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 4K 리마스터링 특별 상영을 위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큐어> 4K 리마스터링 특별 상영을 위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 전주국제영화제

 
일본 영화계에서 '영화 괴물'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한국 감독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쳐 왔다. 특히 그의 대표작 <큐어>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속 살인마 캐릭터에 영감을 준 걸로 알려져 있고, 좀비물 및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연상호 감독 또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팬이라 자처한다.
 
1997년작 <큐어>가 4K 버전으로 리마스터링 돼 국내에 개봉한다. 앞서 5월 초 진행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해당 버전이 공개됐고, 감독 본인 또한 그 결과물을 극장에서 처음 확인했다고 한다. 그의 영화가 한국에 개봉하는 게 세 번째. 필름의 질감을 디지털로 재현한 결과물을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개봉에 앞서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에서 감독을 직접 만났다.
 
필름은 꼭 극장에서? 영화적 재미가 가장 중요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나가 보이는 마미야라는 사내, 그리고 그와 만나면 어김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 <큐어>는 충격적인 소재와 감각적인 화면 구성으로 많은 팬들을 양산했다. 다시금 그것도 4K 버전으로 개봉하는 일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기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있다"고 운을 뗐다.
 
"거친 화면과 소리가 4K 작업으로 명백해지는 건 멋진 일인데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들리고 보인다는 게 불안하긴 하다(웃음). 필름으로 찍은 건 필름을 상영하는 극장에서 보는 게 가장 좋다고는 생각하는데 어디까지나 그건 이상적 이야기지. 사실 그 얘긴 40년 전에도 나온 말이긴 하다.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TV로 방송할 때도 그랬거든.
 
요즘은 4K든 디지털 상영이든 스마트폰이든 영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보는 시대다. 필름으로 찍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적 재미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필름으로 찍은 모든 영화가 다 훌륭한 건 아니지 않나. 감독이 잘 만들어야 훌륭한 영화가 되듯, 디지털 작업이나 4K 작업자가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리마스터링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큐어> 작업 당시에 대한 질문에 그는 "분명 공을 많이 들이긴 했다"면서도 "리허설이나 콘티를 치밀하게 준비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면과 정신 분석, 심리 작용 기제를 꽤 공부했어야 이야기와 캐릭터의 설득력을 담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매우 열심히 조사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고백하자면 의학서적을 보긴 했지만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을 깊이 조사한 건 아니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걸 글로 쓰는 편이다. 물론 나중에 전문가들에게 그걸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대부분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리허설은 거의 하지 않는다. 리허설을 할수록 연기의 신선함은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를 어디에 둘지, 그 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는 매우 엄밀하게 계획한다. 콘티를 그리진 않지만 카메라 위치나 배우 위치는 신중하게 고민 후 결정하는 편이다. <큐어>에 공을 들였다고 하는 건 이야기를 오랫동안 간직했기 때문이다. 찍은 건 1997년이지만 1990년 무렵 떠오른 아이디어다. 오랜 시간 각본을 썼는데 막상 실제 촬영은 순식간에 했다. 1997년에 제가 저예산 야쿠자 영화를 다섯 편이나 찍어야 했는데 두 편을 찍고 <큐어>를 찍은 뒤, 곧바로 다른 야쿠자 영화를 찍었다. 그랬기에 제가 오래 생각한 어떤 것들이 무의식 중에 <큐어>에 남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영화가 옴진리교의 연쇄 살인 사건을 은유하고 있다는 평단의 해석을 부정했다. 1990년 초중반부터 독가스 살포 등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옴진리회 신도들의 이미지가 <큐어>와 겹쳐지긴 하지만, 그는 "해당 사건이 일어나기 전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재차 강조했다.
 
"내 문제의식은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가 질문하신 기자님 말대로 암처럼 부지불식 간에 마구 퍼질 수도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인 건 아니다. 외부의 억압과 불행과 달리 내면 정신은 언제나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도 있다고 본다. 사실 <큐어>를 만들 땐 인간 정신에 대해 나름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오히려 요즘 더 혼돈이 가득하고 불안함이 커졌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정신세계는 깊고 넓기에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이 좀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큐어> 언급하는 한국 감독들... "매우 기쁘게 생각"
 
봉준호, 연상호 감독이 꾸준히 <큐어>를 인생 영화로 꼽고 자신의 작품 세계관을 구상하는 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또한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작 그 영화를 만들 때 미래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크게 흥행하지도 못했고, 영화제에서 수상하지도 못했다(웃음).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많은분들이 봐주시고 젊은 감독들이 영감받았다고 하는 걸 보니 그때 영화로 만들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게 흥행을 떠나 또다른 별개의 가치가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일본에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직시하게 해 준 결정적 작품이다. 그전에도 한국영화가 일본에 들어오긴 했는데 <살인의 추억> 덕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의 높은 완성도를 인식하게 된 것이지. 그런 작품에 <큐어>가 다소 영향을 준 부분이 있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사실 마미야라는 캐릭터는 깊게 생각하고 만들었다기보단 순간 떠오른 인물이다. 배우의 연기를 통해 좀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지.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당시 읽었던 의학 서적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뇌의 병으로 기억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의사와 대화하는 대목이었는데 자기가 한 말을 바로 잊고 계속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진찰하는 의사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써 있었다. 그걸 참고로 마미야의 대사를 만든 것이다. 하기와라 마사토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당시 그는 과장된 감정 연기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속이 텅 빈 사람처럼 연기하라고 말했지. 본인도 되게 신선해했다.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연기가 나온 것 같다."

 
"영화와 극장의 미래? 낙관한다"
 
유독 그의 최근작에선 일본과 동아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스파이의 아내>에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상징하는 731부대를 정면으로 다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전부터 역사를 다룬 작품이나 역사 자체에 흥미가 많았는데 예산의 문제로 기회가 많지 않았다"며 "요즘에 들어서야 예산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돼서 역사극을 만들게 된 것"이라 솔직하게 답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현재나 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 무엇이 옳은 건지, 무엇이 행복인지 등 현재 이후의 문제를 내가 제대로 간파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러다 보니 결말이 애매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를 배경으로 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건은 그 결과를 우리가 알 수 있잖나.
 
가령 일본은 왜 전쟁에서 패했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지금에는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자료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일본이 전쟁에 지는 상황을 구축하는 데에 역사 만큼 장점이 분명한 소재는 없다고 본다. 현대극과 전혀 다른 걸 설정해볼 수도 있고. 그게 <스파이의 아내>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인터뷰 말미, 그에게 극장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OTT 플랫폼의 발달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을 찾는 절대 관객 수가 줄었고, 세계 공통으로 극장 산업이 침체기 일로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거장의 혜안이 궁금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극장이 없어진다는 얘긴 많이 나온 걸로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잖나.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용산 근처에도 매우 큰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다. 아마 젊은층이 극장을 가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매력적일까? 종종 생각하는 주제다. 단순히 영화를 즐기려면 굳이 극장에 안 가고 집에서 봐도 된다. 결국 여러 사람과 함께 본다는 게 극장의 힘 아닐까.
 
가령 어떤 영화를 보는데 나도 재밌다고 느끼고 주위 관객들도 같은 반응일 때 뭔가 동질감을 얻는 순간이 온다.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재밌게 보는 것 같은데 난 영 재미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인이나 친구와 같이 보면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함께 영화를 보며 그 사람이 언제 웃고 우는지를 통해 상대방을 알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극장은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하는 장소다. 그런 경험은 다른 곳에선 좀처럼 할 수 없겠지. 그래서 전 극장이 앞으로도 남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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