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이 자신보다 체구도 작고 왜소한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여 사망하거나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면? 아마 대부분은 그 이야기를 비현실적이라고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하여 정신적으로 통제되고 지배당하며 일상이 장악된 상황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현대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가리켜 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부른다.
 
6월 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죽음의 늪에 빠진 남자 - 청주 베란다 살인사건 미스터리'라는 부제로 동거하던 연인에게 폭행당하여 피살당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장면. ⓒ SBS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된 이선우(가명) 씨, 직장동료와 지인들은 대부분 이씨를 성실하고 밝고 주변을 잘 챙기는 착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망 당시 발견된 시신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온몸 곳곳에 남은 상처와 멍자국들은 고인이 생전에 누군가에게 잔인하게 폭행을 당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2022년 4월 1일 국립과학수사원은 피해자의 사인은 둔력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끝에 치료도 받지못하고 추운 곳에 방치되어 사망에 이른 것.
 
시신이 발견된 날, 경찰에 자수한 범인은 놀랍게도 이씨의 여자친구라는 한씨였다. 그녀는 호신용품인 삼단봉으로 이씨를 폭행하여 살해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피해자의 연인인데다 피해자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여성이 그토록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에 유족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씨와 한씨는 지난해 중고 거래 어플을 통하여 처음 알게 된 이후 만남을 가졌고 곧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동거를 시작해 결혼까지 약속했다. 유족과 지인들은 이씨가 연애를 시작한 이후 행복해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씨는 이씨 부모와의 만남을 기피했고 이씨의 지인들 중에도 한씨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만큼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바로 이씨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다는 것. 임신 4개월 차였던 한씨는 아이의 아빠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홈 CCTV가 설치되어있었다. 경찰이 CCTV를 분석한 결과 이씨는 무려 8일간이나 베란다에 감금되어있었고, 잠도 재우지않고 수십차례에 걸쳐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와 폭행을 반복적으로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급기야 한씨는 인터넷에서 구입한 삼단봉으로 피해자를 마구 구타했다. 그녀의 잔혹한 범행은 약 8일뒤 이씨가 사망하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하지만 8일간이나 계속된 폭행에도 이씨는 한번도 한씨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이씨는 172cm의 키에 건장한 체구에 완력도 뛰어난 32살 청년이었다. 지인들은 그토록 폭행을 당하면서도 막지는 못해도 최소한 도망가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혹시 뱃속의 아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검찰은 한씨에게 살인 및 사체 유기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만삭의 몸으로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한씨는 8일간의 감금과 폭행은 인정했지만 계획적인 살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한씨의 주장을 납득할수 없다며 분노했다.
 
한씨의 언니는 당시 한씨가 임신중이었던데다 다이어트약의 부작용,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않는 이씨에 대한 분노 등으로 감정을 조절하지못하는 상태가 되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이씨가 폭행당하고 사망하는 과정이 담긴 홈 CCTV 메모리 영상을 한씨가 직접 경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씨의 사망을 확인한 한씨가 이후 메모리카드를 들고 경찰에 자수한 날은 사건이 벌어지고 한달이나 지나서였다.

경찰조사에서 한씨는 폭행의 이유를 이씨가 전 여자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데 분노를 느꼈다고 진술했다.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이씨의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눈물을 흘리던 전 여친은 지난해 4월 이씨와 헤어진 이후 다시 만난 사실이 없고, 단 한번 통화가 먼저 걸려와서 산부인과를 소개시켜달라는 부탁을 한게 마지막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한씨가 전 여친에게 전화를 걸어 이씨와의 관계를 추궁하는 일도 있었지만, 오해가 풀린 이후에는 한씨가 전 여친을 언니라며 호칭하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고. 여기서 한씨가 이씨를 폭행한 사실을 먼저 언급한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씨는 왜 당하고만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하여 전 여친은 "자기감정을 잘 표현을 잘 못하고 너무 착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폭행당시 CCTV에 녹음된 대화 내용에 따르면 한씨는 폭행을 계속하면서도 "죽을때까지 맞아", "살아서 (베란다 밖으로) 못나간다. 너 죽이고 감방가겠다"는 등 저주에 가까운 이야기를 퍼부은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이씨는 "머리가 아프고 배고파", "미안해", "그만해"라며 몸상태 이상과 고통을 호소하며 폭력을 중단해줄 것을 애원했다.
 
