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터미네이터>의 최고 명대사를 물어보면 10명 중 8~9명은 "I'll Be Back"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 그 대사는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 분)이 경찰서를 습격하기 전 지나가듯 했던 대사로 사라 코너의 "넌 이제 끝났어(You're Terminated)"에 비하면 그렇게 결정적인 장면에 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쉬운 문장과 배우의 아우라가 더해진 "I'll Be Back"은 <터미네이터>를 상징하는 명대사로 굳어졌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감독이나 제작사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장면이 관객들에 의해 명대사나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2004년에 개봉했던 한국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도 후반부 관객들을 눈물 짓게 만든 손예진과 정우성의 열연과 슬픈 장면들 대신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라는 초반부 정우성의 간지러운 대사가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이 남은 명대사 및 명장면이 됐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영화 속이 아닌 영화 외적으로 그 작품 최고의 명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2005년에 개봉했던 전도연과 황정민 주연의 <너는 내 운명>이 대표적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도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 여러 명장면들이 있지만 현재까지 <너는 내 운명>을 대표하는 최고의 장면은 따로 있다. 바로 제26회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황정민의 감동적인 수상소감이었다.
 
 <너는 내 운명>은 오늘날 1억배우가 된 황정민이 처음으로 3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였다.

<너는 내 운명>은 오늘날 1억배우가 된 황정민이 처음으로 3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였다. ⓒ CJ엔터테인먼트

 
멜로부터 스릴러, 로코까지 연출 가능한 감독

중앙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박진표 감독은 1991년 SBS에 다큐멘터리PD로 입사해 <그것이 알고 싶다>와 <사건과 사람들> 등을 연출했다. 그렇게 PD로 커리어를 이어가던 박진표 감독은 2002년 70대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독특한 시선의 멜로 영화 <죽어도 좋아>를 연출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박진표 감독은 <죽어도 좋아>를 통해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PSB영화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2003년 박찬욱, 임순례 등 6명의 감독들이 참여한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서 에피소드 한 편을 연출한 박진표 감독은 2005년 실질적인 상업영화 데뷔작을 들고 나왔다. 다큐멘터리 PD였던 '전직'을 살려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될 거라는 예상을 깨고 박진표 감독은 전도연과 황정민을 캐스팅한 정통멜로 <너는 내 운명>을 연출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PD 출신 박진표 감독이 만든 <너는 내 운명>은 관객들의 기대를 훌쩍 뛰어 넘었다.

박진표 감독의 깔끔한 연출과 두 주연배우의 호연이 돋보인 <너는 내 운명>은 전국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박진표 감독은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연출력을 인정 받았고 황정민은 단숨에 최민식과 송강호, 설경구의 시대에 분열을 일으키며 새로운 대세배우로 떠올랐다. 전도연 역시 <너는 내 운명>으로 대한민국 원톱 여성배우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멜로영화 연출에 재능을 보인 박진표 감독은 2007년 이영호군 유괴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그 놈 목소리>를 연출하며 비로소 탐사보도 프로그램 PD 출신의 전공(?)을 살렸다. 설경구가 피해자 아버지, 김영철이 무능한 경찰, 강동원이 범인 목소리를 연기한 <그 놈 목소리>는 전국 31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비교되면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2009년 김명민이 루게릭병 환자를 연기한 <내 사랑 내 곁에>를 선보인 박진표 감독은 2013년 손예진, 김갑수 주연의 <공범>에 이어 2015년에는 가벼운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오늘의 연애>를 연출했다. <오늘의 연애> 이후 7년 넘게 차기작을 내놓지 않고 있는 박진표 감독은 지난 4월 촬영을 마친 신혜선, 이준영 주연의 히어로 액션영화 <용감한 시민>을 통해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할 예정이다.

