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이었기 때문에 레슬링에 대한 진심이 나올수 있었다."(심권호)
"레슬링을 시작하면서 꾸게된 꿈이 바로 심권호같은 선수가 되자는 것이었다."(정지현)

 
'전설 vs 전설'의 대결은 역시 클래스가 달랐다. 5월 14일 방송된 MBN <국대는 국대다> 대한민국 레슬링계의 두 레전드 심권호와 정지현의 맞대결을 통하여 역대급 명경기를 선보였다.
 
심권호는 10년간 세계 랭킹 1위, 애틀랜타-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2연패와 세계 유일의 두 체급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대한민국 레슬링계의 전설이다. 그리고 심권호에 이어 레슬링 간판의 계보를 이은 것이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정지현이었다.
 
<국대는 국대다>가 그동안 은퇴 레전드 vs 현역 선수간의 대결이었다면 두 선수 모두 은퇴한 레전드끼리의 맞대결은 심권호와 정지현이 최초다. 두 선수의 나이차는 무려 11살, 현역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두 선수 모두 50일 동안 진지하게 강도 높은 특훈을 시행했다.
 
결전의 날, 심권호는 레슬링 은사인 박동우 코치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다. 심권호는 한결 다부진 모습과 활기넘치는 표정으로 눈길을 끌었다. "시합장에 들어오면 재밌다. 전투력이 상승한다"고 할 정도로 긴장감보다는 설렘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정지현은 심권호와의 대결에 대하여 "제 마음속에는 항상 영웅이셨다. 하지만 오늘은 그 영웅을 뛰어넘어보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대결을 앞두고 서로 다른 체급을 맞추기 위하여 심권호는 체중을 54kg까지 3kg 증량한 반면, 정지현은 63.5kg로 7.5kg나 감량해야했다. 계체량 측정 결과, 두 선수는 모두 목표했던 체중을 맞추는데 성공하며 그간의 노력과 책임감을 짐작케했다.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는 선수의 이름으로 레슬링 유망주에게 장학금이 전달된다.
 
두 레전드의 지인들이 응원을 위한 영상메시지를 전달했다. 야구 양준혁, 유도 김재엽, 핸드볼 임오경, 방대두 시드니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 감독 등 스포츠 선배들이 심권호를 위한 응원을 보냈다. 배드민턴 레전드 방수현은 미국에서 영상메시지를 통하여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지막에 등장한 심권호의 모친 이화순씨는 "시합 들어가면 시간 주지말고 바로 목을 확 감아서 돌려버려라"며 레슬링 레전드의 어머니다운 살벌한 조언으로 현장을 삽시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정지현은 고등학교 후배들. 이세열-김현우 등 현역 국가대표들, 방송인 조세호, 가족들의 응원을 받았다. 정지현의 아내와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권호는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지현의 아들 정우현 군은 아빠의 승리를 자신했지만 삼촌인 심권호에게도 파이팅히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두 선수의 대결 방식은 2분씩 총 3라운드로 획득 점수를 합산하여 승패를 가린다. 모든 룰은 두 선수가 합의한대로 2000 시드니올림픽 룰에 따른다. 일명 빠떼루 아저씨로 유명했던 김영준 씨가 해설로 함께했다. 김영준은 심권호의 전성기와 은퇴 경기까지 모두 중계했던 레슬링 해설위원의 레전드였다.
 
정지현은 "제 인생 마지막 경기, 마지막 무대를 후회없이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심권호는 "내가 스스로 레슬링을 이렇게 간절하게 하고싶었던 적은 처음이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두 선수는 1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초반부터 강하게 맞붙었다. 체격에서 앞선 정지현은 업어넘기기를 시도한 것이 실패했으나 곧바로 오른팔을 잡고 쓰러뜨려며 심권호의 등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정지현은 등위에서 2초 이상 누르기에 성공하며 2점을 먼저 획득했다. 그나마 심권호가 빠르게 정지현의 그립을 방어하며 추가 실점은 피했다.
 
