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으로 다시 한번 월드클래스임을 입증한 박찬욱 감독. 박 감독은 <박쥐>가 걸작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최고작이라는 자평을 남겼다. 개봉 당시 주제의 폭과 깊이,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호평과 난잡한 테마와 과잉된 표현이라는 혹평이 팽팽이 맞부딪히며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박쥐>. 박찬욱, 송강호 콤비의 재회를 바라며 그들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송강호). 그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기력함에 괴로워하다 아프리카에서 진행되는 백신 실험에 자원한다. 그러나 실험 도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에 이르고,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아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하지만 그 피는 상현을 뱀파이어로 만든다. 한국으로 돌아온 상현은 어린 시절 친구 강우(신하균)와 강우의 어머니 라 여사(김해숙)를 만나고, 강우의 아내 태주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21세기의 독창적인 테레즈 라캥

옳은 질문 하기는 박찬욱 감독의 특기다. <올드보이>는 시대를 뛰어넘은 명작으로 기억된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배우들의 열연, 스타일리시한 화면과 장도리 씬으로 대표되는 처절한 액션, 지금도 회자되는 충격적인 내러티브도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왜 가뒀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냐'라는 대사를 통해 던진 옳은 질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없었다면 흔한 액션스릴러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하는 <박쥐>는 옳은 질문이라는 화두를 재탐색한다. <박쥐>는 어떻게 목적을 달성할지에는 관심이 없다. 목적이 달성된 후가 더 중요하다. 강우를 죽인 뒤 행복할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은 죄책감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서로의 탓을 하며 죽어라 싸우는 단계까지 추락하고 만다. 사실 이 모습이 낯설지는 않다. <올드보이>에서 누나를 사랑했던 우진(유지태)이 대수(최민식)에게 던진 '우리는 알고도 사랑했어,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박찬욱의 해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접근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도 높은 비극으로 기억될 수 있겠지만 <올드보이>와 <테레즈 라캥>의 성실한 재현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긴 어려웠을 것 같다. 여기에 '뱀파이어 신부'라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더해지며 <박쥐>는 비로소 <올드보이>를 뛰어넘어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박찬욱의 <테레즈 라캥>으로 거듭난다.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뱀파이어 신부를 통해 바라본 윤리적 문제

신부 상현이 오프닝에서 겪는 두 가지 사건은 <박쥐>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된다. 효성은 오래전에 카스텔라를 빈민들에게 양보했다는 자랑을 하다가 상현에게 피리 연주가 듣고 싶다고 말한다. 상현이 피리를 가져오는 사이에 효성은 의식불명에 빠진다. 유 간호사는 연인의 죽음 이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고해성사한다. 상현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유 간호사에게 우울증약을 복용하라고 하지만 기도나 해달라는 타박을 듣는다.

기도와 상담이라는 신부의 역할에 무력감을 느낀 상현은 백신 임상실험에 지원한다. 그리고 상현은 죽었다가 살아난다. 그가 지원한 임마뉴엘 연구소는 교황청에서 인정받지 못한 곳이다. 임상실험을 위해 이브 바이러스를 주입 받는 장면은 선악과를 통해 인간적 감정을 알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일치한다. 50명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현은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고 있지만 이런 이유로 사실 신부 상현은 이미 죽어버린 후다.

예견된 파국이다. 숭고한 희생으로 보이지만 따져보면 신부의 본분을 망각하고 쉽게 고난을 해결하다 포기해버리려는 비겁한 회피에 더 가깝다. 순교로 포장된 자살이라고 할까. 신부로서 사망선고를 받은 상현에게 그간 억눌렸던 인간적 감정이 극대화된다. 사랑, 분노, 질투, 식욕, 그리고 성욕까지. 문제는 이런 비겁한 태도와 극대화된 인간적 욕구가 뱀파이어가 된 상현의 문제해결 방식으로 내재된다는 점이다.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상현은 강우에게 가정폭력과 학대를 당한다는 태주를 구원하겠다고 직접 뛰어들어 살인을 입에 담는다. 유 간호사에게 정신과 상담과 우울증약 복용을 제안했던 이성적인 모습은 이제 없다. 자신을 성자로 생각하고 성당 앞에서 노숙하는 사람들 앞에서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뱀파이어의 피를 통해 잃어버린 시력을 찾겠다는 아버지 같은 노신부의 타락을 냉정하게 뿌리치지 않는다.

