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중종반정(연산군 폐위) 이후를 다루는 KBS <붉은 단심>은 왕실 첩들의 치열한 경쟁을 묘사한다. 공석인 중전 자리를 놓고 유정(강한나 분)과 조연희(최리 분)라는 두 후궁이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친다.
 
드라마 속의 유정과 조연희처럼 왕후가 되기 위해 경쟁한 후궁들이 조선시대에 많았다. 조선 후기인 숙종시대에 인현왕후와 경쟁했던 장희빈(희빈 장씨)이 대표적 사례다.
 
  KBS <붉은 단심> 한 장면.

KBS <붉은 단심> 한 장면. ⓒ KBS

 
후궁이 왕후로 책봉된 마지막 사례

그런데 장희빈은 후궁이 왕후로 책봉된 마지막 사례가 됐다. 왕후가 됐다가 후궁으로 격하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남편 숙종이 매정한 왕명을 내놓았다. 음력으로 숙종 27년 10월 7일자(양력 1701년 11월 6일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은 "이제부터 나라의 법으로 제정하노니,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에 오를 수 없도록 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후궁이 왕후나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이 왕명은 장희빈 대 인현왕후·최숙빈의 대결이 매우 격렬했던 데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었다. 왕실 여성들의 경쟁이 대궐 안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남인당 대 서인당의 당쟁과도 연결됐던 것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의미도 있었다. 이 왕명으로 인해 장희빈은 후궁 출신 왕후의 마지막 사례가 됐다.
 
구한말 고종의 후궁인 엄귀인(귀인 엄씨)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뒤에 귀비(황귀비)가 된 사례가 있다. 이를 근거로 장희빈이 마지막 사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글들도 있다. 엄귀인이 중전에 해당하는 비(妃)가 됐으니, 엄귀인이 마지막 사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황제 국가에서는 '후'가 중전이고 '비' 이하는 후궁이었다. 1897년 이전의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전을 '후'로 부르지 않고 '비'로 불렀다. 그랬다가 제국 선포 뒤에 '비'를 후궁 칭호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엄귀인은 귀비로 불린 뒤에도 여전히 후궁이었다.
 
후궁들의 중전 자리 경쟁은 마지막 사례인 장희빈이 배출되기 200여 년 전부터 치열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활약한 성종시대(1469~1496)가 그랬고, <붉은 단심>의 시대적 배경인 중종반정 이후 시기가 그랬다. <붉은 단심>은 '우리도 중전이 될 수 있다'며 후궁들의 자신감이 특히 팽배했던 그 시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맹자> 고자(告子) 편에 "불효하는 사람을 죽이고, 세워놓은 아들을 바꾸지 말며, 첩을 처로 삼지 말라(誅不孝, 無易樹子, 無以妾為妻)"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도 나타나듯이, 유교를 신봉한 고대인들 중에는 '일반 아들을 세자(세워놓은 아들)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첩을 처로 격상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경고가 충분히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신분과 서열을 특히 중시하는 유교 신봉자들은 처와 첩의 경계를 명확히 해두고 싶어 했다.
 
위 경고는 유학자들이 주역이 된 조선시대에는 더욱 힘을 발휘했다. 조선 초기부터 처와 첩의 차별은 물론이고 적자와 서얼의 차별이 심해진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런 경향에 힘을 실어준 인물은 제3대 주상인 태종 이방원이다. 아버지의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와 갈등을 빚고 강씨의 아들인 세자 이방석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그가 자신의 쿠데타와 살상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경향에 힘을 싣게 됐다. 그는 고인이 된 강씨를 아버지의 첩처럼 취급하면서 첩의 자녀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그 유명한 서얼 차별로 이어졌다.
 
제4대 이하의 주상들은 모두 다 이방원의 혈통에서 나왔다. 그랬기 때문에, 그 후의 역대 임금들은 자기 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첩과 서얼을 차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원의 쿠데타 명분이 그것과 연결되므로, 첩과 서얼에 대한 온정적 태도는 왕권의 정당성을 흔들 여지도 있었다.
 
그런데 첩이 처가 되는 양상이 태종 사후 반세기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 뒤를 이어 두 번째 왕비가 된 폐비 윤씨(제헌왕후)는 물론이고 세 번째 왕비가 된 정현왕후 윤씨도 후궁 출신이었다.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는 이방원 사망 51년 뒤인 1473년에 후궁이 됐다. 그런 뒤인 1476년에 폐비 윤씨가 중전이 되고 1480년에 정현왕후가 새로운 중전이 됐다.
 
