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 출신 프랑스 배우 아이사 마이가는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미셀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 그리고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등 다수의 필모그래피를 만만찮게 꾸려가는 중견배우다. 주로 준주연급으로 활동 중이지만 애니메이션 <아야의 밤엔 사랑이 필요해>와 줄리앙 람발디의 코미디 <아프리칸 닥터> 등에선 주연을 맡기도 했었다. 구 식민지 출신으로 이만하면 충분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셈이다.
 
하지만 아이사 마이가의 활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연기 활동 외에도 그녀는 아프리카의 여성과 아이를 위한 의료지원 NGO 일원으로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사회운동과 영화 관련 경력을 연결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본인이 직접 감독으로 작업한 다큐멘터리 <물 위를 걷다>는 고향 세네갈 북부의 사하라 사막 내륙국 니제르의 유목민 풀라 족이 사는 타티스트 마을이 기후변화로 겪는 시련을 배경으로 1년여의 시간을 담는다.
 
1_타티스트 마을이 처한 절박한 상황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 Orange Studio

 
영화의 출발은 10월, 사하라 사막과 초원의 경계인 '사헬' 지대에 건기가 시작되는 시기다. 마을 유일한 학교는 후반 학기가 시작되고 주민들은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여인들은 당나귀에 물통을 싣고 어딘가로 줄지어 향한다. 상하수도는 당연히 없는 동네이니 사람과 가축을 먹일 물을 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매일 모래바람을 맞으며 10km를 걸어가야 하는 우물에 도착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나날이 확장되는 사막화는 타티스트 마을은 물론 인근 동네 전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중이다.
 
마을의 남자들은 유목민인 그들에겐 전 재산이자 생명 줄과도 같은 가축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한참동안 집을 비우기 일쑤다. 그동안 살림은 물론 생명수인 물을 구하는 건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다. 이번해의 건기가 시작되고 환경 변화가 심상치 않자 마을 여자들은 지금 상황이 그저 예전처럼 참고 넘기기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직감한다. 그녀들은 청원서를 작성해 멀리 떨어진 정부 관청에 제출하려 한다. 바로 우물작업 시추요청이다. 그만큼 그녀들에게 물 부족 문제는 매일 자신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절박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수고를 들여 마을 여자들은 관청에 청원서를 접수하고, 촌장은 지역의 높으신 분(군수)을 마을에 모셔오는 등 주민들은 이것저것 자구책을 찾는다. 하지만 기껏 모셔온 높으신 분은 듣기 좋은 말씀은 하시지만 당장 마을의 절박한 현안 해결에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 학교 시설이 낡은 게 문제라는 그분 말씀에 마을 여자들은 수자원 문제가 풀리면 아이들이 등교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현실 상황을 직설한다. 그리고 마을 남자들을 총출동시켜 학교 보수를 형편껏 진행한다.
 
1월이 되었다. 물 조달은 점점 만만찮은 난제가 되어간다. 펌프 역할을 해오던 당나귀들도 이제 힘겨운 티가 역력하다. 신경이 곤두선 마을 어른들은 물 사용을 통제하며 노심초사한다. 천진난만 물장난을 칠 나이의 아이들이 호통에 기가 팍 죽는 모습이 속출한다. 어른들이라고 아이들을 그렇게 혼내고 싶겠는가. 이들의 풍경은 사막 유목민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생존의 법칙과 닮은꼴이다.
 
14살 소녀 울라이의 부모는 어린 소녀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마을을 떠난다. 아빠는 소에게 먹일 풀을 찾아 이곳저곳 유랑하러,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인접국인 나이지리아로 떠나는 것이다. 남겨진 동생들은 온전하게 울라이가 책임져야 한다. 울라이는 학교도 가고 싶고 배우고픈 것도 많은 그 나이 또래 꿈 많은 소녀이지만 그녀가 직면한 현실은 꿈을 좇을 나이에 당장 가뭄을 견디고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2_먹을 물을 얻기 위한 소녀와 동생들의 고행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 Orange Studio

 
이제 이야기는 단순히 물 부족에 신음하는 타티스트 마을의 가뭄을 견디는 풍경을 넘어서는 문제를 병행하기 시작한다. 세태를 풍자하는 부가기능은 마을의 유일한 학교 교실 현장이 주로 담당한다. 한쪽에선 생계수단을 마련하고자 임시/영구적으로 마을을 떠나는 주민 행렬이 이어진다. 울라이의 엄마처럼 남쪽 나라들로 가 계절 일용직 노동자로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 입을 덜려는 이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그렇게 입을 줄였음에도 이제 그들이 구할 수 있는 물의 양은 최소 필요수요에 달랑달랑한 수준이다. 큰마음 먹고 어린 아이의 몸을 씻도록 하는 사치(?!)의 순간, 그 호화로운 샤워는 고작 작은 대접에 든 접시 물을 한 움큼씩 몸에 흘리는 게 전부다. 울라이는 빠듯하게 엄마가 남겨두고 간 것과 마을 친지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식량을 아끼고 또 아껴가며 남은 양을 계산해놔야 한다. 늘 굶주리며 누나에게 먹을 것 타박하는 동생들이 배고픔에 지쳐 서로 다투는 것을 제어하랴 쉴 틈이 없다.
 
