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의 한 장면

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의 한 장면 ⓒ KBS

 
5.18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인 지난 18일 KBS 1TV에서 특집 다큐멘터리,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이 방송되었다. 지난해 화제였던 <나는 계엄군이었다> 후속편 격인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은 5.18 당시 광주에 급파된 계엄군 5명의 증언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재구성했다.

방송으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을 연출한 KBS 광주총국의 김무성, 조나영 PD를 방송 다음 날인 지난 19일 KBS 광주총국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20년부터 계엄군들 만나러 다녀"
 
 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 이영광

 
- 지난 18일 방송된 5.18 특집 다큐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 제작하셨잖아요. 방송 끝났는데 어떠세요?
김무성 PD(아래 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업이어서 끝나니까 무사히 끝냈다는 시원함도 있어요. 하지만 시신이라든지 행불자들을 결국 못 찾았고 과제로 남아서 그게 아쉽기도 하고 또 걱정도 되죠. 걱정은 증언해 준 계엄군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예요."
조나영 PD(아래 조):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어요. 진실 규명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들, 들어야 될 것들 알아야 될 것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출연자들에 대한 걱정도 커요. 그분들은 좋은 마음으로 용기 내서 증언해 주신 건데 그 부분으로 인해 이분들이 피해 입지 않으실까란 생각이 들어서 걱정도 되죠."

- 3공수 여단 군인 5명의 증언을 토대로 다큐 제작하셨잖아요. 어떻게 제작하게 되셨어요?
김: "2020년 가을부터 준비한 건데요. 저희 KBS 광주총국 같은 경우 5.18을 계속 다루는 PD들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주로 계속 피해자 위주의 역사 발굴이었는데 40년이 지났잖아요. 그래서 가해자 얘기도 필요하지 않냐는 거예요. 이유는 역사적으로 사실을 규정하려면 한쪽의 입장만 가지고 얘기할 수 없죠. 근데 다른 지역에서 계엄군 얘기를 하는 건 조심스러울 것 같았어요. 피해 지역인 광주에서 먼저 계엄군의 얘기를 하는 게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접촉했었고 다행스럽게도 5.18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계엄군 전수조사를 들어갔어요, 저희가 계속 요청하고 설득해서 2020년부터 계엄군들 만나러 다녔어요."

- 광주에 투입된 3공수가 집단학살과 암매장에 당사자이자 목격자라고 나오던데 3공수는 어떤 일을 했길래 중요한 건가요?
김: "광주에 3공수, 7공수, 11공수가 왔는데 3공수는 가장 진압에 최적화된 부대예요. 3공수는 부마항쟁도 진압했던 부대예요. 3공수는 초기 가장 치열했던 광주역 시위에 있었고 그다음 5.18 항쟁의 시작이라는 전남대에 주둔했고 가장 은폐된 공간인 교도소에 있었거든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데죠. 그래서 그들의 움직임이 가려져 있었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어요."

- 42년이 지났는데 왜 이제 와서 얘기할까요? 그들도 5·18 이후 힘들었던 것 같은데 좀 더 빨리 얘기했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김: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여러 가지가 복합적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거든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은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고 지금은 아이들도 키웠고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기가 되면서부터 증언해야겠다는 용기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또 하나는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계엄군 전수조사를 시작했거든요. 그런 시기들이 좀 맞물렸지 않나 하죠."

- 최초 발포가 3공수라고 나오던데 그럼 3공수가 발포하기 전엔 발포가 없었나요?
김: "집단 발포는 20일 저녁에 광주역에서 있는 게 맞고 발포는 19일에 이미 이루어졌어요. 19일 계림동 광주고 앞쪽에서 4시 50분 5시쯤에 발포가 있었었고 그 일대에서 총상으로 한 4분 정도가 부상을 당한 피해자 증언들은 있어요."

- 그건 누가 한 건가요?
김: "그 지역에 있었던 게 11공수예요. 3공수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죠. 19일 자정쯤에 전대 앞에서 총이 스쳐가지고 열창 총상을 입었다고 신고를 한 게 있어요. 그런데 이 기록들은 19일 총살당했다는 피해자 증언만 있는 상황인 거죠. 아직 군 문서나 계엄군의 증언을 통해서 퍼즐이 딱 맞춰지지는 않았어요."