한씨의 직장동료와 대학동기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피해자의 여자친구로서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한씨의 지인들은 그녀가 별다른 문제없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왔던 것을 증언하지만, 정작 피해자 이씨의 지인과 이웃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평범한 연인관계와는 달랐다고 진술했다. 한씨는 이씨에게 문자로 상습적인 폭언을 저질렀고 마치 아이를 다루듯 하대하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씨는 한씨를 만난 이후로 직장에 가불하거나 거액의 카드빚까지 안게 되었다. 심지어 이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한씨는 이씨의 계좌에도 돈을 인출하여 밀린 월세를 내기도 했다. 이씨의 지인들은 평소 검소했던 이씨가 변한 것이 한씨를 만난 이후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씨와 한씨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분석했다. 김태경 서원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한씨는 연애 초기부터 돈 이야기를 한다. 돈이 필요해, 잘곳이 필요해, 너 이거 해줄수 있어?라는 식이다. 거래를 시작하는 거다"라고 분석했다.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금전을 요구해놓고 자신의 곤궁함의 원인이 피해자가 돈을 마련해주지 않아서인 것처럼 피해자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협박아닌 협박을 통해 착취를 해왔다"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한씨는 자살하겠다며 이씨를 수차례 압박하기도 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심리학과 교수는 "이 폭력성은 상대를 봐서 나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한 상대에게 나타난다. 가학성은 자가증폭이라는 특징이 있다. 봉인이 풀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학적인 여러 구상들을 현실적인 방법과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씨의 성향을 이용하여 한씨는 지속적으로 주변의 관계를 끊고 고립을 유도하며 자신의 통제 안에 두려고 압박했다. 박 교수는 "학대로 인한 고통보다 애착관계를 형성한 대인관계에서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심리적인 지배나 종속관계에 더 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씨의 수첩에는 약 40여개 항목에 이르는 한씨에 대한 반성문이 적혀져 있었다. 지극히 사소하거나 심지어 큰 잘못이라고 볼 수 없는 내용들이 다수였다. 문제가 아님에도 문제로 만들고 끊임없이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혼란에 빠졌고 자신의 모든 일이 모두 잘못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한씨에게 정신적으로 길들여진 이씨는 오랜 가혹행위에도 반항조차 할수 없게 된 것. 어쩌면 물리적 폭력보다도 더 위험하고 끔찍한 범죄일수 있다.
 
제작진은 이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김동민(가명)씨를 만났다. 이씨는 동갑내기 친구였던 여성 최씨에게 무려 7년 간 노예처럼 착취를 당했다.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우연히 최씨가 만취하여 이씨와 성적인 접촉을 한 이후, 추행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비정상적인 주종관계가 됐다. 김씨는 최씨에게 맞아 고환이 파열되고 머리가 찢어지는 등 심각한 부상을 겪기도 했다.
 
심지어 최씨는 결혼한 후에도 김씨에게 동거를 강요했고, 최 씨의 남편 역시 착취에 동참했다. 김씨는 최씨 부부가 시키는 집안일을 해야했고, 쇠사슬에 묶여서 트렁크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김씨는 약 7년만에 겨우 최씨부부에게 탈출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그를 또한번 좌절하게 한 것은 누구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 경찰도 김씨보다 체구도 작은 여성에게 오랜 시간 감금당하고 폭행 당했다는 이야기를 선뜻 믿지못하고 의문을 표시했다고. 최씨는 가혹행위를 부정하며 모두 김씨 스스로 원해서 한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탈출직후 심리검사에서 무기력하고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 모습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피해자들보다 힘이 약하더라도 예측불가능한 분노를 표현함으로서 피해자를 압도할수 있다. 피해자들이 순한 사람이면 남자라고 해도 여자 가스라이터에 대해서 상당히 불안해한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지옥을 탈출한 이후에도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씨 부부는 처음엔 사과와 합의로 김씨를 달래려고 했지만, 김씨가 두 사람을 고소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김씨는 '충분히 나갈수 있었을텐데 왜 나가지 않았냐. 신고는 왜 안했냐', '남자가 어떻게 여자한테 당하냐, 힘으로 하면 되지않느냐, 변태 성향이 있는게 아니냐' 등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시선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담당 경찰 역시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못한 수사기관의 안이한 대처를 지적했다.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통제행위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에서 가장 위험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살인-자살과 매우 강력하게 연결되어어있는 위험요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라고 쓴소리를 던졌다.
 
해외에서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강압적 통제로 인한 정서적 학대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매뉴얼까지 구축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 대학생 자살사건 당시 검찰은 20대 남학생의 자살이 당시 여자친구였던 한국인 여성 유씨의 지속적인 자살 종용과 정서적 학대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영국 경찰은 정서적 학대 의혹이 있는 피해자들에게 "두렵습니까. 고립되어있나요?"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진다. 하지만 한국의 경찰은 "많이 다쳤는가. 흉기를 사용해서 때렸는가. 남자인데 왜 여자에게 저항도 못했는가" 등등 물리적으로 증명할수 있는 것들에만 집착하여 보호대상을 구분한다. 이는 사건의 결과에 대하여 수사할순 있지만 사건의 예방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지배하고 파괴한 끝에 결국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증폭되는 범죄들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성별의 차이도, 육체적인 강인함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도 이선우 씨와 김동민 씨처럼 심각한 피해를 입고도 오히려 2차가해를 당하며 고통받고있는 피해자들은 더 많을 수 있다. 범죄는 감시자가 없는 어두운 곳에서 발생하고 누군가는 그 위험성을 깨닫고 불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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