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사람 키에 못 미치고 얼추 무대를 포괄하는 옆으로 길게 늘어진 막(膜)이 무대 전면(前面)에 놓인다. 한 무용수가 괴나리를 잔뜩 지고 막 앞을 서서히 지나가고, 막 뒤에선 무용수들이 춤을 춘다. 정확하게는 막 뒤에서 춤을 춘다고 짐작할 뿐 관객은 막에 찍힌 괴이한 실루엣을 본다. 막의 뒤쪽에서 막과 무대 벽면 사이의 무용수들을 향해 비춘 조명이, 막에다 검은 수묵화를 만든다. 막 뒤의 또 다른 막인, 더 큰 막인 뒷막에도 검은 실루엣이 얼룩진다.

먹을 찍어 글씨를 쓰는지 난을 치는지, 무대 뒷막에다 전면의 막에다 어질어질한 먹의 형상을 채운다. 굽이굽이 산세(山勢)를 표현한 수묵화 같기도 하고, 초서체 글자 획 같기도 하다.

국립무용단이 4월 21~24일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선보인 공연 '더블빌' 중 안무가 차진엽의 '몽유도원무'의 시작 부분이다. 무용수의 동작과 미디어아트를 결합하여, 모티브가 된 몽유도원도를 무대 위로 성공적으로 끌어낸 장면이기도 하다. 조선조 대표적 걸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무용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측면에서 매우 칭찬할 만한 시도이다.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더불어 보편적 무용언어를 사용해 충분히 현대성을 우려냈기에 '상기'를 넘어 '발산'까지 해냈다는 칭찬을 받아도 되지 싶다.
 
     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전자음악 음향의 흐름 위에 라이브 연주로 거문고 소리를 띄워놓은 건 기본기에 속한다. 전통의 현대적 해석, 이런 건 국립무용단에서 안무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고, 개인적으론 몽유도원도를 해석하며 아마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이데아의 이념을 '막'이란 장치를 통해 무대에서 철학으로 구현한 몸의 사유에 더 주목했다. 몸의 사유의 '상기'라고 할까.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몽유도원도와 어우러지며 국립극장 무대에서 예술로 구현된 드문 사례를 보았다. 알다시피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앞만 보도록 몸이 결박된 채 동굴 속에서 동굴 벽에 비친 상(像)만을 볼 수 있는 수인이 인간이라고 말하는데 이 단순한 비유는 서양철학에서 수천 년 영감의 원천이었다. 빛과 실체(이데아)가 있어야 인간은 그 그림자로 볼 수 있고 실체를 그나마 짐작할 뿐이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

플라톤 동굴의 비유 ⓒ 위키피디아

 
극장에서는 인간(수인)이 관객이 되고 앞쪽의 막과 뒷막은 (두 개의) 동굴의 벽이 된다. '동굴'의 '인간'과 극장의 '관객'이 처한 위치가 다르다 보니, 몽유도원무에서는 실체(무용수)와 관객 사이에, 플라톤의 비유에서 동원된 것과 비슷한 의미의 막을 두었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막 같은 게 등장하기는 하지만, 쓰임새가 달라져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철학에서도 용어 자체에 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논의가 있듯이, 이 공연에서도 무용수가 실체인지, 막의 어른거림이 실체인지, 또는 뒷막의 미디어아트가 실체인지 토론이 가능할 법하다.

이론상으론 실루엣이 무용수의 것인지, 다른 무엇의 것인지 확정되지 않았기에 논의가 더 복잡할 것 같지만, 관객과 안무가는 '사전적' 공감 아래에서 전체로서 무대를 공유하기에 논의는 소통으로 바뀌고 이해는 감동으로 전환한다. 그럼에도 관객은 플라톤 동굴의 수인처럼 무대의 형상을 주시한다.
 
     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공연의 전반부는 수묵화이고 후반부는 채색화이다. 몽유도원도의 설정대로 봇짐을 하나씩 나누어 짊어진 무용수들이 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연기한다. 전통춤의 사위와 현대무용의 몸짓이 융합하며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고 봉우리는 물결처럼 걷다가 뛰다가를 연결한다.

