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7 05:53최종 업데이트 22.05.17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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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미치지 못하는 능력이 던지기다. 그래서 예컨대 군대에 간 남자들이 신병훈련을 받을 때 생각처럼 되지 않는 대표적인 과목이 수류탄 던지기다. 저마다 앞사람이 던지는 모양을 비웃으며 자신 있게 나서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리의 절반도 채 날아가지 않는다.

의욕이 지나쳐 자기가 쓴 방탄헬멧에 팔이 엉키며 수류탄을 등 뒤에 떨어트려 주변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사례도 간혹 나올 정도다. 그래서 던지기의 달인인 야구선수, 그것도 투수들을 만나면 간혹 묻게 된다. 수류탄을 얼마나 멀리 던졌는지. 그런데 1977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대표 투수로 활약하며 두 차례의 세계대회 우승에 기여했던 임호균 교수(을지대학 평생교육원)의 답은 이랬다.
 
"나는 수류탄 안 던졌어. 군사훈련 받을 때 수류탄 던지라기에 '나 국가대표 투수인데, 이거 던지다가 어깨 다치면 책임 질 거냐'고 그랬더니 그냥 넘어가더라고. 그 때는 국가대표의 몸에 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지. 사회 전체적으로 그렇게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어. 국가를 대표할 몸이니까."
    

임호균 임호균은 1970년대 몰락한 인천 야구가 배출한 유일한 스타플레이어였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가장 안정된 제구력으로 위기의 순간마다 투입돼 결정적인 활약을 한 인물이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과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모두 출전해 우승을 이끌었다. ⓒ 임호균

 
첫 세계 제패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의 대회에 처음 도전장을 내민 것은 1975년 캐나다 멍크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였다. 모두 8개 나라가 출전한 그 대회에서 한국은 조별 예선에서 3승 4패를 기록하며 3위, 전체로 보면 6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은 처음으로 콜럼비아, 니카라과, 이탈리아 같은 서양권 팀들을 상대해 승리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2년 뒤인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76년 북중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갈라져있던 두 개의 국제야구기구가 통합하면서 대회는 규모가 더욱 커졌고, 대회 명칭도 조금 바뀌었다. 예선인 1라운드는 종전처럼 '대륙간컵'이었지만 결선인 2라운드는 '슈퍼월드컵'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은 9개국이 풀리그로 치른 대륙간컵을 미국, 일본, 대만에게만 1패씩을 당하며 5승 3패로 통과했고, 상위 5개국이 다시 한번씩 맞붙는 슈퍼월드컵에 진출했다.

애초에 그 대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성적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고, TV나 라디오를 통한 중계방송도 이루어지지 않아 선수단과의 국제전화를 통해 간신히 경기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라운드 4차전 푸에르토리코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 초에 터진 김재박의 결승타로 역전승해 최소 3위를 확보하면서 국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일본과의 5차전에서도 9회 초 김정수의 결승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입소문은 더욱 번져나갔다. 그것은 야구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얻은 첫 번째 승리였기 때문이다.

일본전 최고의 수훈선수는 오른손 타자의 무릎을 스칠 듯이 파고드는 슬라이더와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걸치듯 흘러나가는 역회전 공을 배합한 왼손 투수 이선희였고, 그는 훗날 구대성과 김광현으로 이어지는 '왼손잡이 일본 킬러' 계보의 시조가 되었다. 
  

이선희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최고의 스타는 이선희였다. 왼손투수인 그의 몸쪽 슬라이더는 특히 일본 타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그는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극적인 만루 홈런을 맞으며 '비운의 투수'로 더 강하게 각인되기도 했다. ⓒ 삼성 라이온즈


일본전 승리 소식을 전하는 국내 한 신문의 기사 제목은 '한국, 세계 야구 준우승'이었다. 어쩌면 그 대회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이던 미국이 2차 리그 전승을 거둘 것이 확실하다는 전망, 혹시 그 미국이 1패를 당해 결승전을 치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설마 한국이 이길 수 있겠느냐는 예상, 그리고 일본을 이기고 준우승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포만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이 개최국 니카라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0대 4로 불의의 일격을 당해 한국과 4승 1패 동률을 기록하면서 최종 우승팀을 가리기 위한 결승전이 열리게 됐다. 에이스 이선희를 전날 일본전에 완투시키며 소모해버린 한국은 대신 대학 1학년생 김시진, 최동원에 이어 선수단 최고참 유남호가 9안타를 나누어 맞으며 버텼고, 그 사이 김봉연의 홈런과 이해창, 김재박의 적시타로 맞불을 놓았다.