다시 재개된 경기에서 팽팽한 힘겨루기 도중 정지현은 심권호가 손가락을 잡는다고 어필했다. 심권호도 곧바로 정지현의 토크에 대하여 심판에게 항의했다. 정지현은 심판으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레슬링에게 손가락 잡기는 자주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너무 오래잡으면 주의를 받을수 있다. 정지현은 잠시 후 그레코로만형에서 금지된 다리 공격을 시도하다가 경고를 받기도 했다. 두 선수 모두 실제 올림픽 결승 못지않은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며 진지하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라운드는 2-0 정지현의 리드로 끝났다.
 
기술을 거의 시도하지못하고 방어만 해야했던 심권호는 "정지현을 파고들어가기 힘들다. 그라운드 한번만 오면 잡아서 돌릴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생각이 많아진 모습을 보였다. 정지현도 "몸에 벌써 쥐가 오려고한다. 회복이 안된다"며 마음대로 따라주지않는 몸상태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2라운드 시작후 1분여만에 정지현이 심권호의 앞목을 잡고 쓰러뜨리며 엉치걸이에 성공했다. 계속되는 정지현의 공격에서 옆굴리기와 들어던지기까지 성공하며 내리 10점을 얻어냈다. 점수는 어느새 12-0으로 벌어졌다. 심권호는 들어던지기 상황에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통증을 호소하며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정지현이 대량득점 이후 다소 수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패시브(파테르)가 선언되며 심권호에게 처음으로 공격 기회가 돌아왔다. 심권호는 주특기인 앞목 감아돌리기를 연이어 성공시키며 4점을 만회하여 라운드를 마쳤다. 하지만 경기중 손가락 부상을 당하는 악재가 발생했다. 체력적 부담에도 심권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몰아서 써야지"라며 불굴의 의지를 드러냈다.
 
두 레전드의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됐다. 공격적으로 나선 심권호는 업어넘기기도 4점을 획득했다. 8-12까지 추격한 심권호는 큰 기술 하나면 동점까지도 가능한 상황. 하지만 정지현도 곧바로 메어넘기기로 반격하며 다시 점수차를 8점차로 벌였다. 심권호는 정지현의 공격을 자세를 낮추고 끈질기게 방어해내며 장외 밀어내기로 1점을 만회했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두 레전드는 끝까지 물러서지않고 팽팽한 대결을 펼쳤으나 더 이상의 추가득점은 나오지 않았고, 경기는 16-9 정지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두 선수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탈진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선후배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명승부를 펼친 서로를 훈훈하게 격려했다. 탈진할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심권호는 바닥에 쓰러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아낌없이 최선을 다한 두 레전드를 위하여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정지현은 선배와의 경기를 승리하고도 미안함에 마음껏 웃지 못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정지현에게 심권호는 먼저 "괜찮아"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심권호는 "정지현은 저를 이어 좋은 레슬러가 됐다. 지현이와 함께해서 속시원하게 레슬링을 한 것 같다. 지현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게임이 안나왔을 거다. 정지현이기 때문에 레슬링에 대한 진심이 다 나온 것 같다"며 최선을 다해준 후배를 극찬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심권호는 "고등학교때부터 지현이를 봤다. 정지현의 코치가 '너같은 놈이 또 나타났다'고 하더라"는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지현은 "레슬링을 시작하며 세운 꿈이 심권호 선배같은 선수가 되자는 것이었다"며 심권호가 자신의 우상이었음을 고백했다.
 
심권호가 은퇴하고 4년후 정지현은 실제로 우상의 뒤를 이어 금메달을 획득하며 후계자로 등극했다. 심권호는 이날의 승자인 정지현을 위하여 두 번째 금메달을 직접 목에 걸어주며 "너도 후배한테 한 번 당해봐라"는 반전 농담으로 눈물이 쏙 들어가게 만드는 웃음을 자아냈다.
 
심권호는 "22년간 정말 레슬링 한 게임이 하고 싶었다. 레슬링을 사랑하니까"라며 "다른 건 다 웃으며 져줄 수 있는데 레슬링만큼은 지기 싫다"고 할만큼 아직도 식지않은 레슬러의 피를 드러냈다. 은퇴하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50대의 나이가 되었어도 레슬링 앞에서는 언제나 진지하고 간절했던 심권호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너무 고생많고 멋진 경기였다"는 제작진의 찬사에 심권호는 오히려 "고맙다"고 화답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이런 경기를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었다. 레슬링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가 어떻게 되든 레슬링으로 즐겁게 해준다고 말했지 않나. 레슬링을 하면서 오늘 경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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