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에선 처음 또는 다시 볼 만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작품부터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다양하게 다루려고 합니다.[기자말]
<피그> 영화 포스터

▲ <피그> 영화 포스터 ⓒ 판씨네마(주)

 
이름을 버린 채로 아끼는 돼지와 함께 트러플을 채집하거나 자신이 만든 요리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트러플 헌터 롭(니콜라스 케이지 분). 전기, 수도, 난방 시설을 갖추지 않은 숲 속 외딴 오두막에서 휴대폰도 없이 은둔자처럼 생활하는 그를 찾아오는 유일한 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트러플을 구매하고자 들르는 푸드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 분)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괴한들이 롭의 소중한 돼지를 빼앗아 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롭은 유일한 친구인 돼지를 되찾기 위해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15년 전 아내를 잃은 뒤로 등졌던 도시 포틀랜드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롭은 스스로 버렸던 이름 '로빈 펠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다시 마주한다.

<피그>의 줄거리만 접한다면 대부분 <존 윅>(2014)을 떠올릴 것이다. 표면적으로 두 영화는 모종의 이유로 은퇴한 '전설'이 슬픔을 씻어주던 '동물'을 빼앗기자 자신이 떠났던 '세계'로 돌아온다는 설정에서 많은 유사점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그>를 주먹과 무기를 휘두르며 자기 개를 훔친 자들을 처단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존 윅>이라 기대한다면 실망하기에 십상이다. 도리어 <피그>는 과거로의 여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받아들이는 조용한 <해안가로의 여행>(2015)에 가깝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트러플 돼지에 대한 호기심과 개인적인 경험담을 바탕으로 <피그>를 만들었다고 밝힌다. 자신들의 귀중한 돼지와 개들을 훔치려는 경쟁자들을 막기 위해 밤이면 총을 들고 지킨다는 트러플 헌터(이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영화 <트러플 헌터스>를 보길 추천한다)에 관심을 갖던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숲속에서 노인이 트러플 돼지와 함께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피그>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느꼈던 슬픔이 삶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생각하며 녹인 결과가 <피그>의 인물들이다.
 
<피그> 영화의 한 장면

▲ <피그> 영화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피그>는 도난당한 돼지를 찾는 미스터리 구조를 취한다. 처음엔 "누가 돼지를 훔쳤는가?"로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포틀랜드로 도착한 다음부터는 동행한 아미르를 관객의 대리인으로 삼아 이름을 바꾼 이유, 도시를 떠나 숲에 은둔한 사연, 돼지에 집착하는 까닭 등 롭이 감추었던 과거를 퍼즐처럼 하나씩 맞춘다.

예측 불가능으로 가득한 <피그>의 이야기엔 여타 영화들과 다른 흥미로운 구석이 엿보인다. 하나, '소울 푸드'의 활용이다. <피그>는 '시골식 버섯 타르트', '엄마표 프렌치토스트 &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새 한 마리, 술 한 병 & 소금바게트' 3개의 챕터로 나뉜다. 그런데 3개 챕터가 설정, 전개, 해결이란 3막 구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피그>에 챕터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요리와 식재료들은 상실감을 공유한 롭과 아미르가 겪는 여정의 이정표가 되거나 주인공들이 감추고 있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거나 진심을 털어놓는 촉매제 역할로 기능할 따름이다.

둘, 돼지의 활용이다. 롭의 돼지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다른 의미가 있다. 롭에게 돼지는 아내와 같은 존재다. 갑작스러운 돼지 도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내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미르에게 롭의 돼지는 성공 수단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돼지가 찾은 최상급 트러플만 있다면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푸드 바이어가 될 거라 믿는다. 포틀랜드 최고의 푸드 바이어 다리우스(아담 아킨 분)에게 롭의 돼지는 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방해물에 불과하다.

이처럼 롭의 돼지는 개인(롭)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타인(아미르, 다리우스)의 욕망까지 담았다. 또한, 인간성을 상실한 물질주의적 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장치이기도 하다. 숲과 도시의 대조적인 풍경, 꿈을 잃어버린 쉐프와 지하의 파이트 클럽은 이를 한층 강화한다.
 
<피그> 영화의 한 장면

▲ <피그> 영화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주연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 어느덧 연기 경력 40년이 넘은 베테랑 배우다. 1980~2000년대에 그는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노만 주이슨, 앨런 파커, 데이빗 린치, 올리버 스톤, 오우삼, 베르너 헤어조크, 리들리 스콧, 코엔 형제, 브라이언 드 팔마, 스파이크 존즈 등 거장 감독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더 록>(1996), <페이스 오프>(1997), <내셔널 트레져>(2004), <고스트 라이더>(2007) 등 블록버스터의 주연으로 맹활약한 바 있다.

2010년대 들어서며 상황은 바뀌었다.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자 대형 스튜디오는 외면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더해져 최대한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2018년엔 무려 7편의 영화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는 "어떤 작품에서라도 꾸준히 연기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시나리오에 어울릴 거로 생각해주는 젊은 영화인들이 다시 발견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작은 규모의 장르 영화를 중심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근래 니콜라스 케이지는 <맨디>(2018),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2019) 같은 주목할 만한 영화를 내놓으며 슬럼프를 벗어나는 중이다. 특히 <피그>에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상케 하는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며 그가 얼마나 재능 있는 배우였는지를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영국 엠파이어 매거지의 "21세기 전성기"란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 <피그> 같은 영화는 쉽사리 접하기 어렵다. 극장가엔 슈퍼히어로 장르, 속편, 인기 있는 지적재산권(IP)을 활용한 영화들이 판을 치는 상황이다. 니콜라스 케이지에 기대했던 이미지를 영리하게 비틀면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상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피그>는 귀중한 보석과 다름이 없다. 작년의 아트하우스 영화의 발견이 <킬링 오브 투 러버스>(2021)라면 올해는 <피그>가 발군이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스핀 오프 영화의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어떤 색깔을 입힐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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