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전남도청이 함락되었던 날 아침 전북 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알리기 위한 시위를 했다. 당일 학교 앞에는 탱크가 있었고 상공에는 헬기가 떠서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오면 발포하라는 명령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건 전주신흥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5·27 신흥 민주화 운동이었다.

5·27 신흥 민주화 운동이 다큐 영화로 제작되었다. 바로 < 5·27 불꽃 >이란 작품이다. < 5·27 불꽃 >은 당시 신흥고에 있었던 교사와 학생들의 증언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다. 제작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8일 < 5·27 불꽃 >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을 서울 여의도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
 
 다큐 영화 < 5·27 불꽃 >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

다큐 영화 < 5·27 불꽃 >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 ⓒ 이영광

 
- < 5·27 불꽃 >이란 다큐 영화를 제작하셨잖아요. 마친 소회가 어떤가요?
"이게 완벽하게 끝난 건 아니에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몇 가지 해소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 원래 그 부분까지 마무리 지어 1시간 반짜리로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 60분 조금 넘는 분량이죠. 제가 볼 때 한 20분 정도 더 만들어야 마무리가 될 것 같아요."

- 그럼 왜 지금 시사회를 하신 건가요?
"그 20분을 제가 만들 자신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후 20분의 내용이 5·27 이후에 학교를 떠난 학생들을 찾아내는 거와 당시 전북 지역 계엄사령관이었던 대령에 대해서 알아보는 거죠. 그 부분을 제가 1년 동안 이래저래 노력 많이 했었는데 제 개인으로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마무리 짓자고 판단했고 이거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보면 누군가 그 상황들을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까 싶었고요."

- 지난 5월 26일과 27일 < 5·27 불꽃 > 시사회를 했는데 어떠셨어요?
"전주에서 상영회하려고 처음에는 전주 상영관을 알아봤었어요. 근데 신흥고 쪽에서 얘기해 주기를 이건 우리 학교 얘기니까 우리 학교에서 상영하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요청하셔서 상영했고 학생들이 한 2천 명 정도가 본 것 같아요. 학생들에겐 되게 뜻깊은 시간이었을 거라고 저는 예상하고 또 학교 선생님들께서 이 작업에 대해서 많이 호의를 보여주시더라고요. 끝나고 나서도 고생 많이 했고 잘 봤다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서울 상영회는 생각보다 많이 안 오셨어요. 5월 27일 상영했었는데 졸업생들 모임이 겹친 거예요. 시간이 그분들한테는 5월 27일이 중요한 날이거든요. 따로 이미 예약해놨더라고요. 후반 작업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5월 27일 상영했는데 원래는 24일 상영할 계획이었어요."

- < 5·27 불꽃 >은 1980년 5월 전주신흥고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시위를 다큐로 제작한 거잖아요, 어떻게 제작하게 됐나요?
"제가 신흥중을 졸업했어요. 신흥중학교 1학년이 1987년도 6·10 항쟁 있던 시기였어요. 그때쯤 중학교 과학실에 비디오 하나가 짱박혀 있었어요. 그게 5·18 비디오였어요. 너무 잔인해서 그걸 다 보지 못했죠. 하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5·18 얘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5·27 민주화 운동이 있다는 걸 기사 통해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래서 한 명 한 명씩 만나서 당시 얘기를 들었어요."

- 처음에 뭐부터 시작하셨어요?
"일단 사람들 만나서 인터뷰를 시작했죠. 맨 처음에 전화 통화만 하거나 카메라 없이 만나 뵈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하고 조명을 들고 와서 한 명씩 인터뷰하기 시작했죠."
 
 다큐 영화 < 5·27 불꽃 >의 한 장면.