학교의 하나뿐인 교실에선 교사가 기후변화와 지하대수층의 존재를 설명한다. 교사의 수업내용은 신랄하다. 부자나라들이 자원을 낭비하고 쓰레기를 마구 버렸는데 정작 아프리카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쥐구멍을 찾고픈 심정이 된다. 우리는 기후위기가 우리 대에는 그저 먼 훗날 이야기처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곤 한다. 하지만 지금 저 아이들에게는 기후변화가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바로 당장 생존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기후위기로 사막화가 진전되면서 수자원은 점점 부족해지게 된다. 교사는 사막 아래에도 물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하대수층의 존재다. 아득한 먼 과거에 지하수가 괴인 지층이 있다. 이 물을 기계 장비를 사용해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며 그들이 몇 달 전 청원한 우물 공사를 혹시나 하며 기다리는 게 마을 주민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어간다. 하지만 지하대수층 역시 무한정 퍼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지하수까지 소비하면 정말 이후엔 대책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말라죽을 이들에게 그것 또한 나중 일일 테다.
 
4월이 되자 건기는 절정에 달한다. 울라이는 더 이상 홀로 버티기가 한계에 달한다. 부모는 언제 돌아올까 늘 먼 지평선을 응시한다. 당장 먹을 물을 얻기 위한 소녀와 동생들의 고행은 거듭된다.
 
3_고난의 시기를 겨우 넘기고 찾아온 유예된 행복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영화 <물 위를 걷다> 스틸 이미지 ⓒ Orange Studio

 
마침내 7월, 이 지역에 우기가 돌아왔다.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비라는 존재가 내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비가 쏟아지는 우기 묘사는 마치 판타지 영화 <듄>의 무대처럼 다가온다. 영화의 주 무대인 모래혹성 '아라키스'에 사는 원주민 프레멘 족은 비라는 존재를 상상 속 산물로 간주하는 사막의 민족이다.(실제로 작가인 프랭크 허버트는 사막 민족 베두인에게서 프레멘의 설정을 가져왔다) 물이 희소해진 마을에 마침내 빗방울이 천둥과 함께 들이친다. 널어놓은 옷가지가 젖고 손볼 틈 없어 비가 새는 집 안이지만 아이들은 그저 웃는다.
 
이제 부모들이 차례로 돌아온다. 새 옷, 간식, 라디오 같은 선물과 함께. 하지만 의지할 어른들이 돌아왔다는 게 울라이는 제일 기쁘다. 마을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이웃마을 투아레그 족 아이들이 물이 괴인 웅덩이로 와 마을 아이들과 뒤섞여 논다. 그저 천진한 풍경 같지만 수자원 문제는 사막과 초원 지대에서 역사적으로 항상 분쟁의 핵심요인이었다는 것을 제작진은 상기시키려는 듯 비춰진다.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 사막 국가들에서 자원 분배와 민족 문제로 내전의 핵심세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이 풍족하니 이렇게 평화롭게 어울리는데 말이다.
 
다시 10월이 되고 건기가 돌아오면 영화 속 마을주민과 바깥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은 이제 하나가 되어버릴 테다. 이제 또 앞으로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다시 도회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엄마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소녀 울라이의 눈앞에, 마치 선물을 가져온 신들처럼 대형 공사차량들이 줄지어 등장하기 시작한다. 1년 전에 접수시켰던 청원서가 이제야 회신된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생존을 걱정하며 물을 구하러 다니던 게 발전된 과학기술의 수혜로 순식간에 깊은 지하를 굴착해 우물을 뚫어낸다.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자 마을에는 축제가 열릴 기세다. 그렇게 영화는 마을주민 입장에선 해피엔딩 드라마에 가까운 결말을 맞이한다.
 
제목인 <물 위를 걷다>의 의미는 학교 수업 중 교사가 니제르엔 물이 없는 게 아니라 깊은 지하에 많이 있다고 지하대수층에 대해 설명하자 아이 하나가 천진하게 묻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그럼 우리는 물 위를 걷는 거네요?" 교사도 미처 생각 못한 답인지 즉답하지 못한다. 교실의 아이들은 도저히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우기가 오고 뒤이어 우물이 개통되자 아이들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 순간 주민들의 행복한 표정은 잊기 힘들다.
 
하지만 지하대수층의 고갈은 또 다른 재앙의 우려를 낳는다. 비가 없어 관개수로에 의지하던 고대 문명들이 지하수 고갈과 관개시설 파괴로 사라져간 역사는 수두룩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 한 바가지에 저렇게 주민들의 희비가 교차되는 걸 보고 난다면 우물 뚫어주는 사업이 더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누구나 들 법하다. 기후위기가 빈곤한 3세계에 가져오는 파괴적 위협을 타티스트 마을이 1년간 겪은 생생한 르포 다큐멘터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물을 물 쓰듯 하는' 게 누군가에겐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깨닫게 될 테다.
 
3세계 곳곳에서 수자원 부족은 그저 목마름을 넘어 재앙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시리아 내전도 오랜 농경지대의 황폐화로 도시로 몰려든 빈곤층 문제에서 촉발했다는 설이 대두된 지 오래고, 사막화 과정을 겪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내전과 극단주의 세력의 발호가 확인되는 상황이다. 물 부족 현상이 초래할 디스토피아는 이미 <매드맥스> 시리즈만 봐도 충분하지 않은가. 인간의 상상력은 결국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상상력이 다시 현실화되는 위험한 시대로 향하는 셈이다.
 
가뭄이 해소되지 않는데 '흠뻑쇼'가 될 말인가 하는 논쟁에 찬반양론이 불타오르던 한국사회다. 각자의 입장과 논리가 치열하게 격돌하지만 수자원의 낭비는 결코 올바른 방향이 아니란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난다면 당분간 세면대에서 기운차게 수도를 틀어놓긴 힘들지 않을까?
 
<작품정보>
물 위를 걷다 Above Water
2020|프랑스|다큐멘터리|89분
감독 아이사 마이가
 
2022 제19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상영작
물 위를 걷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아이사 마이가 니제르 사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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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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