산호세 해전에서 미국의 항공모함 2척을 격침시키며 기세를 높였다.
 
당초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 전력상 일본이 다소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상황이 속출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상대의 전략과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새로운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이 이끄는 수뇌부는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노린다는 정보의 신뢰도에 반신반의했으나, 암호해독가의 강력한 설득으로 역정보를 거짓으로 흘려서 암호 해독 내용이 결국 사실이었음을 알게된다.
 
또한 실제 전투에서는 산호세 해전으로 침몰한 줄 알았던 항공모함 요크다운이 태평양을 이동하면서 계속 수리를 병행하는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전장에 복귀하며 일본군을 당황하게 했다.
 
초반 전황은 일본에 유리했다. 일본은 미드웨이 제도 장악 대신 미군의 항공모함을 노리는 공격을 단행했다. 미국은 대함전용인 뇌격기 항공대를 접근시키며 일본의 함선을 노렸지만 일본은 뛰어난 기동성으로 뇌격기 격추에 유리한 제로센을 투입했다. 공중전투에 불리한 미국 뇌격기들이 대거 격추당했다.
 
설상가상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다수의 항공기들이 방향을 잃고 일본 항공모함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망망대해서 연료 부족으로 싸우지도 못하고 추락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발견한 일본의 전투함을 따라 추격하다가 항공모함을 찾아내는데 성공하며 전황은 반전됐다. 미국 항공기들의 일제 폭격이 시작되며 일본 해군의 핵심전력이었던 아카기, 히류 등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침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여기에 250여 대의 항공기와 3천여 명의 병력까지 잃었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으로 받은 피해를 만회하고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가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 이후 막대한 물자를 바탕으로 대규모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차츰 전력에서 일본을 압도하게 됐다. 미군과 연합군은 1942년 과달카날 전투를 비롯하여 태평양 일대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했고 일본군은 결국 점령지를 모두 포기하고 본토로 철수해야했다.
 
미군과 일본군의 마지막 격전지는 오키나와였다. 1945년 3월, 미국은 전쟁 종결을 위하여 일본의 본토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했고, 보급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오키나와 공략을 시도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전투이기도 했다. 미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일본군은 이른바 '가미카제 자살 공격'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저항이 가장 극심했던 4월 6일에는 약 300여 대의 가미카제 항공기가 자살공격을 위하여 출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사에서 이전에 보기 드문 극악무도한 전술로 미군도 5월 말까지 전투함 20여 척이 침몰하고 150여 척이 파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육상전에서도 소년병들을 징집하여 철혈근황대라는 이름으로 최전선에 투입하는 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군인과 민간인 주민들을 섞여서 동굴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심지어 전선이 악화되자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집단자살령을 내리기도 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학살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려서 공포감을 심어주는가하면, 자살을 거부하는 주민들을 오히려 수류탄으로 먼저 학살했다.
 
80여 일에 걸친 소모전으로 오키나와에서는 약 20여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6만 6천여 명, 미군은 1만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1/4이 사망했는데. 당시 오키나와에 징집된 조선인 1만 명을 포함하여 약 12만에 가까운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에서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은 죽은 최악의 전투로 회자된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을 앞당기는 나비효과로도 이어졌다. 오키나와에서 일본의 광기 어린 저항을 확인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다.
 
그제서야 일본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승전국 미국의 주도로 평화헌법이 제정됐다. 평화헌법 9조에는 '일본 국민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을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육해공군과 그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21세기 일본은 이러한 평화헌법을 깨고 다시 '전쟁하는 나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차대전의 비극이 벌어졌던 오키나와에는 다시 미사일 부대가 배치되고 장거리 미사일 도입이 적극 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비극을 낳고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과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그간의 역사와 닮아있다.
 
알베르 카뮈는 "평화는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투"라는 어록을 남겼다. 일본의 오판으로 시작되어, 엄청난 대가를 치른 끝에 결국 자멸로 끝난 태평양전쟁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올바른 역사란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고 그 진정한 의미와 교훈을 제대로 마주할 때 한 발 더 나아갈수 있음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