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상상(想像)을 한다. 그리고 상상이 길어지면 대부분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확률이 극히 떨어지는 공상(空想)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공상하던 것들을 자신의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예술가라고 부른다.

1987년, 고3 수험생이었던 한 소년은 집안 창 밖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가 한강 다리를 기어오르다 뚝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정말 실존했던 생명체였을 수도 있고 입시 스트레스를 겪고 있던 소년의 상상 속에서 보였던 '환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소년이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었던 그 장면을 잊지 않고 공상의 범위를 점점 넓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소년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군 전역 후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가 감독이 됐고 2006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배우들과 함께 19년 전에 목격했던 장면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달성했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당시 봉준호 감독은 주인공인 송강호의 외동딸 현서 역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청소년 배우 고아성을 캐스팅했다.
 
 <괴물>은 개봉 후 4일 만에 누적관객수 200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괴물>은 개봉 후 4일 만에 누적관객수 200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 영화사청어람(주)

 

봉준호에게 두 번이나 선택된 여성배우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아역배우로 활동하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MBC의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탄생>에서 왕중왕을 차지한 고아성은 같은 해 KBS의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에서 주인공 노다지 역에 캐스팅됐다. 하지만 <매직키드 마수리>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던 <울라불라 블루짱>은 그리 큰 화제를 일으키지 못한 채 182부로 종영됐다(2년 넘게 방영된 <매직키드 마수리>는 무려 496부작이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고아성에게는 또 하나의 큰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3번째 장편영화이자 11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영화 <괴물>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박강두의 딸 박현서 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큰 스케일과 볼거리,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이 더해진 <괴물>은 전국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고아성은 2006년 청룡영화제 신인상과 디렉티스 컷 어워즈에서 올해의 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괴물> 이후 영화 <즐거운 인생>과 <라듸오 데이즈>,<여행자>, 드라마 <공부의 신> 등에 출연한 고아성은 한국나이로 스무 살을 넘긴 2013년 또 한 번 봉준호 감독, 그리고 송강호와 재회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열차 안에서 태어난 남궁민수의 딸 요나를 연기한 고아성은 '하루 종일도 싸울 수 있는' 캡틴 아메리카와 크로놀(열차 속 환각제)만 있으면 슈퍼맨이 되는 아빠의 보호를 받으며 최후의 생존자 2명 중 한 명이 됐다.

2014년에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에서 학생을 연기한 고아성은 2014년 <오피스>에서 이미례 역을 통해 성인 연기자로 변신했고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2018년 <라이프 온 마스>에서 수사관을 꿈꾸는 윤나영 순경을 연기한 고아성은 2019년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 열사 역을 맡아 청룡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통해 코로나 시국에도 150만 관객을 동원하는 저력을 보인 고아성은 2년 연속으로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성배우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괴물에게 잡혀 가는 작은 소녀에서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긴 성숙한 배우가 된 고아성은 지난 3월에 종영한 MBC드라마 <트레이서>에서 중앙지방국세청 조사관 서혜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괴물에 맞서 싸운 소시민 가족 이야기
 
 <괴물>의 다섯가족은 짧았던 상상장면을 제외하면 한 번도 영화 속에서 모두 모인 적이 없다.

<괴물>의 다섯가족은 짧았던 상상장면을 제외하면 한 번도 영화 속에서 모두 모인 적이 없다. ⓒ 영화사청어람(주)

 
흔히 괴수영화에서는 영화 시작 절반 정도가 지날 때까지 괴수가 등장할 거 같은 분위기만 보여주다가 관객들이 지치거나 방심하고 있는 시점에 괴수를 등장시켜 그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괴물>에서는 영화 시작 13분 50초 만에 괴물이 한강 시민공원에 나타나 시민들을 공격한다. 봉준호 감독은 '자고로 끔찍한 재앙이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괴물을 일찍 등장시켰다고 밝혔다.