다큐 영화 < 5·27 불꽃 >의 한 장면. ⓒ 김종관 제공

 
- 사람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나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만나고 싶은 분들을 소개시켜달라고 했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만남을 이어갔죠. 제가 만약에 유명했다면 제작 기간이 줄었을 수도 있겠죠. 제 다큐에 나오는 분들 같은 경우 한 2년 동안 설득해서 나온 분도 계시고 1년 동안 찾아다니다가 겨우 연락이 돼서 딱 한 번 만났는데 인터뷰 약속을 하기로 해놓고 또 안 나타나요, 제가 찍은 건 그때 가지고 왔던 디카로 찍었던 영상밖에 없는 사람도 있고 그 만남을 가져가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 바로 신흥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1980년 5월 당시 전주에서의 민주화 분위기를 얘기했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에 한 고등학교에서 전교생이 나와서 반독재 반계엄 시위를 일으킨다는 건 사회적 분위기를 봤을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길거리 지나가다가도 전두환이 어쨌다고 하면 사복경찰이 나타나서 바로 눈앞에서 때려잡으니까요. 이건 전주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 당시 분위기로 봤을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앞에 보여주고 싶었어요."

- 5·18의 첫 희생자는 당시 전북대생이었던 이세종 열사였죠. 근데 왜 전주는 비교적 잠잠했을까요?
"이게 전주하고 광주가 다른 지점이죠. 전주는 밤 12시 다 자고 있을 때 때려 잡았어요. 그래서 한 명은 죽었잖아요. 근데 광주는 출근 시간 사람들 다 모여 있는 공간 안에서 때려 잡는 걸 다 봤거든요. 만약에 전주에서도 잠자고 있는 새벽 시간이 아니라 아침 시간에 때려잡았다면 전주에서 5.18이 벌어졌을 거예요."

- 그럼 왜 전주가 아닌 광주에서 때려잡았을까요?
"그게 제 예상인데 광주에서 일을 벌이고 싶었던 거죠."

- 왜 신군부는 광주가 타깃이었을까요?
"이건 제 견해예요. 당시에 정치적으로 가장 힘 있는 사람이 김대중이었고 김대중의 내란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전주보다는 광주가 더 적합한 거죠. 물론 목포도 가능했었어요. 하지만 북한군이 들어와서 활동할 만한 거대 도시가 있어야 얘기가 되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김대중 내란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던 거죠. 광주 사건이라고 하는 건요."

저변에 민주주의 의식이 깔려 있던 신흥고     
   
 다큐 영화 < 5·27 불꽃 >의 한 장면.

다큐 영화 < 5·27 불꽃 >의 한 장면. ⓒ 김종관 제공

 
- 당시 신흥고뿐만 아니라 다른 고등학교도 같이 시위하려고 했지만 안 된 거고 신흥고만 한 거잖아요. 다른 학교는 사전에 발각되어 못한 건가요?
"사전에 다른 학교 뿐만 아니라 신흥고도 발각되어 27일 아침에 주동 학생들은 다 잡혀가요. 그러나 신흥고는 워낙 저변에 민주주의 의식이 깔려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주동 학생들과 상관없이 벌어져 버린 거예요."

- 왜 그랬을까요?
"그게 신기한데요. 신흥고는 당시에 이 일로 인해서 두 명이 배후 조종자로 징역을 살게 되는데 이분들도 하는 말이 똑같아요. 뭐냐면 자기들이 아니었어도 신흥고는 했을 것이다죠. 왜냐하면 신흥고는 저변에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시국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했다고 해요. 그리고 전남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타학교들보다 조금 더 광주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죠."

- 신흥고는 역사와 전통 있는 미션스쿨이잖아요. 그 영향도 있었을까요?
"있었죠. 그때 아침에 선생님이 들어갔을 때 학생들의 눈은 이미 뒤집어져 있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학생들끼리 분위기가 고조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학생들이 선생님들한테 '선생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서 왜 우리한테는 못하게 하냐'는 식이었죠."

- 선생님들이 학교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았잖아요.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위험하니까 막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고 학생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배운 건 그게 아닌데 막으니 그에 대한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죠. 제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선생님들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국 상황에서도 굉장히 이렇게 소신 발언하시고 굉장히 비판하셨다가 갑자기 막으니까 너무 위선자처럼 보였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수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그러더라고요."

- 선생님들이 막은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5·27 때 학생들이 나가 학생들이 몇 명 죽고 5·18이라고 하는 게 전국적으로 퍼져서 신군부 세력의 독재 기간이 더 줄어들 수도 있었을 테고 신흥고등학교라고 하는 곳이 민주화의 성지처럼 더 많이 알려지게 되고 또 광주와 관련된 이슈들을 더 확대시킬 수 있잖아요, 이런 점에서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또 희생이 따르잖아요. 근데 그 학생들의 생명을 대신 살린 거죠."

