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방송에는 숨겨진 불문율이 하나 있다. 주 타깃층인 남성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여성 출연자의 다리를 보여주고, 방송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남성 출연자는 정장을 입는다. 그리고 이러한 불문율은 JTBC의 스포츠 예능 <최강야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최강야구>는 '국민타자' 이승엽이 '최강 몬스터즈'의 감독을 맡고, 박용택, 정근우, 장원삼, 심수창 등 프로야구를 빛낸 은퇴 선수들이 고등학교 야구부와 '진짜 경기'를 펼친다. 은퇴 후에도 변하지 않은 선수들의 최선을 다한 플레이에 팬들은 야구 없는 월요일 밤마저 야구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중계 카메라 50여 대와 제작진 233명이 투입된 역대급 스케일이 더해져 "예능이 아니라 진짜 야구다"라는 호평을 받기 충분했다.
 
 JTBC <최강야구> 창단식에 출연한 치어리더

JTBC <최강야구> 창단식에 출연한 치어리더 ⓒ JTBC

 
제작진은 치어리더와 응원단장도 섭외해 리얼함을 살렸다. 지난 6일 방송된 최강 몬스터즈 창단식에서 선수들이 입장하자 여성 치어리더들이 나란히 서서 응원하는 장면이 송출됐다. 카레이서 옆에 레이싱 모델있고, 격투기 선수 옆에 라운드 걸 있듯이, '최강야구'는 정장을 갖춰 입은 선수들 옆에 짧은 치마 입은 치어리더를 세웠다. 프로 스포츠에서 수 년간 반복된 고루한 클리셰, 한국 야구판이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리얼하게 보여줬다.

치어리더들은 실제 프로야구팀 응원단 소속 7~8년차의 프로였지만 '치어리더계의 꽃'이라는 자막으로 짧게 소개되었을 뿐, 제작진은 이들에게 마이크도 채워주지 않았다. 단 한마디 없이 그저 꽃같은 미소만 보내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역할이었다.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음에도 <최강야구>는 여성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마이크를 주지 않았으니 목소리가 없다. '꽃'이라는 수식어가 먼저 불리고 이름은 작게 지나간다.

'정장과 짧은 옷'이란 불문율은 각 중계 방송사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서 지난 수 년간 변하지 않은 법칙이었다. 프로야구 중계권을 가진 방송사 네 곳은 경기가 끝난 후 그날 경기를 갈무리하는 방송을 송출한다. 여성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고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전문가로서 경기의 주요장면을 해설하는데, 이때도 남자만 항상 정장을 갖춰 입고 여성 아나운서는 다리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는다.

스포츠 채널의 여성 아나운서들이 '불편한 의자'에 앉는 이유

이들이 촬영하는 세트장에도 숨은 불문율이 있다. '진행자의 하반신을 잘 보이도록 한다.' 그래서 평범한 의자 대신 낮은 소파나 아주 높은 의자를 두어서 풀샷을 잡았을 때 각선미가 잘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미국 보수 성향 방송국 폭스 뉴스가 남성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한 방법과 유사하다. 폭스 뉴스의 창립자 로저 에일스는 남성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방법으로서 '투명 책상(Lucite Desk) 전략'을 고안했다. 여성 아나운서의 다리가 보이게끔 투명한 유리 책상 앞에 앉아 방송하게끔 한 것이다. 로저 에일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기 전까지 여성 출연자들은 상부의 허락 없이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로저는 죽었지만 그의 여성혐오적 유산은 뿌리 깊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한국 방송계, 특히 특히 남성을 주 타깃층으로 잡는 스포츠 방송에서도 여전한 공식으로 받아들여진다.
 
 폭스 뉴스의 앵커

폭스 뉴스의 앵커 ⓒ FOX NEWS

 
반면 KBS N 스포츠의 <야구의 참견> 등 남성만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평범한 의자와 불투명한 책상을 배치하며 출연자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다.

야구는 4대 구기종목 중 유일하게 여성 리그가 없음에도 KBO리그 여성 관중 비율은 48%에 달한다(2019년 기준). 또한 현장에는 아나운서, 치어리더, 배트걸 등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날씨가 춥든 덥든 야구에 열정을 다하며 한 포지션을 지킨다. 사람들은 그녀를 '야구장의 꽃'으로 추앙하다가 관상기간이 지나면 새 꽃으로 바꾼다.

한 여성 아나운서는 인터뷰에서 "연차가 쌓일수록 경쟁력이 떨어진다. 여성 아나운서라면 누구나 다음 시즌에도 방송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해봤을 것"이라며 경력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한 적 있다. 야구계의 여성 노동자들은 사랑하는 야구장이 자신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는 절망감을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한국 프로야구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란 슬로건으로 출범했다. 하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성적 대상화되고 성희롱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면, "여성분들은 일단 배트에만 맞아면 안타인 줄 알고 환호한다"거나(5월 14일 박재홍 해설위원 발언) "포스 플레이 규칙은 너무 어려워서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설명하기 난감하다"(5월 24일 KBSN스포츠 <야구의 참견> 중)며 팬을 무시하는 말이 일상적이라면, 어린이들은 꿈과 희망이 아닌 여성혐오를 자연스럽게 배울 것이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속 해설위원 멜라니 뉴먼이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는 어린이를 중계부스에 초청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속 해설위원 멜라니 뉴먼이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는 어린이를 중계부스에 초청했다. ⓒ CBS

 
미국 메이저리그, '유리천장' 깨는 시도 늘어났다

지난 2021년 9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경기 중 한 여자 어린이가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멜라니 캐스터님, 혹시 중계부스에 조수가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는 11살 엘리가 여성 캐스터 멜라니 뉴먼에게 구직 광고를 보낸 것이다. 멜라니는 엘리와 만나 따뜻한 포옹을 나눴고, 후에 중계부스에 초대해 직접 마이크를 잡을 기회도 주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중계진이 등장한 직후의 일이었다.

2021년 7월 20일 열린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템파베이 레이스의 경기는 캐스터 멜라니 뉴먼, 해설자 사라 랭, 사이드 리포터 알라노 릿조, 하이디 와트니, 로렌 가드너가 진행했다. 사라 랭은 "단 한 명의 소녀라도 우리를 보고 영감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임무를 이뤘다고 생각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하이디 와트니는 "남자 아이들도 여성들이 중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이 일을 하는데에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니라 스포츠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라고 말했다.
 
 2021년 7월 20일,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중계진'이 방송한 경기. 왼쪽부터 사라 랭, 멜라니 뉴먼, 알리아나 리조

2021년 7월 20일,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중계진'이 방송한 경기. 왼쪽부터 사라 랭, 멜라니 뉴먼, 알리아나 리조 ⓒ 유튜브

 
최근 미국은 최초의 여성 단장, 여성 코치, 여성 감독이 탄생하는 등 '기울어진 야구장'의 균형을 바로잡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구태의연하게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이란 말을 반복하지 말고, 어떤 꿈과 희망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나는 여자 어린이들이 스포츠를 보면서 관상기 짧은 꽃이 아닌, 나이테가 쌓일수록 단단해지는 나무를 꿈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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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는 우리가 특별히 만나야 할 어떤 인물, 어떤 계층이 아니다. 그는 기준에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이다." _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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