영화로 울리고 시상식으로 감동시키는 배우
 
 석중과 은하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눈물을 참을 수 있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석중과 은하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눈물을 참을 수 있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 CJ엔터테인먼트

 
<너는 내 운명>은 농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시골청년 김석중(황정민 분)과 서울에서 내려 온 다방 접대부 전은하(전도연 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 개봉 당시 전도연은 이미 <접속>과 <약속> <내 마움의 풍금> <해피엔드> <별을 쏘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인어공주> 등을 히트시킨 최고의 배우였다. 따라서 <너는 내 운명>이 개봉할 때도 관객들은 전도연이라는 최고의 배우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정작 <너는 내 운명>에서 기대 이상의 연기와 매력을 보인 배우는 석중 역의 황정민이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등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였지만 흥행배우와는 거리가 있던 황정민은 <너는 내 운명>에서 지고지순한 시골총각을 연기하며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은하를 부르고 환풍기를 뜯어 은하의 손을 잡으려 했던 면회 장면은 많은 관객들을 눈물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황정민이라는 배우에게 반했던 순간은 2005년 청룡영화제에서 나왔다. 이병헌과 박해일, 조승우, 류승범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황정민은 "60여 명의 스태프들이 차려 놓은 밥상을 맛있게 먹었을 뿐"이라며 "나는 트로피의 발가락 몇 개만 떼어가도 좋다"는 '밥상론'을 펼쳤다. 그리고 함께 출연한 은하 역의 전도연에게 "너랑 같이 연기하게 된 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어"라는 말을 전하며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사실 전도연이 연기한 은하는 사연도 많고 감정기복도 심한 인물이다. 천수(정유석 분)를 피해 시골 다방으로 숨어 들어온 은하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때 만약 은하를 향한 석중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은하는 세상을 향한 복수를 핑계로 더 나쁜 생각을 먹고 나쁜 행동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너는 내 운명>의 OST는 지난 3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방준석 음악 감독이 맡았다. <라디오스타>의 '비와 당신'같은 창작곡은 없었지만 왁스의 '오빠'와 심수봉의 '사랑 밖에 난 몰라', 지미 데이비스의 'You Are My Sunshine' 등이 영화 속 캐릭터들에 의해 다시 불렸다. 특히 'You Are My Sunshine'은 전도연과 황정민이 함께 부른 버전이 엔딩곡으로 쓰였는데 황정민은 석중처럼 촌스럽게 노래하며 관객들에게 마지막까지 웃음을 줬다.

착한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유일한 빌런
 
 정유석이 연기한 천수는 술만 마시면 성격이 돌변하는 <너는 내 운명>의 유일한 빌런이다.

정유석이 연기한 천수는 술만 마시면 성격이 돌변하는 <너는 내 운명>의 유일한 빌런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2017년과 2018년 <아이 캔 스피크> 한 편으로 대한민국 3대 영화제(청룡상, 대종상, 백상)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한 나문희 배우는 <너는 내 운명>에서 석중의 어머니를 연기했다. 아들의 오랜 짝사랑 끝에 며느리로 들어온 은하를 예뻐하다가도 은하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엔 아들의 마음을 다시 돌리려 한다. 2000년대 초·중반 나문희 배우는 여러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 했다. 

1989년 KBS 특채 탤런트로 데뷔해 <야망의 세월>과 <열정시대> <한강뻐꾸기> 등에 출연했던 정유석은 1990년대 중·후반 활동이 뜸하다가 2000년대 들어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너는 내 운명>에서는 은하가 서울에 있을 때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애인 천수 역을 맡았는데 평소에는 온순한 성격이지만 술만 마시면 성격이 돌변하는 캐릭터로 <너는 내 운명>의 유일한 '빌런' 같은 인물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윤제문과 류승수는 김석중과 함께 시골마을의 '삼노총(노총각 삼총사)'으로 불리는 단짝 친구들로 출연했다(노총각인 석중, 철규와 달리 윤제문이 연기한 재호는 필리핀에서 신부를 데려와 국제결혼에 성공했다). 삼노총은 농장 일을 하면서 동네 하나 밖에 없는 단란주점에서 회포를 푸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단순한 캐릭터들이다.

에이즈 감염사실이 알려져 구속되는 은하는 국선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국선변호사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백윤식 배우의 아들이자 정시아의 남편으로 유명한 백도빈이었다. 멘탈이 나간 은하가 화를 냈다가 용서를 빌었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국선변호사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은하의 말을 차분히 들어줬고 재판과정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은하의 입장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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