- 3공수 다섯 분이 증언하셨잖아요.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김: "2020년 가을 즈음부터 돌아다녔잖아요. 여러 분 만나서 계속 설득했죠. 계엄군은 두 부류인데 하나는 아직도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고 한편으론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주로 인터뷰 저희를 만나주는 분들은 이런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을 만났는데 가장 그분들이 공감하는 건 뭐냐면 '지금 공식적으로 행불자가 70몇 명이다. 신고된 것만 200케이스가 넘는다. 유골 찾아서 가족들한테 돌려라도 줘야 될 거 아니냐'라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그거를 어필했었고 저희가 방송에 출연을 유도할 때는 '최초로 집단 증언을 하자. 집단 증언을 해서 조각을 맞춰서 그걸 보고 좀 더 많은 계엄군이 증언에 나설 수 있게 하자'라고 했죠. 거기에 동의하신 분들이 저희 스튜디오에 나왔던 5명이고 개인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딴 분이 또 한 두 분 계시거든요. 그래서 한 7명 정도가 저희 인터뷰에 응해 주셨죠."

- 처음에 증언해 달라고 했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김: "저 어렸을 때 했던 만화영화 <똘이 장군> 보면 북한을 괴뢰군이라고 부르고 돼지 늑대로 병사를 비유했잖아요. 저한테는 계엄군이 <똘이 장군> 같았죠. 그래서 제가 속된 말로 쫀 거예요. 제가 너무 조심스럽게 말하니까 계엄군이 '왜 이렇게 네가 더 긴장했냐? 편안하게 말하라'고 해요. 그때는 제가 찍는 것도 아니니까 '저는 사실 광주에서 나고 자라서 여차여차 했다'라고 말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고 그런 게 뭐 있냐고 편하게 물어보라'라고 오히려 저를 다독였었어요. 그리고 최명룡씨 같은 경우는 제가 만났을 때 얼굴 가리고 음성 변조해서 인터뷰까지만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근데 그걸 조나영 PD가 설득한 거죠."

발포 명령 계속 추적해야 하는 이유
 
 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 이영광

 
- 조 PD님이 최세창 장관 인터뷰하려고 하셨잖아요. 어떠셨어요?
조: "무섭죠(웃음). 사실 방송에 나가지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어요. 많은 걸 부인하셨고 본인이 해왔던 (과거) 진술도 거부하시고 부인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두려움도 있으신 것 같아요. 1번으로 관심을 받았던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망 이후 본인에게 오는 그 집중에 대한 두려움도 좀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도 본인은 어쨌든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있어요."

- 조 PD님이 최세창 장관에게 전화해서 5.18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전 바로 전화 끊을 줄 알았는데 안 끊어서 의외였어요.
조: "방심하신 것 같아요. 설마 나한테 지금 당장 전화가 오겠어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 운이었던 것 같아요."

- 집에 갔지만 없어서 전화하신 거잖아요. 잠복할 생각은 안 하셨어요?
조: "저희가 현장에서 잠복하고 있었고 저희가 허탕을 친 것도 있었어요. 뭐였냐면 집 방문 시도하고 전화 통화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마치 그 행색(과 비슷한) 분이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하시면서 도망치듯이 길을 막 건너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건너서 그분을 쫓아갔죠. '최세창 장관님이세요?'라고 하니까 아니다라고 저희가 허탕을 쳤죠."

- 부상자들을 실은 트럭에 최루탄을 투하했다고 나오던데 왜 투하했을까요?
조: "그걸 옆에서 보셨던, 실명을 밝히기는 그렇지만 계엄군 중에 한 분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개인적인 재미로 처음에 그러더라는 거예요."
김: "저는 또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왜냐하면 그때 21일에 전남대학교 상황이 매우 위험했어요. 5만 명의 시민들이 전남대를 에워쌌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퇴각했고 전남대 운동장에서 사병들에까지 실탄 지급이 이루어졌었거든요. 그날은 그 상태로 상황이 급박한 상태에서 도보로 이동하니까 도보로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시민과의 교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시민군들을 좀 조용히 잠잠하게 시키기 위해서 최루탄을 깐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죠. 또 하나는 저는 또 특이한 게 7공수하고 11공수가 조선대에 있었을 때 7공수 11공수는 잡혀 있던 시민군들을 경찰에 인수인계하고 경찰은 다 훈방 조치 하거든요. 근데 유독 3공수만 잡혀 있는 시민군들을 데리고 이동해요. 저는 그 점이 또 좀 의아하더라고요."