태종 이방원은 그 자신이 첩을 열 명이나 뒀으면서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첩들을 차별했다. 그런 이방원의 4대손인 성종에 의해 처첩 차별이 어느 정도 무색해지게 됐다. 그가 두 명의 첩을 연달아 왕후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세종의 속사정
 
  KBS <붉은 단심> 한 장면.

KBS <붉은 단심> 한 장면. ⓒ KBS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KBS2

 
이것을 성종이 용감했기 때문에 생긴 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일의 발단은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 때 생겨났다. 세종이 첩과 서얼에 대한 휴머니즘적 태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에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정으로 첩을 처로 격상시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것이 성종시대의 현상으로 이어지게 됐다.
 
세종의 평소 소신은 첩을 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 18년 12월 28일자(1437년 2월 3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신하들 앞에서 "나는 첩을 처로 삼는 것이 옛 사람들이 경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관행이 옳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일부 글에는 위와 같은 세종의 언급이 1436년 12월 28일자 <세종실록>에 나온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세종 18년 12월 28일'을 양력으로 착각한 결과다. 세종이 위 발언을 했던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437년 2월 3일이 된다. 이날 세종은 세자 이향(문종)의 첩인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렸다. 평소 소신과 달리 첩을 처로 승격시키는 파격을 단행했던 것이다.
 
단종의 어머니인 권씨는 13세 때인 1431년에 네 살 연상인 세자 이향의 첩이 됐다. 그런 뒤 1437년에 이향의 세 번째 세자빈이 됐다. 그는 1441년에 단종을 출산해놓고 눈을 감았고, 1450년에 이향이 임금이 된 뒤 왕후로 추증됐다. 이 여성이 현덕왕후 권씨다.
 
사후에 왕후가 되기는 했지만, 공식 왕후였다. 그는 원래는 첩이었다. 그랬다가 정실부인으로 격상됐고, 그런 다음에 왕후로 추증됐다. 이 사례는 첩이 처가 되는 선례가 됐다. 첩을 처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세종이 이런 선례를 만들게 됐던 것이다. 첩의 지위를 차별한 이방원의 아들이 아버지와 모순되는 행적을 남긴 셈이다.
 
사실, 세종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문종의 정실부인으로 들어온 여성들은 말썽이 많고 스캔들도 있었다. 첫 번째 세자빈인 김휘빈(휘빈 김씨)은 문종의 관심을 끌고자 주술을 이용하다가 폐위됐다. 두 번째 세자빈인 봉순빈(순빈 봉씨)은 궁녀와의 동성애 등으로 폐위를 당했다.
 
이 같은 두 차례 스캔들로 위신이 손상되자 세종은 자신감을 잃었다. 사대부 가문의 규수들을 모아놓고 또다시 간택을 치를 일이 부담스워졌다. 위 날짜 실록에 따르면, 간택을 통해 괜찮은 며느리를 얻을 가능성에 대해 그는 비관적 전망을 갖게 됐다. 세 번째 역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겪어본 사람들 중에서 며느릿감을 고르자'였다. 잘 모르는 사람을 며느리로 들이기보다는 이미 겪어본 사람을 들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로 책봉된 여성이 바로 권씨다. 위 날짜 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권씨가 덕성과 용모를 갖췄다고 판단했다. 평소에 관찰한 결과를 통해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세종은 '나이가 좀 있어서 좋다'는 생각도 했다. 1437년에 권씨는 19세였다. 당시로서는 '나이가 좀 있다'는 느낌을 주는 연령이었다. 또 명문가 출신인 데다가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를 낳은 상태였다. 이런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돼 첩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며느리들의 잇따른 스캔들로 망신을 당한 세종이 아들의 첩을 세자빈으로 만든 이 사건은 '첩을 처로 삼지 말라'는 경고가 조선 왕실에서 무시되는 선례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19년 뒤에 열린 성종시대에 연산군의 어머니가 왕후가 되고 <붉은 단심>의 시대적 배경인 16세기에 후궁들이 중전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된 것은 그 같은 세종의 고민에 기원을 두는 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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