채색화가 등장하며 무대는 도원으로 홀연 바뀐다. 가장 원색의 복숭앗빛 의상을 차려입은 세 명의 여성 무용수가 무대를 황홀경으로 몰아간다. 몽유도원도의 오른쪽에 부감으로 묘사된 도원이 무대로 단박에 옮아온다. 생명과 환희의 공간. 춤으로 해석한 도원의 모습이다. 무용수들의 원숙한 기량이 도원을 흐드러지게 개화한다. 몸의 사유의 '발산'이라고 할까. 객석은 열광한다.
 
     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국립무용단 손인영 예술감독은 "이번 신작은 무엇보다 세계시장을 겨냥했다"며 "기동성을 위해 사이즈를 줄이고 한국적이라는 대표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세계적 시각에서 밀리지 않는 예술성을 목표로 내걸었다"라고 말했다. 몽유도원무야말로 손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신선

신선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더블빌'의 두 개 공연 중 하나로 '몽유도원무'에 앞서 무대에 오른 고블린파티(지경민·임진호·이경구)의 '신선' 또한 손 감독이 의도한 그런 작품의 하나일 수 있겠다. '더불빌'로 하나로 묶인 만큼 '신선'도 전통을 컨템퍼러리 댄스의 시야에 펼쳐놓는 데 역점을 둔 듯하다. 다만 전통이란 외피를 씌웠지만 현대성과 대중성이 더 강하게 부각된 작품이었다.

신선을 소재로 신선놀음과 특이하게 음주를 춤으로 그려낸다. 정색하지 않은 시작으로 관객에게 이물감을 던진다. 객석의 조명이 꺼지지 않은 채 무용수가 슬그머니 나타나 공연을 시작한다. 무용수가 중간중간 등장해 내레이션으로 연출 의도를 전하며 흐름을 매개한다.
 
     신선

신선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이것은 맺고 어르고 푸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평소 신선 같은 모습으로 세상의 근심을 덜어내려 애씁니다. 오로지 춤에 몰두하는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술을 한잔합니다. 우리는 취해져 갑니다."
 
몸 대신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데는 양론이 있지 싶다. 익숙한 권주가(勸酒歌)가 여러 차례 흘러나오고, 술상과 술잔이 소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술상으로 사용된 소반이 공중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타악기로 변모하고 술 취해 밟고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된다. '몽유도원무'가 미디어아트를 적극 활용했다면, '신선'은 소품을 과감하게 들여와 서커스의 경계쯤으로까지 밀고 간다.

대중성과 왁자지껄한 구성은 '신선'의 강점이다. 정색하지 않고 남들이 다루지 않은 소재를 춤으로 형상화한 실험 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 다만 내레이션을 더 절도 있고 압축적으로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춤에만 사위가 있는 게 아니라, 말에도 사위가 있다. 춤을 정상급 국립무용단 무용수가 출 때 말 또한 정상급 선수의 것을 써야 말이 날개를 달고 무용과 함께 객석으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신선

신선 ⓒ 국립극장·국립무용단

 
같은 아쉬움을 '몽유도원무'에 표하자면 '몽유도원무(夢遊桃源舞)'라는 작명이 옥에 티라면 옥에 티였다. 차진엽 안무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제목이 몽유도원'도(圖)'가 아니라 '무(舞)'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 폭의 그림을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그려내는 거다. 안견의 그림에 비춰 돌아본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린다"고 말했는데, 사족에 가깝다. 말하자면 무엇을 '무(舞)'로 표현하는가를 통상 제목으로 삼는다고 할 때 무엇이 중요하지 '무(舞)'가 중요하지는 않다. '무(舞)'는 사전(事前)적으로 존재한다.

몽유도원을 무대(舞臺)에서 '무(舞)'로 보여준 것의 제목은, 전반적으로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서 그랬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면 티로 여겨지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눈이 갔다. '몽유도원' 정도의 제목이면 어땠을까. 


글 안치용,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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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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