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여정

뜻밖의 여정 ⓒ tvn

 
지난 5월 8일부터 5부작으로 방영된 <뜻밖의 여정>은 2022년 아카데미상 시상자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 윤여정 배우의 '여정'을 담은 나영석 피디의 예능이다. '미국 구경'인가 싶었는데 뜻밖의 여정에 당도하게 된다. 바로 '아름답게 나이들어 가는 시간'이다.
 
여우조연상은 어떻게 왔는가 

2021년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을 때 그녀의 수상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역시 윤여정이다, 고진감래다, 혹은 참 운이 좋았다? <뜻밖의 여정>을 보면 윤여정 배우에게 <미나리>라는 영화가 온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윤여정에게 <미나리> 대본을 가져다 준 이는 이인아씨이다. 그녀는 20년 전 산드라 오가 유명세를 얻기 전 윤여정과 산드라 오가 동반 출연하는 작품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진행되던 작품은 무산되었고 당시 윤여정 배우를 만나러 한국에 와있던 인아씨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배우 자신도 작품이 엎어져 황망했을 텐데, 외려 윤여정 배우는 낙담한 인아씨에게 밥을 사주며 독려했다고 한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인아씨는 '윤여정이란 배우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지만, 그런 배우의 넉넉하고 너그러운 모습이 더해져 시간이 흘러 <미나리>의 대본을 여정 배우에게 가져다주도록 했다. 

<미나리>를 번역한 홍장여울은 어떤가. 5회차 <뜻밖의 여정> 내내 홍장여울은 윤여정 배우가 머무는 집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번역가라는데, 그런데 알고보니 두 사람의 인연 역시 길다. 10여 년 전 홍상수 감독 영화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연출부 막내로 동분서주하던 홍장여울을 눈여겨 보고 불러 밥을 사주었단다. 이런 식이다. 윤여정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으로 만든 인연은 이렇게 오랫동안 배우가 아낌없이 베푼 밥값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뜻밖의 여정

뜻밖의 여정 ⓒ tvn

 
<뜻밖의 여정>이 아니더라도 윤여정 배우의 넉넉한 인심은 오래전부터 회자됐었다. 젊은 감독들에게 아낌없이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던 윤 배우, 그중 한 사람이던 이재용 감독과 함께 찍은 <죽여주는 여자>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판타지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나영석 피디는 말한다. '말 그대로 뜻밖의 여정'이라고. 윤여정 배우와 함께 한 아카데미 시상식 구경인 줄 알았던 프로그램이 오랜 지기 꽃분홍 여사에서부터 동생 친구 정자씨, 밥 사주던 인아씨, 홍장여울 등 여정 쌤의 스태프, 그리고 아들 친구 에릭남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북적북적이는 프로그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은 잘 사잖아", <미나리>라는 영화를 함께 한 이들, 그리고 미국까지 와서 의상을 조율해주는 의상 담당가 등 모두가 그녀의 밥 친구들이었다. 나이가 들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 사회에서 '밥을 잘 산다'는 윤여정 배우의 자화자찬이 새롭다. 내 주변에는 '또라이'밖에 없다는 윤여정 배우의 친지론, 그런데 그런 배우의 말을 홍장여울은 '또라이를 수집'하시는 거 같다고 번역한다.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대신, 기꺼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인맥과 의리에 공들여 온 여정의 결과물이 '아카데미'인 것이다. 

마흔의 피디가 전하는 나이듦의 고민에 '내가 나이들어 봐서 아는데'라는 '라떼는 말이야' 대신, '나 역시도 나이듦은 처음이라'며 '정답은 없다'라는 낯선 삶의 행로, 그 동반자로서의 여정 배우의 진솔한, 그리고 겸허한 토로가 외려 나이를 막론하고 윤여정 배우와의 교류의 벽을 허문다. 그녀가 왔다는 이유만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LA의 윤'스 스테이, 어떻게 나이들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이 보여진다. 
 
76세의 현역, 윤여정 
 
 뜻밖의 여정

뜻밖의 여정 ⓒ tvn

 
폐지 수집 생계 노동을 하는 노인들의 다큐를 보다 놀란 장면이 있다. 작년, 재작년 교통사고를 당했다던 80세의 할머니가 폐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막 뛰셨다. 폐지를 줍는 사회적 존재를 차치하고, 그 순간 그분은 나이가 무색하게 '현역'이셨다. 외람되지만 <뜻밖의 여정> 5부작을 보며 그 80 노인의 생생한 삶의 열정을 윤여정 배우를 통해 새삼 확인하였다. 

물론 윤여정 배우를 아끼는 한참 후배 홍장여울은 이제 그만 너무 애쓰지 마시고 건강을 챙기시라는 말끝을 눈물 때문에 마치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후배의 우려가 무색하게 윤여정 배우는 10시간에 가까운 아카데미 시상 여정의 강행군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그녀의 나이 76세이다. 우리 사회 76세의 노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라고 생각해 보면 그녀의 현재는 경이롭다. 

하지만 그 '경이'는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시작을 여는 건 LA까지 챙겨온 아령 등으로 시작하는 운동이다. 근육은 나이가 없다더니 거의 뼈밖에 없는 듯한 체격임에도 카메라 셔터 앞에서 꼿꼿하게 당당한 애티듀드를 보여주는 그 저력의 시작이다. 

어디 체력만인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서사를 다룬 <파친코>와 관련된 인터뷰를 위해 이면지 몇 장에 빼곡하게 영어 인터뷰를 준비했다. 나이들어 힘들다고 말하는 대신, 캐서린 햅번의 자서전을 인용하여 배우라는 직업의 고달픔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일찌기 '꽃보다 누나'부터 간간히 엿보이던 '성실한 독서가' 배우의 면모가 드러났다. 웃자고 시작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열기가 치열했던 인물 상식 퀴즈에서 그 누구보다 눈을 반짝이며 우수한 상식을 자랑하던 그 내공은 윤여정이란 배우의 현재가 그저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As we get older, We stop having goals in our life. And Yuh-jung unnie shows us that we are never too old to accomplish big things.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목표가 없어지잖아요. 근데 여정 언니가 보여줬죠. 무언가를 이루기에 우리가 결코 늙지 않았다는 걸요."

<뜻밖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건 76세의 노인이 아니라, 여전히 앞날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현역 배우 윤여정이다. '모범생'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한 말처럼 윤여정 배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부터 화보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나이든 노인' 대신, 여전히 76세의 현역으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상 하나도 그저 트로피를 전해주는 게 아니라, 수화까지 준비해간 계획성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소회에도 불구하고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한다.

그렇게 여전히 현역 배우이기에 아칸소 구석에서 집단 합숙을 하다시피 한 <미나리>의 여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 처음으로 용감하게 '박카스 아줌마'의 서사를 그린 <죽여주는 여자>의 시도는 또 어떤가. 그런 그녀를 에미상을 탄 에니메이션 디렉터 70세의 또 다른 현역 김정자씨는 노년의 길잡이가 되어 준 선배로 존경을 표한다.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았다는 윤여정 배우, <뜻밖의 여정>은 나이든 배우의 후일담이 아니라, 여전히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현재진행형의 한 사람을 만난다. 나이듦은 숫자가 아니라, 더는 노력하지 않을 때 오는 것이라는 걸 여정의 여정은 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s://5252-jh.tistory.com/에도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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