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붉은 단심>의 배경인 1506년 중종반정(연산군 실각) 이후 시대에 두각을 보인 가문이 있다. 파평 윤씨 가문이 그 주인공이다.
 
<붉은 단심>은 1506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역사를 크게 뒤틀어 놓았다. 이 드라마에서 부각되는 가문은 반정공신들인 박계원(장혁 분)과 조원표(허성태 분)의 집안이다. 이로 인해 당시의 유력 가문인 파평 윤씨와 더불어, 이 가문과 비슷한 운명을 걸었던 청주 한씨의 흔적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KBS 사극 <붉은 단심>의 한 장면.

KBS 사극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KBS

 
누가 더 왕후를 잘 배출하나

파평 윤씨가 조선 왕후(왕비)를 최초로 배출한 것은 제7대 주상인 세조(수양대군) 때였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가 이 가문 출신이다. 제9대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역시 그랬다. 제11대 중종의 두 왕비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네 왕후는 제7대·제9대·제11대 때 배출됐다. 제7대 세조가 즉위한 해는 1455년이고 제11대 중종이 세상을 떠난 해는 1544년이다. 대략 90년 정도가 파평 윤씨의 번영기였던 셈이다.
 
청주 한씨도 이 시기에 왕후들을 배출했다. 제8대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제9대 성종의 부인인 공혜왕후가 그들이다.
 
또 다른 여성들도 있었다. 남편 생전에는 왕후가 아니었지만 남편 사후에 왕후로 격상된 소혜왕후(인수대비)도 청주 한씨다. 세조의 며느리이자 추존왕 덕종(의경세자)의 부인인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왕이 되고 남편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그 자신도 왕후가 됐다.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과 결혼한 장순왕후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장순왕후는 남편이 왕이 됨에 따라 사후에 왕후로 추존됐다. 예종은 청주 한씨들과만 결혼했던 것이다. 청주가 본관인 왕후는 시대를 뛰어넘어 조선 후기에도 배출됐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의 부인도 이 가문이다. 인렬왕후가 바로 그다.
 
파평 윤씨와 청주 한씨는 비슷한 시기에 각각 네 명의 왕후를 배출했다. 청주 한씨에 속한 네 명 중 2명은 현직 중전을 지낸 적은 없지만, 이들이 왕실과 결혼했다는 것 자체가 청주 한씨의 영향력을 반영했다.
 
두 가문은 세조에서 중종에 이르는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두각을 보였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문이 보유한 토지와 노비 노동력에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정치적 요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평 윤씨는 1392년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건국 주역들과 인연이 깊었다. 이것이 15세기 중반 이후의 번영을 가능케 했다.
 
정희왕후의 할아버지인 윤승례는 이성계의 친구인 성여완의 딸과 혼인했다. 윤승례의 형인 윤승순은 개국공신인 한상경 집안 등과 혼맥를 맺었다. 윤승례의 아들인 윤규는 이방원과 동방급제 관계였다. 요즘 말로, 고시 동기였다.
 
훗날 한명회를 배출하게 될 청주 한씨에서는 한명회의 할아버지인 한상질이 개국공신이 됐다. 한상질의 형제인 한상경도 개국공신이었다. 또 다른 형제인 한상환은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질을 사위로 들였다. 한상환의 누이는 개국공신의 동생인 안경검과 결혼했다. 건국 주역들과 혼맥으로 얽힌 이런 관계가 15세기 중반 이후의 융성을 가능케 했다.
 
그런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처가인 여흥 민씨를 탄압한 것이 발단이 됐다.
 
청주 한씨는 여흥 민씨와 혼맥을 맺었고, 파평 윤씨는 청주 한씨와 혼맥을 형성했다. 여흥 민씨와 직간접으로 얽힌 이런 관계 때문에, 두 가문도 탄압을 피하지 못했다. 여흥 민씨가 왕실 외척 지위를 활용해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이방원의 선제적 조치들로 인해 민씨뿐 아니라 두 가문도 화를 입었다.

수양대군의 나비효과
 
그랬던 두 가문이 되살아난 계기는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심과 관련됐다. 어린 조카의 왕권을 탐하는 수양대군과 인연을 맺은 것이 두 집안을 부활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윤승례의 손녀이자 윤번의 딸인 윤씨 여성(훗날의 정희왕후)이 수양대군과 결혼한 것, 한상질의 손자인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책사가 된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태종 이방원의 박해를 받은 두 집안은 이방원의 손자인 수양대군을 매개로 되살아났다.

1453년 계유정난에 힘입어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한동안은 청주 한씨가 더 두각을 보였다. 두 명의 한씨 여성이 세조의 후계자인 예종의 부인이 됐다. 예종 다음인 성종의 첫 번째 부인도 한씨 여성이다.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바로 그다.
 
그러나 성종의 세 번째 부인 때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파평 윤씨인 정현왕후가 성종의 부인이 됐고, 같은 가문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중종의 부인이 됐다.
 
파평 윤씨 출신의 마지막 주자인 문정왕후는 일반적인 왕후의 위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왕후+군주'였다 해도 부족함이 없다. 1545년에 중종의 아들인 명종이 11세에 즉위하자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개시한 그는 1553년에 수렴청정이 끝났는데도 정권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1565년에 삶을 마칠 때까지 그의 정권은 계속 이어졌다.
 
이방원이 처갓집을 몰락시킨 것은 문정황후 같은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후와 그 친정 식구들이 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갖는 것을 방지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의 증손자인 예종 때부터 한씨나 윤씨 가문에서 왕후들이 자주 배출됐다. 그러다가 6대손인 명종 때 가서는 문정왕후가 친정을 배경으로 아예 왕권을 억눌러버렸다.
 
왕조국가는 원톱이면서도 투톱인 국가였다. 임금이 중심인 듯하면서도 왕후와 임금이 함께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제와 달리 군주제 국가에서는 왕후의 국정 개입이 어느 정도 용인됐다.
 
이방원은 정치 탄압을 통해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항구적이지 못했다. 문정왕후와 파평 윤씨의 등장은 이방원의 방식이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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