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 자주 나오는 상황이 KBS <붉은 단심>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실권자인 좌의정이 조정을 꽉 틀어쥐고 임금을 숨도 못 쉬게 만드는 상황이 그것이다. 
 
연산군이 실각한 1506년 중종반정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붉은 단심>에서는 좌의정 박계원(장혁 분)이 그런 실권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조정 사람들이 다들 박계원 라인으로 채워져 있어 임금은 그야말로 허수아비다.

박계원 라인에 생채기 낸 이준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KBS2

 
최근 방영분에서는 젊은 군주 이태(이준 분)가 군부 실권자인 병조판서 조원표(허성태 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박계원 라인에 생채기를 냈다. 이태는 조원표의 딸인 조연희(최리 분)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하면서 조원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태가 흔든 것은 여심이 아니라 남심이었다.
 
그렇지만 조정은 여전히 박계원의 수중에 있다. 반정(反正) 주역인 그는 상당한 세월 동안 절대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임금인 이태가 실권을 차지하려면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병조판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관료가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고 목소리가 크고 대인관계가 좋다 해도 신하 신분으로 조정을 장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부서를 휘어잡을 수는 있어도 범정부 차원에서 그런 위상을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관료들은 임금으로부터 녹봉을 받는 샐러리맨이었다. 임금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임금과 떼어놓고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중 몇몇을 뇌물로 매수할 수는 있어도 박계원처럼 관료집단을 통째로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폭군 방벌 방식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실력자들은 그 후 상당한 기간 실권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기 집권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시대든 쿠데타는 안정적인 집권 방식이 아니다. 제반 사회세력의 동의를 받아내려면, 당대가 인정하는 보편적 방식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쿠데타가 불안정한 집권 방식이라는 점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박정희는 5.16을 일으킨 뒤에도 반혁명이라는 명분 하에 끊임없이 숙청과 정변을 일으키다가 2년 7개월 뒤인 1963년 12월 17일에야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에 성공하고도 1980년에 5·17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까지 추가적으로 자행한 뒤에야 대통령이 됐다.
 
쿠데타 세력의 지위가 옛날에는 더욱 불안정했다. 왕조시대의 국교는 왕실 숭배와도 연관돼 있었기 때문에, 국교가 대중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쿠데타 세력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 왕실이 국내 최대 지주였기 때문에 왕실 토지를 소작하는 농민들의 동향도 쿠데타 세력에 불리했다. 쿠데타 뒤에 절대권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권력을 합리화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붉은 단심>의 인물소개 코너는 박계원을 "조정을 장악한 절대 권력자로 명분과 원리를 내세워 조선을 운영하고 있지만 실상은 살생과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면서 살생과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의 권력유지 비결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역사적 현실과 어긋나는 설명이다. 아무리 사악하고 폭력적인 권력자일지라도 안정적인 제도적 장치 없이는 권세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었다. 드라마 속 박계원처럼 임금보다 낮은 좌의정 신분을 오래 유지하면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시간은 군주의 편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KBS2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료들은 녹봉 주는 사람한테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정으로 옹립된 군주는 처음에는 허수아비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강해지기 쉬웠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편이었다. 정통성이 군주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중종 임금이다.
 
광해군의 실정을 암시하는 시험문제를 출제했다가 함경도에 유배되고, 1623년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복귀했지만 1627년 정묘호란 발발 뒤에 왕명을 어기고 여진족 후금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가 강원도로 유배된 관료가 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함경도 유배 생활 때 지은 <부계기문(涪溪記聞)> 혹은 <부계문기>에 중종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부계기문>에 따르면, 1506년 중종반정 직후의 중종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였다. 반정 주역들인 박원종·성희안·유순정 앞에서 쩔쩔매곤 했다. <부계기문>은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연후에 자리에 앉았다"고 말한다. 어전회의가 끝나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퇴장하려 하면 얼른 일어났다가 다 나간 뒤에 앉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중종의 편이었다. 그런 구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계기문>에 따르면 "희안이 늙어 병들어" 있을 때에 그 점이 입증됐다. 성희안이 세상을 떠난 해가 1513년이므로 그 이전에 발생한 일이었다(반정으로부터 7년이 경과하지 않은 시점).
 
이때 중종과 반정 주역들의 역학관계 변화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50세쯤 된 성희안이 중종을 알현하고 퇴장할 때였다.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뎠다. 건강 문제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 모습을 보고, 뜻밖에도 그곳 근무자가 호통을 쳤다. "대감은 상감께서 일어서 계신 것을 모르십니까?"라며 "어찌 그리 더디게 걸으시오?"라는 핀잔이었다. 당신이 빨리 퇴장해야 주상 전하께서 얼른 앉으실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이 장면은 그 시점에 중종과 신하들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겼음을 반영한다. 반정 주역들이 예전처럼 막강했다면 그런 지적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질책은 받은 성희안이 순간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가 늙어서 망령이 났나 보다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부계기문>은 전한다.
 
쿠데타 자체는 보편적으로 승인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추가 조치가 없으면 쿠데타 주역들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특별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중종이 어전회의 때 더는 일어나지 않아도 된 것은 시간이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 성공 뒤에 절대권력을 갖고자 하는 인물은 자기 권력을 안정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 방법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은 나라의 주인인 왕실과 연고를 맺는 일이었다.
 
왕조국가의 쿠데타 주역들은 나라의 주인인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두려 했다. 왕조시대에는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박원종의 양녀인 박경빈(경빈 박씨)이 중종의 후궁이 된 것도 그런 실정을 반영한다. 박경빈이 1533년에 세자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것은 박원종이 저세상 사람이 된 이후의 일이었다.
 
반정 주역들이 반드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왕조국가에서 반정 주역이 절대권력을 갖는 데에 그보다 빠른 방법은 없었다. <붉은 단심> 속의 박계원은 이런 실정을 무시하면서도 오랫동안 절대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반정 이후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자기 조카를 후궁이나 왕후로 만들려 했다.
 
박계원은 점잖음 뒤에 숨겨진 잔혹함만으로 절대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더군다나 군부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조원태를 매개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다. 최근 방영분에서 조원태가 반기를 든 데서도 나타나듯이 군부에 대한 박계원의 영향력은 상당히 유동적이다.
 
왕족이 아닌 사람이 오로지 개인적 카리스마만으로 절대권력을 이어가는 것은 현실보다는 비현실에 가깝다. 이는 쿠데타 주역일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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