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부부의 날' 이 왜 있어야 하는지 괘념치 않는 남편을 둔 터이기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부의 중심이 적어도 내게는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인연의 실, 그 끝을 잡고 있다가 만나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으로 산 지도 이제 내년이면 30년이 된다. 가끔 농으로 " 아따! 우리 참 징글징글하게 살았네!"라는 말로 서로에게 지난했던 세월의 흔적을 상기하고는 한다. 그 사이 꽤 괜찮은 미소를 지녔던 남편의 얼굴엔 팔자주름이 깊게 파여 영락없는 중년의 모습이 되었고, 영원히 푸릇푸릇할 것만 같았던 내 마음에도 세월의 풍파가 가끔 지나가더니 골이 생기고 그림자가 드리우는 시간도 생겨났다.

결혼식 날 내 친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넌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줄 알았는데..."라고 말했었다. '아니 친구 결혼식에 와서 이게 할 말인가' 싶었지만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네 싶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워낙에 독립적인 데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씩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새로운 가정을 이룰 때도 공부를 하러 외국으로 가겠다는 다소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통보를 했을 때, 열에 아홉은 '정말?'이라는 반문을 해왔던 걸로 기억한다.
 
 1984년 발매된 정태춘·박은옥 앨범. 이 앨범에는 <사랑하는 이에게>외 12개 노래가 담겨 있다.

1984년 발매된 정태춘·박은옥 앨범. 이 앨범에는 <사랑하는 이에게>외 12개 노래가 담겨 있다. ⓒ (사)한국음반산업협회

 
결혼식에 대한 나의 로망

결혼식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지만, 내게는 품어왔던 아주 작은 소망이 하나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이제 막 내 남편이 된 사람과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곡목도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 놓았기에 남편은 그냥 따라와 주기만 하는 되는, 어찌 보면 너무나 이루기 쉬운 소망이었다. 그 소망의 한가운데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사랑하는 이에게'가 있었다.

한 소절씩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주고받는 가사는 굉장히 직설적이지만 한없이 따스하다. 특히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에서는 아무리 무뚝뚝한 성정과 얼음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도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연유로 이 노래를 처음 접한 날, 난 그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남자 친구가 생기거나 혹 썸이라도 타게 되는 대상이 나타나면 햇살이 그득한 벤치에 앉아서, 또는 어둑한 광장의 노을빛을 다정히 바라보며, 가끔은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들을 때는 굉장히 쉽고 아름다운데 막상 따라 부르려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이 노래를, 나의 음역대와 어울리게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흔치 않았다. 아니, 없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달빛 밝은 밤이면
그리움도 깊어
어이 홀로 새울까
견디기 힘든 이 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 정태춘 박은옥-사랑하는 이에게 가사


서정성의 물기가 곱게 배어 나오는 한 편의 시 같은 가사를 사랑하는 사람과 눈빛을 마주하고 '둘만의 언어'로 부르고픈 내 기대가 어쩌면 너무 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에게'를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는 짝꿍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내 옆 지기는 지독한 음치에다 박치여서 이 노래로 단 한 번의 합도 맞춰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 이미지.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 이미지. ⓒ (주)NEW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 이미지.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 이미지. ⓒ (주)NEW

 
마침 정태춘의 데뷔 40주년(사실은 2019년이다)을 기념해 만들어진 다큐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의 얼굴에는, 그를 감싸 안은 아우라에는, 그가 불러온 노래들이 인처럼 때론 문신처럼 박히거나 새겨져 있음을 본다.  

그가 서정적이고 고요한 노래로부터 시작해 광장에 모인 이들의 울분을 관통하며 대변하는 노래들을 부를 때까지, 노래로 연명해 온 40년 이상의 세월 곁에는 아내 박은옥이 있었다. 힘듦과 어려움의 폭풍 속에서도 지지하고 견디며, 같은 곳을 향하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평생 같이 살며 뜻을 함께 하는 동지.' 그것이 부부의 진정한 의미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부부'였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덕분에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하루 종일 사위를 맴돌았다. 비록 듀엣으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를 수는 없어도 마주 보는 날보다는 같은 방향을 보며 어깨동무를 하는 날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비록 희미해지긴 했어도 서로에게 '사랑하는 이'였던 소중한 순간을 애써 떠올려 보는 것도 잊지 않아야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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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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