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박찬욱, 홍상수, 고 김기덕, 봉준호 등 한국의 감독들이 세계적으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면 최근에는 한국 배우들의 연기가 세계 관객들에게 진한 울림을 주고 있다. 작년에는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가 미국과 영국의 아카데미 시상식, 미국배우 조합상의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지난 1월에는 <오징어게임>의 오영수 배우가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영화 역사상 한 명의 배우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지난 2007년 <밀양>의 전도연이 세계 3대 영화제, 그 중에서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일이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이며 아시아 배우로는 2004년 <클린>의 장만옥 이후 역대 두 번째였다. 특히 아시아 배우가 영어나 불어가 아닌 자국어로 연기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전도연이 역대 최초였다.

하지만 한국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전도연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도연이 아직 연예계에 데뷔하기 전이었던 1987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고 강수연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 많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타이틀을 차지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배우로 군림하던 강수연 배우는 지난 7일 향년 55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없었다.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없었다. ⓒ (주)단성시네마

 

아시아 최초로 베니스 정복했던 여성 배우

한국나이로 4살에 불과하던 1969년 동양방송의 전속아역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 배우는 1983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손창민과 함께 80년대 초반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던 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강수연 배우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를 통해 성인배우로 변신했고 1986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임권택 감독이 만든 <씨받이>에 출연했다.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 <씨받이>에서 옥녀 역으로 열연을 펼친 강수연 배우는 이듬 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일약 '월드스타'로 인정 받았다. 이는 동아시아 배우로는 최초의 수상기록으로 1992년 <귀주이야기>의 공리가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강수연 배우는 1987년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를 통해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했고 같은 해 고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20대 초반의 강수연 배우가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연기했던 전작들과 달리 발랄한 여대생을 연기했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서울에서만 26만 관객을 동원하며 1987년 한국영화 최고흥행작에 등극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강수연 배우는 1989년 임권택 감독과 재회한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투혼을 발휘하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두 번의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 배우는 <그후로도 오랫동안>,<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베를린 리포트>,<경마장 가는 길>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최고의 배우로 군림했다. 강수연 배우는 90년대 중반 이후 <지독한 사랑>,<블랙잭>,<깊은 슬픔>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를 맞는 듯 했지만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로 SBS 연기대상 대상을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2000년대 들어 상업영화 활동이 뜸해진 강수연 배우는 2010년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장편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출연했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강수연 배우는 지난 1월에 촬영을 끝낸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통해 오랜만에 대중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강수연이 연기했던 몇 안 되는 발랄한 캐릭터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배우의 흔치 않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배우의 흔치 않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 (주)단성시네마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인 평범한 대학생 철수(박중훈 분)는 아는 영어 단어가 2개 밖에 없지만 예쁘고 명랑한 영문과 여학생 미미(강수연 분)에게 첫눈에 반한다. 철수는 미미가 탄 버스에서 행상인 연기를 하며 미미의 관심을 얻는데 성공했고 미미 역시 순수한 철수에게 호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로 한다.

문제는 철수에게 미미는 하나뿐인 소중한 '연인'이었지만 미미에게 철수는 그저 흔한 '남사친'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미미는 노련한 밀당으로 철수의 애를 태운 후 가족이 모두 의사인 의대생(정선일 분)과 소개팅을 한다. 미미의 무관심에 화가 난 철수도 친구들과 함께 다른 이성을 유혹하러 거리로 나서지만 철수의 대학친구 보물섬(김세준 분)과 고등학교 동창 최알랑드롱(최양락 분)은 이성을 유혹하는 데는 전혀 재주가 없다.

철수는 미미가 의대생과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술에 잔뜩 취하지만 함께 술을 마신 친구 보물섬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긴다. 알고 보니 보물섬은 악성 뇌종양이었고 보물섬은 평소 돌봐주던 장애인 학생들과 마지막 추억을 만든 후 세상을 떠난다.

보물섬의 죽음 후 미미는 보물섬 대신 장애인 학생들을 돌봐주고 군에 입대한 철수의 면회를 간다. 그리고 '진실된 사랑을 찾으라'는 친구 보물섬의 유언에 따라 미미와 철수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한다.

1986년 <청 블루스케치>로 데뷔했던 이규형 감독은 두 번째 영화였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가 1987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 되면서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다. 이규형 감독은 김혜수가 출연했던 차기작 <어른들은 몰라요>로 서울관객 22만 명을 동원했지만 이후 만들었던 영화들이 모두 흥행 실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이규형 감독은 지난 2020년 2월 담도암 투병 끝에 향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엉뚱한 괴짜친구, 알고 보니 역대급 천재
 
 김세준이 연기한 보물섬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김세준이 연기한 보물섬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 (주)단성시네마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두 번째 주인공 보물섬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해 입학식에서 학생 대표로 선서를 했을 정도로 똑똑한 인물이다. 재학 중 3대 고시를 모두 패스할 거라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던 보물섬은 어는 날 공부를 모두 팽개치고 망원경을 들고 학교와 세상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 보물섬이 악성 뇌종양에 걸렸고 죽기 전에 자신이 본 것들을 바탕으로 책을 쓰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물섬을 연기한 배우 김세준은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드라마를 좋아했던 대중들에게는 <왕초>의 앵무새와 <야인시대>의 와싱톤, <영웅시대>의 안불출 등을 연기한 중견 배우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세준은 80년대 중·후반 충무로에서 잘 나가던 청춘배우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이규형 감독과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외에도 <어른들은 몰라요>,<굿모닝 대통령>,<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 DMZ, 비무장지대 > 등 무려 5편을 함께 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는 훗날 개그계를 휘어잡은 80년대 후반 최고의 인기 개그맨 최양락이 철수의 고등학교 동창 최알랑드롱으로 출연했다(놀랍게도 최알랑들롱이 극 중 본명이다). 엄청난 바람둥이 행세를 하면서 철수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잡지만 사실 최알랑드롱 역시 실제로는 연애경험이 한 번도 없는 '모태솔로'다. 최양락 역시 많지 않은 영화 출연 속에도 이규형 감독과는 세 작품을 함께 했다.

평범한 대학생 철수의 조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미미는 잘난 의대생과 소개팅을 하는데 그 때 미미와 소개팅을 하는 의대생 역의 배우가 바로 정선일이었다. 1985년에 데뷔해 주로 MBC드라마에서 활동했던 정선일은 2005년 <제5공화국>에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2010년 <동이>에서는 대전내관, 2012년 <무신>에서는 왕정복고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키려다 실패하는 주숙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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