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헐크, 닥터 스트레인지 등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파이더맨은 거미처럼 고층 빌딩을 수직으로 기어갈 수 있고 매달릴 수도 있다. 헐크는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화가 나면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이 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공간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슈퍼히어로들의 연합체, 어벤저스의 대장 격인 아이언맨은 초능력이 있는 히어로는 아니다. 그는 뛰어난 지능을 바탕으로 첨단기술을 초능력처럼 활용한다. 어벤저스 마지막 시리즈였던 <인피니트 워>에서 초능력이 뛰어난 히어로들조차 해결하지 못한 시간여행의 비밀을 푼 것도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였고, 타노스로부터 인피니티 스톤을 빼앗아 인류를 구원한 것도 아이언 맨이었다. 인류의 최종 구원자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마블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이언맨은 슈퍼히어로 중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나의 해방일지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숨은 능력이 있다

▲ 나의 해방일지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숨은 능력이 있다 ⓒ JTBC

  매 회를 거듭할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싸움을 치르고 있는 '슈퍼히어로'라고 말이다. 이들은 모두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들만의 전쟁터를 누비며 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매일을, 일상을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심장을 푹 찌르는 숱한 창과 화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내는 사람들이 마블의 슈퍼히어로와 전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들은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초능력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다. 

사랑에 목마른 기정은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능력이 있고, 비정규직 디자이너인 미정은 매번 자신의 팀장에게 무시당하지만 실은 뛰어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은 못 샀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편의점 점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어루만지는 창희는 다정한 사람이고, 무기력하게 술만 마시는 구 씨는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새로운 사랑과 관계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싱글대디 태훈은 훌륭한 외모 못지않게 따스한 공감능력을 가진 남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초능력은 쉽게 무시하고 단점은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정과 태훈, 박 부장이 만든 '해방클럽'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모임이지만 동시에 잊어버린 초능력을 다시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미정과 태훈에게는 자신감이라는 초능력을, 박 부장에게는 느긋함이라는 초능력을, 오래된 유물을 발굴하듯 세 사람은 진중하게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어른들의 성장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의 성장이 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어른도 실은 성장이 필요하다. 
 
나의 해방일지 비록 실패 할 지라도 사랑은 용기내는 자의 것이다

▲ 나의 해방일지 비록 실패 할 지라도 사랑은 용기내는 자의 것이다 ⓒ JTBC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초능력

극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기정(이 엘 분)은 소위 말하는 K-장녀(Korea-장녀 준말)이지만 철이 없다. 동생들은 주말에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하지만 기정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햇살에 피부가 망가질까 봐 땡볕 아래에서 절대 일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연애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매력만큼은 누구에게 지지 않노라 큰소리치지만 실은 엄청난 쫄보이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짝사랑 중인 태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소녀이고, 태훈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하면 기억을 잃은 척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푼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해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루에도 여러 번 감정의 변덕을 겪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기정을 보면 못내 사랑스럽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처럼 기정은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쏟고 싶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영악한 사람도 못된다. 기정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고백한 남자들을 함부로 대해 왔던 이력에 있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창희의 동창이자 짝사랑 중인 두환(한상조 역)은 극 중에서 창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마음은 막 달려가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전화도 못하고, 맨날 톡 사진만 보고, 혼자서 애타고 가슴 졸이고"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지만 고민만 하는 두환과 달리 기정은 자신을 좋아한다던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생각하고 무시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태훈에게 용기 내어 마음을 고백한다. 비록 거절을 당했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힘들지만 기정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제 드라마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기정이 발휘한 초능력은 자신도 기대하지 못했던 파급력을 가져 올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로는 초능력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와 사랑하는 상대 모두에게 인정하고 표현하는 순간부터 초능력이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미정은 겉보기와 달리 아주 강한 사람이다. 아니 가장 강력한 초능력의 잠재력을 가진 인물이다. 미정은 스스로가 가장 나약하고 밉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해답을 본능적으로 찾아낸다. 그녀는 구 씨에게 찾아가 자신을 '추앙'하라고,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납득할 수 있도록 그저 사랑해 달라고 하지만 타인의 지지가 선행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타인을 그렇게 추앙할 수 있도록 마음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의 추앙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우려하는 비밀스러운 남자 구 씨와 연대하여 서로를 다독이며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슬러 간다.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것, 상처가 두려워 자신의 사방에 둘러쳐 놓은 담장을 스스로 허물 수 있는 것, 상처 입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 승부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초능력은 바로 이런 힘이 아닐까.

물론, 인물들의 노력만으로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면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드라마는 분명 시청자의 판타지를 충족해 주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들은 화끈하고 시원하게 복수하거나, 유혈이 낭자하게 끝을 보거나,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 신데렐라를 구원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드라마의 성격처럼 잔잔하고 예의 바르게 갈등을 해결한다.

예를 들어, 미정이 속한 부서의 팀장은 미정이 만든 디자인 초안을 검토하면서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미정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학대한다. 미정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교묘한(직장에서의 많은 갑질이 실은 이렇게 교활하게 이뤄진다는 것을 작가가 알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팀장의 오만한 콧대가 꺾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팀장의 상사가 팀장의 수정안을 미정의 초안으로 다시 만들어 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작가는 겉보기에는 잔잔할 수 있으나 실제 직장이라고 가정할 때 꽤나 영리한 복수를 미정에게 선물한다. 참고 인내한 자여, 그대에게 축배를!
 
나의 해방일지 '대한민국의 나처럼 애타는 사람들 에너지만 다 모아도 진짜 원전 하나 돌리고도 남는다'

▲ 나의 해방일지 '대한민국의 나처럼 애타는 사람들 에너지만 다 모아도 진짜 원전 하나 돌리고도 남는다' ⓒ JTBC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섬세하게 쌓아 올리고 있는 <나의 해방일지>를 보며 작가의 역량과 감독의 연출에 크게 감동하고 있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극의 분위기에서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와 달리 해학과 유머가 있어 이전보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극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 드라마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두환의 이런 말. 

"대한민국의 나처럼 애타는 사람들 에너지만 다 모아도 진짜 원전 하나 돌리고도 남는다."

드라마는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창희를 제외하고 극 중 인물 각자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포텐셜(잠재력)은 두둑하게 채워진 기분이다. 삼 남매와 구 씨, 해방클럽 멤버와 두환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을지, 아직 8회가 더 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끝까지 이들을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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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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