- 제가 <나는 계엄군이었다>와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 보면서 든 생각이 뭐였냐면 계엄군에게 살인 면허를 내준 것 같았거든요.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하잖아요. 계엄군은 사람 죽여도 된다는 생각이 없었을까요?
김: "저는 두 가지라고 보는데요. 하나는 개인의 일탈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증언을 들어보면 이미 돌아가신 시민군의 시신을 단검으로 훼손하는 계엄군들도 있었어요. 개인의 과한 폭력성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 명령이 있었고 발포는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하잖아요. 발포 명령이라는 건 결국은 죽여도 된다는 것과 똑같으니까 우리가 발포 명령에 대해서 계속 추적하고 해야 되는 게 그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아무리 군대지만 '야 사람 죽여도 돼'라고 명령 내리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발포하라는 건 그 안에 죽여도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들도 있는 거 아닌가 하죠."

- 42년이 지났지만, 계엄군도 트라우마가 있나 봐요?
김: "모든 계엄군이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요. 저희를 만나주는 분들은 대부분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이었어요. 근데 작년에 <나는 계엄군이었다>에 출연했던 최병문 선생님께 공격하고 힐난했던 당시 계엄군 하사관이 또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전혀 거리낌이 없죠. 그러나 만나주고 증언 하는 사람들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 어떻게 지내왔다고 해요?
김: "지금도 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요. 저희 프로그램에 나왔던 해남의 김승식씨 같은 경우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자기는 5월에 꽃구경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래요. 5월 되면 꽃구경 자체를 못 가실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죠. 제가 서울에서 만난 분은 버스 기사 하셨는데 만난 그날이 버스 기사 계약이 종료가 된 날이었어요. 그분이 또 하는 말이 '나는 광주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나는 내가 힘들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못 해준다'라고 하셨죠."

- 옛 광주 교도소에 13구의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찾지 못했고 1983년 보안부대 요인들이 묻었다고 나오던데 1983년 즈음 왜 시신을 옮겼을까요?
김: "그건 저희가 뭐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는 문제이긴 한데 저희가 최명룡씨 인터뷰 다음에 서류를 붙였잖아요. 그걸 붙인 이유는 그 서류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이미 관계 당국들은 시신을 가매장 혹은 암매장했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라는 문서니까 이미 얘네들은 알고 있었죠. 근데 객관적인 사실로만 열거하면 묻었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묻었다는 사람들이 지정한 곳을 다 파봤더니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옮겼겠다는 걸 유추할 수가 있는 거고 왜 옮겼는지는 제가 지시를 내린 신군부가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사망 수를 축소해야 되는 게 그들에게 당면 과제였을 수 있죠. 현재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165명이지만 신고된 행불자는 300명이 넘어요. 공식적으로 인정된 행불자만 78명이거든요. 그니까 신군부는 될 수 있으면 사망자를 줄여야 되는 당면 과제가 있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요."

- 엔딩 장면의 퍼포먼스는 어떤 의미일까요?
조: "그동안 고백하지 못한 계엄군들이 가면 속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면 이미지 통해서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계엄군의 이미지를 상징화했고 또 전체적으로 퍼포먼스 길이가 한 50초 정도 되거든요. 전반부 25초는 계엄군이 그렇게 했다라는 객관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거고 후반부인 25초 정도는 고백하는 계엄군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퍼포먼스로 진행했었습니다."

- 제작하며 느낀 점 있을까요?
조: "저는 다음 세대에게 이걸 어떻게 전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의 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죠."
김: "저는 5.18 취재를 입사 때부터 했으니까 오래 했는데요. 2004년도에 제가 입사했거든요. 매번 할 때마다 듣는 게 뭐였냐면 언제까지 5.18이냐는 거예요. 내부에서도 더 이상 다룰 게 있냐는 거예요. 그런데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를 아직 정확히 우리는 기록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독일 같은 경우도 홀로코스트를 아직도 추적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됐다고 벌써 5.18을 많이 한 양 말하죠. 근데 우리는 사실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정확히 기록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게 모든 게 정확히 기록될 때까지는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취재했지만 방송엔 나오지 않은 게 있을까요?
조: "아쉬운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원래 또 다른 한 명의 계엄군 취재를 했었고 그분은 사실 현장에서 대검으로 우리 시민을 찔렀던 분이 있어요. 그분의 이야기는 저희가 내부적인 조율로 제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얘기를 다음번에 한 번 또 길게 가져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정도로만 말씀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전북의소리'에도 중복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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