신부도 수사도 아니고 모든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상현은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로 딜레마에 빠진다. 태주에게 뱀파이어라는 비밀을 밝히고 자신이 신부라서 좋아했냐며, 뱀파이어는 단지 식성이나 생활 리듬의 문제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상현의 내면을 표현한 명장면이다. 새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박쥐처럼 경계에서 발버둥 치던 상현은 아버지 같은 노신부마저 살해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떠냐 하면요, 한마디로 선택받은 것 같아요. 아, 내가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게 아니었구나, 어쨌든 나한테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기셨구나, 이런 거. 무슨 역할이냐? 난 모르지. 유부녀 사랑하는 역할인가? 난 모르지…. 한 사람의 흡혈귀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간 알게 되지 않겠어?"

상현의 문제는 스스로에게 잘못된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뱀파이어인지 신부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된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태주는 잘못된 질문을 던진 상현이 보일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형상화했다. 정체성이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는 태주는 뱀파이어로 부활한 뒤 인간사냥을 시작한다.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는 소리를 한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을 도와주며 피를 얻는 상현은 태주의 폭주 때문에 이제 성실한 흡혈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빠르게 결론을 내야만 한다.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스틸컷 영화 <박쥐> 스틸컷 ⓒ 영화 <박쥐>

 
<올드보이>에서 한발 나아간 박찬욱의 냉담한 믿음

이제 신부도,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상현은 세 번의 부정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결정한다. 먼저 뱀파이어의 본능을 부정하며 대학살의 현장에서 기지를 발휘해 이블린을 구한다. 다음으로 신부로서의 신성을 부정하며 기꺼이 돌 맞기를 자처해 자신을 성자로 추앙하며 노숙을 하던 사람들의 환상을 깬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생존본능마저 부정하고 태주와 함께 장렬히 아침 햇살을 맞으며 자살적 순교로 생을 마친다. 오프닝에서 읊조리던 다음의 기도문이 자기 예언적으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병 환자와 같이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입술과 혀를 짓찧으시어 그것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며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것도 움켜쥘 수 없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물론 풍비박산 난 강우와 라 여사의 집. 선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마작하러 왔다가 참변을 당한 오아시스의 멤버들, 그 외에 흡혈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상현의 마지막 결정에 '숭고'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유효하다. 그러나 <박쥐>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 현상현에게 너무 가혹한 비극이다.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변화로 타인의 피를 먹어야만 생존이 가능하고 아버지 같은 신부, 친구의 가족과 주변 사람, 사랑하는 사람까지 제 손으로 죽여야 했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뜻하지 않게 비극을 불러오는 일은 수없이 많다. 뱀파이어처럼 물리적 피를 빨진 않지만 정신적이나 경제적으로 타인의 피를 빨게 되는 상황도 마주해야 한다. 뱀파이어인지 사람인지 모를 우리가 박쥐와 다를 건 무언가. 상현이 순교적 자살을 택했든 어쨌든 선한 의도로 임상실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누가 상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올드보이>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도(강혜정)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대수의 선택이다. 다행히 <박쥐>는 한발 더 나아갔다.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초래한 비극은 완결짓겠다는 의지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아침햇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가혹하게만 인간을 몰아부치는 운명의 굴레에서 한 줌의 숭고함은 지켜낼 수 있다는 박찬욱의 냉담한 믿음은 최소한의 죄책감마저 외면하는 현재에 더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nd in the end.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k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