결국 5대 4로 한 점 앞선 9회 말 마지막 수비에서 1사 후 2루타와 실책이 엮이며 동점주자의 3루 진입을 허용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유격수 김재박이 땅볼 두 개를 침착하게 처리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쿠바와의 결승전 9회 말 1사에서 연출된 박진만과 고영민의 병살 수비의 원형이었다.

 

우승컵 앞세운 귀국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팀이 우승컵을 앞세우고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기수 김시진 뒤로 김응용 감독이 손을 흔들고 있다. ⓒ 국가기록원

 
그때 그 국가대표들의 다른 점 

미처 예상하지도 못한 이른 시점에 전해진 우승 소식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세계대회 일본전 첫 승 소식 정도만 해도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인 마당에 야구 종주국 미국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와 세계대회 우승, 거기에 이선희가 대회 MVP로, 김재박이 가장 우수한 유격수(대회 베스트9)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나라이며, 이선희와 김재박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물론 몇 가지 감안해야 할 점은 있었다. 출전이 곧 우승일 정도로 압도적인 최강팀 쿠바가 불참한 대회였으며, 축구를 비롯한 다른 종목들에 비해 야구는 세계화가 극히 미진한 북중미와 동북아에 편중된 종목이라는 점. 그리고 그중에서도 전통적으로 대륙간컵 대회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비해서도 약간 낮은 위상으로 평가받는 대회였다는 점이다.

또한 야구라는 종목 전체로 놓고 본다면, 전 세계의 우수한 성인 선수들 대부분이 밀집되어 있는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를 제외한 영역에서의 성과였으며, 그래서 주요 국가들이 대학생 위주로 출전하던 대회에 아직 프로야구를 가지고 있지 못한 한국은 성인 야구의 최정예를 선발해 출전시키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세계 제패'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었고, 불과 2년 전 세계무대에 데뷔한 신예의 충격적인 급부상이라는 점에는 세계 야구계에서도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선희는 그 해 전종목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했고, 그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 중 김재박, 이선희, 최동원에게는 체육훈장 3등급 거상장이, 그 외의 선수와 지도자들 전원에게는 4등급 백마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훈장은 각자 신분에 따라 장학금과 특진 등의 혜택으로 이어졌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울 몇 안 되는 분야가 스포츠였던 시절. 그 안에서 '국가'를 '대표'했던 이들이 귀하게 다루어지던 시대. 야구는 내적인 노력의 축적과 외적인 행운이 겹치며 누구도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시점에 '세계 제패'에 성공했고, 그것은 한국 야구가 또다른 차원으로 급성장하는 자양분으로 피드백됐다. 

위로는 1951년생 유남호로부터 아래로는 1958년생 김시진, 최동원에 이르기까지, 첫 번째 '세계 제패'에 성공한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국가대표팀 구성원들이 가진 세대적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1960년대 초 대부분의 은행들이 실업 야구팀을 창단하면서 은행 취업에 주력하는 상업고등학교들을 비롯한 고등학교에 그리고 그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초·중등학교에 연쇄적으로 야구부가 신설되던 시기에 야구에 입문한 세대였다.

그래서 그 이전 세대에 비해 조금 더 일찍 야구를 시작했고, 좀 더 전업적으로 야구에 매달릴 수 있었다. 음과 양이 있지만, 체육특기생 특례입학 제도가 정착되면서 수업보다 야구에 집중한 첫 세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선수들이라면 실업팀에서 야구를 통해 생활비를 충당하며 지속적으로 야구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부터였다.

그렇게 한 세대 전의 변화가 다음 세대의 성장을 낳았고, 그 세대의 성과는 대중의 열광과 만나 프로야구 시대를 열며 오늘날 야구를 '국민 스포츠'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야구와 관련된 오늘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앞 세대의 변화를 훑어보는 이유, 오늘날 야구장 안팎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우승 기념사진 김포공항에 도착한 국가대표팀이 우승컵을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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