<괴물>은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 의해 딸과 손녀, 조카를 잃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변희봉 분), 삼촌(박해일 분), 고모(배두나 분)가 현서(고아성 분)를 찾아 한강을 떠도는 이야기다. 1300만 관객이라는 흥행스코어가 말해주듯 <괴물>은 그저 오락 영화로서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특히 남일의 화염병과 남주의 불화살, 그리고 강두의 마무리 일격이 어우러지면서 괴물을 물리치는 마지막 액션 장면은 여느 할리우드영화의 액션에도 뒤지지 않는다. 

<괴물>이 공개된 이후 국내외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괴물>은 반미영화"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미군부대에서 한강에 방류한 화학폐기물 때문에 괴물이 생겨났다는 설정은 지난 2000년에 있었던 '맥팔랜드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강두에게 바이러스가 있다고 우기는 미국의 주장 역시 이라크전 당시 살상무기를 찾지 못했던 미국의 잘못된 정보를 풍자했다. 물론 감독의 의도와는 별개로 영화를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는 관객의 몫이다.

이처럼 <괴물>은 오락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고 반미 색채가 강한 풍자영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천만이 넘는 관객을 공감시킨 <괴물>의 핵심정서는 바로 '가족'이다. 강두를 비롯한 4명의 가족들은 현서가 살아있다는 것을 듣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강으로 뛰어든다. 영화 중반 힘들게 매점으로 돌아온 가족들이 갑자기 나타난 현서에게 음식을 먹이는 상상장면은 현서를 향한 가족들의 사랑과 절실함을 보여준 명장면이었다.

대부분의 흥행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괴물> 역시 자연스럽게 속편 제작 소식이 들렸다. 비록 봉준호 감독은 <마더>와 <설국열차> 프로젝트 때문에 속편 참여가 무산됐지만 인기 웹툰 작가 강풀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고 2013년에는 배우 곽도원이 출연한 3분29초 짜리 테스트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투자와 캐스팅에 난항을 겪은 <괴물2>는 2022년 현재 사실상 속편 제작이 무산된 상태다.

<살인의 추억> 배우들, <괴물>에도 출연
 
 <괴물>에서 방역요원으로 출연했던 김뢰하는 단편영화 <지리멸렬>부터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쌓은 배우다.

<괴물>에서 방역요원으로 출연했던 김뢰하는 단편영화 <지리멸렬>부터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쌓은 배우다. ⓒ 영화사청어람(주)

 
대부분의 이름 있는 감독들은 전작에서 좋은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을 차기작에서도 그대로 캐스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닌데 주연 송강호와 변희봉 배우 외에도 전작 <살인의 추억>에 출연했던 배우가 <괴물>에 그대로 출연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가 <괴물>에서 강두 가족의 병원 탈출을 돕는 흥신소 직원을 연기했던 박노식이 대표적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들을 폭력으로 수사하는 송강호의 동료형사 조용구 역의 김뢰하도 <괴물>에서 유난을 떨면서 송강호를 합동분향소에서 병원으로 이동시키는 요원으로 짧게 등장했다. <살인의 추억> 오프닝 장면에 출연해 송강호와 의외의 연기 케미를 보인 이재응도 <괴물>에서 노숙자 소년 형제 중 형 세진으로 출연하지만 영화 중반 괴물의 습격을 받아 안타까운 최후를 맞는다.

<괴물>에는 상영 당시엔 무명에 가까웠지만 훗날 유명해진 배우들도 꽤 많이 출연했다. 초반부 괴물의 한강습격 때 쏟아져 나오는 피에 놀라 소리를 지르는 여성(엔딩 크래딧엔 '발동동 아줌마'로 나온다)은 라미란이었고 격리공간에 있던 간호조무사는 고창석이었다. 그리고 "카드빚만 칠팔천"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뚱게바라는 <마담뺑덕>을 연출했던 임필성 감독이 연기했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를 향해가던 후반부 강두를 조사하는 미국인 의사를 연기한 배우는 <양들의 침묵>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할리우드 배우 폴 라저였다. 라저는 캐스팅 당시 '한국의 괴수영화'라는 말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에 왔는데 촬영 시작 후 송강호의 눈빛이 돌변하는 것을 보고 진지하게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괴물>에서 봉준호 감독과 인연을 맺은 라저는 <설국열차>에서도 단백질 블록을 만드는 기술자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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