- 당일 아침 신흥고 교문 앞에 탱크가 와 있었고 상공엔 헬기가 또 있었죠. 제가 알기론 학생들이 학교를 나갈 경우 발포 명령까지 있었다고 알거든요. 일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인데 탱크가 왔었고 발포 명령까지 있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그 당시 광주에 있는 계엄군과 전주에 있는 계엄군이 다르지 않아요. 왜냐면 전남북이 같은 지휘 체계거든요.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들 보면 물놀이하다가 총 맞아 죽잖아요. 그런데 신흥고는 전두환 물러가라고 수천 명이 시위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건 광주보다도 더 심각한 사건인 거예요. 왜냐하면 광주는 자기들이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최소한 계엄 명령이 떨어지고 시위 안 했어요. 굉장히 조심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길거리 지나가다가 죽었잖아요. 그 계엄군들이 똑같은 계엄군이에요. 하나의 지휘체계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서 막 시위하고 있는데 당연히 쏘라고 할 수 있는 거죠."

- 다행히 교사들의 제지로 희생자 없이 끝났잖아요. 그 후 내부 갈등이 있었나 봐요?
"아무래도 그때 학생들도 몇몇이 안 보이고 또 잡혀 들어가고 특히 이강희, 이우봉 학생 같은 경우는 또 시위를 자기식대로 하다가 잡혔거든요. 그런 것들을 학생들이 보잖아요.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선생님들과의 학생들의 갈등이 계속됐죠. 그리고 그걸 봤던 당시 2학년, 1학년 학생들도 예전 같은 그런 사제관계가 아니었죠. 거기다가 선생님들도 떠났거든요. 그러면서 선생님들끼리도 갈등,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이도 갈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 같아요."

- 주동자였던 박영화와 채범석은 감독님이 찾아다녔지만 못 찾은 것 같아요.
"사실 영상에 보면 잠깐 주소지 찾아가는 것밖에 안 나왔지만 제가 거의 한 1년여를 수소문했어요. 그런데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 그들을 찾으면 뭔가 이야기해줄 게 있는 건가요?
"이 사건 가지고 아직도 누가 맞다 혹은 누가 틀리다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핵심은 박영화거든요. 박영화만이 알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누가 맞는지 정리할 수 있겠죠."

- 1982년 즈음 신흥고 건물이 불타잖아요. 5·27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이게 방화로 추정이 되는데 1980년도 5·27 사건 때 1학년이 3학년 됐을 때 벌어진 일이잖아요. 그 사이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갈등이 계속 지속됐어요. 그런 상태에서 방화 사건이 벌어진 거거든요. 근데 그 당시 신고는 방화로 안 하고 자연발화로 했었어요."

- 제작하며 느낀 점이 있을까요?
"이 사건이 묻히게 되면서 전북 지역에서는 5·18 관련된 것들이 전혀 이슈가 안 되죠, 하지만 이 사건이 5·18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죠. 왜냐하면 전남도청이 5월 27일 새벽에 다 죽임을 당하고 다 체포되면서 무력감에 빠졌잖아요. 하지만 전북에서는 불꽃이 꺼지지 않았습니다라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작할 때가 어려운 점은 뭐였나요?
"이분들이 다 조심스러웠고 자기 얘기를 꺼내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속으로 자랑스러워하지만, 이걸 꺼내서 누군가한테 상처 주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워했죠. 그리고 또 제가 만나 본 분 중에서는 실제로 고문 당하고 트라우마에 살고 계시는 분도 계세요. 그런 분들 같은 경우 만나서 인터뷰하거나 생활을 찍을 때 그 당시의 고통이 저한테 느껴지더라고요."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세요.
"누구도 5·27을 기념해 주지 않을 거예요. 이걸 기념할 수 있고 발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북 지역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전북의 5·27 민주화 운동을 최소한 전북 지역에 있는 고등학생들은 알 수 있을 만한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겨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전북의소리'에도 중복 게재합니다.
김종관 5.27 불꽃 전주신흥고 5.27 신흥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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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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