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연기자들에게는 '전성기'가 있기 마련이다. 스무 살을 갓 넘은 2008년 지상파 3사 역대 최연소 연기대상을 차지했던 문근영은 2010년대 이후 건강 등의 문제로 활동이 급격히 뜸해졌다. 반대로 2,30대 시절 긴 무명시절을 보냈던 라미란은 40대가 시작된 2015년 <응답하라1988>에 출연하면서 뒤늦은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만성 연기자는 역시 나문희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1961년 MBC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데뷔한 나문희 배우는 약 30년 간 조·단역을 전전하다가 1995년 <바람은 불어도>를 통해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들어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국민엄마'로 이름을 날리던 나문희 배우는 2017년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청룡영화상과 대종상,백상예술대상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만성형 연기자가 나문희 배우라면 할리우드에서는 이 배우가 마흔을 넘긴 나이에 조금 늦게 자신의 진가를 관객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80년대부터 일찌감치 연기력을 인정 받았으면서도 90년대가 된 후 비로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수잔 서랜든이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90년대 초·중반 전성기가 시작된 서랜든은 1995년 (전)남편이 연출한 영화 <데드 맨 워킹>을 통해 드디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데드 맨 워킹>은 중립적인 시선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데드 맨 워킹>은 중립적인 시선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 (주)서우영화사

 

'4전5기' 끝에 아카데미 트로피 차지한 여성배우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서랜든은 1970년 <죠>에서 히피 떠돌이 역으로 데뷔한 후 컬트영화 <록키 호러 픽쳐쇼>, 브룩 실즈의 어머니를 연기한 <프리티 베이비> 등에 출연했다. 그렇게 여러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 활동하던 서랜든은 1980년 <아틀란틱 시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이름을 올렸고 1982년에는 폴 마줄스키 감독의 <탬피스트>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연기력에 비해 지명도가 높지 않았던 서랜든은 1988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 19번째 남자 >를 통해 유명세를 떨쳤다. 90년대 들어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가 된 서랜든은 199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1992년 조지 밀러 감독의 <로렌조 오일>에 출연하며 2년 연속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1995년에는 <의뢰인>을 통해 세계적으로 1억1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서랜든은 1995년 <19번째 남자>에 함께 출연해 결혼까지 했던 팀 로빈스가 연출한 <데드 맨 워킹 >에 출연했다(두 사람은 2009년에 이혼했다). <데드 맨 워킹>에서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찾아가는 헬렌 수녀를 연기한 서랜든은 뛰어난 감정연기로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서랜든은 <데드 맨 워킹>을 통해 5번째 후보에 오른 끝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40대 중반의 나이에 배우로서 정점에 올랐다.

1998년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출연한 <스텝맘>에서 애드 해리스의 전처 역을 맡아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서랜든은 1999년 <여기보다 어딘가에>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무책임한 어머니로 출연했다. 2002년 <와일드 클럽>에서는 록밴드의 열성팬으로 연기변신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2008년에는 더 워쇼스키스의 <스피드 레이서>에도 출연했을 만큼 서랜든은 사실상 장르의 경계가 무의미한 배우다.

8~9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로 이름을 떨치던 서랜든은 2014년 <타미>와 2017년 <어 배드 맘스 크리스마스>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 최악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그리고 각종 크고 작은 국제 영화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서랜든은 누가 뭐래도 90년대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다.

사형제도에 대한 명배우들의 묵직한 질문
 
 영화의 주제와 상관앖이 수잔 서랜든(왼쪽)과 숀 펜의 명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데드 맨 워킹>은 영화적 재미가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제와 상관앖이 수잔 서랜든(왼쪽)과 숀 펜의 명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데드 맨 워킹>은 영화적 재미가 충분한 작품이다. ⓒ (주)서우영화사

 
현재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사형제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1997년 12월을 끝으로 20년 넘게 사형이 '집행'된 적은 없다. 따라서 사형 선고를 받을 경우 가석방 없는 무기 금고형이 되는 셈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한 만큼 한국에서도 유명무실한 법이 된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자주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응답자의 70% 이상이 사형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데드 맨 워킹>은 흑인 빈민가에서 희망의 집을 운영하는 헬렌 수녀(수잔 서랜든 분)가 강간 살인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집행일을 기다리는 매튜 폰슬렛(숀 펜 분)을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현재도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만큼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작품이다.

<데드 맨 워킹>이 사형제도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역시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 덕분이었다. 수잔 서랜든은 매튜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감정이 요동치는 헬렌 수녀의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줬다. 특히 여성배우가 어려운 장면을 연기할 때 '치트키'처럼 쓰이는 눈물연기에 의존하지 않은 서랜든의 노련한 감정연기를 보면 아카데미 수상자의 위엄이 느껴진다.

비록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돌아갔지만 사형수 매튜를 연기한 숀 펜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남자연기자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특히 악당처럼 돌변한 눈으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다가도 죽음을 앞에 두고 점점 무너져 가는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다. <데드 맨 워킹>으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던 숀 펜은 이듬 해 <더 홀>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지금도 많은 관객들에게 <쇼생크 탈출>의 앤디로 기억되고 있는 팀 로빈스는 90년대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던 '감독 겸 배우'였다. 1992년 <밥 로버츠>의 연출과 각본,주연을 맡으며 감독으로 데뷔한 팀 로빈스는 1995년 <데드 맨 워킹>을 통해 세상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주목 받았다. 1999년에는 <크레이들 윌 락>을 연출하며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로빈스는 21세기 들어 연출을 하지 않고 연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은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숀 펜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남자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숀 펜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남자연기자상을 수상했다. ⓒ (주)서우영화사

 
사실 '생명의 존엄성'을 언급한다면 사형제도는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랄한 범죄자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피해자 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사형제도 폐지는 섣불리 이야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레이몬드 J.배리가 연기한 월터의 아버지는 직접 재판이 진행되고 사형이 집행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매튜에게 연민을 느끼고 먼 발치에서 매튜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예의를 보였다.

헬렌 수녀와 마찬가지로 카톨린 신자로 나왔던 월터의 아버지가 그나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했다면 매튜 일당에 의해 딸을 잃은 홉의 부모는 헬렌 수녀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헬렌 수녀가 매튜와의 상담을 그만두고 피해자 가족들의 편이 됐다고 믿었던 홉의 부모는 헬렌 수녀가 여전히 매튜의 정신적 조언자임을 알게 된 후 "매튜 폰슬렛은 신의 실패작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헬렌 수녀를 집에서 냉정하게 쫓아냈다.

<데드 맨 워킹>에서는 매튜와 가족들의 면회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매우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다. <스쿨 오브 락>과 <걸리버 여행기>,<쥬만지> 등으로 유명한 배우 잭 블랙이다. 잭 블랙은 매튜의 동생 크레이그 폰슬렛 역을 맡았는데 지금보다 다소 슬림한 체구가 눈에 띈다. 형이 사형수임에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매튜와 옛날 얘기들을 나누던 크레이그는 면회시간이 끝날 때 매튜에게 "힘내"라며 응원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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