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에서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인적이 드문 노포식당에 들어가면 푸짐한 음식과 함께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을 경험할 때가 있다. 외지사람과의 만남이 많지 않은 할머니는 마치 명절에 찾아온 자식 또는 손주들이라도 만난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음식 하나라도 더 내어 주려 한다.

반대로 똑같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시골의 노포 식당임에도 친절과는 거리가 먼 곳들도 존재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음식을 내어주고 심지어 맛도 투박하기 그지 없다. 가끔 손님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문의나 요구를 할 때면 크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핀잔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불친절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 2000년대 중반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식당을 나오면서 십중팔구 이렇게 이야기했다 "와, 저 할머니 완전히 <마파도>네".

전체 인구 5명인 이상한 섬에 젊은 육지 남자 2명이 찾아와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추창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파도>는 그 시절 드세고 무서운 할머니들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통했다.
 
 추창민 감독은 장편 데뷔작 <마파도>로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추창민 감독은 장편 데뷔작 <마파도>로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광해> 연출했던 추창민 감독의 데뷔작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한 추창민 감독은 1997년 여균동 감독의 <죽이는 이야기>에 연출부로 들어가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 후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에서는 스크립터(촬영내용을 기록하는 사람), 장문일 감독의 <행복한 장의사>에서는 각본과 조연출로 참여했다. 그리고 2000년 추창민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 <사월의 끝>이 프랑스, 스페인, 핀란드 등 다수의 해외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충무로의 신예감독으로 이름을 알리던 추창민 감독은 2005년 5년의 준비 기간 끝에 장편 데뷔작 <마파도>를 선보였다. 고 여운계 배우와 김수미 배우, 김을동 배우, 김형자 배우, 길해연 배우 등 할머니 역할을 소화한 5명의 열연이 돋보였던 <마파도>는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극장가에 작은 이변을 일으켰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젊은 스타배우 출연 없이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추창민 감독은 2006년 설경구와 송윤아를 캐스팅해 만들었던 정통멜로 <사랑을 놓치다>가 전국52만 관객에 그치며 겨울방학 시즌에 관객들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랑을 놓치다>는 설경구와 송윤아 부부가 처음 호흡을 맞춘 작품이었고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김연우의 <사랑한다는 흔한 말>도 영화의 흥행과 별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사랑을 놓치다>는 영화 개봉과 같은 시기에 발매된 김연우 3집의 앨범명이었다).

<사랑을 놓치다>의 흥행이 실패로 돌아간 후 추창민 감독은 2011년 이순재 배우와 송재호 배우, 윤소정 배우, 김수미 배우를 캐스팅해 강풀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연출해 잔잔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9월에 개봉해 무려 1230만 관객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드디어 '천만 감독'에 등극했다. 감독 데뷔 7년, 편수로는 4편 만에 이룬 기록이었다.

천만 감독이 된 추창민 감독은 다시 약 7년의 공백을 가졌다가 2018년 정유정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스릴러 <7년의 밤>을 선보였다. 하지만 장동건과 류승룡이라는 스타배우를 캐스팅한 <7년의 밤>은 전국 52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추창민 감독은 지난 1월 조정석과 이선균, 유재명이 출연하는 차기작 <행복의 나라>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과 함께 개봉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이런 할머니들과 섬에 갇혀 살 수 있을까
 
 <마파도>는 스타배우들의 출연 없이도 영화가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마파도>는 스타배우들의 출연 없이도 영화가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모든 사건의 발단은 1등에 당첨된 로또복권을 가지고 잠수를 탄 다방종업원 끝순(서영희 분)을 잡기 위해 건달 엄재철(이정진 분)과 비리 경찰 나충수(이문식 분)가 끝순의 주소지인 마파도로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복권의 주인인 신사장(오달수 분)은 끝순을 잡기 위해 돈을 좋아하고 집요한 성격의 충수에게 30억 원의 사례비를 제안하며 자신의 충신 재철과 충수를 마파도로 보낸다. 하지만 그곳엔 끝순 대신 5명의 드센 할머니들만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제주댁(길해연 분)은 마파도에서 설움과 눈물을 담당하고 있지만 나머지 4명의 할머니들은 수년 만에 섬에 찾아온 젊은 남자인 재철과 충수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재철과 충수는 낚시꾼으로 위장해 끝순이 숨을 만한 곳을 찾으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붙잡혀 농사일에 끌려 간다.

할머니 역 배우들의 활약에 다소 묻힌 감이 있지만 충수 역의 이문식은 <마파도>에서 매우 실감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초반만 해도 비리경찰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하던 이문식은 마파도로 넘어와 할머니들 앞에서 온갖 망가지는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웃음을 책임졌다. 특히 냄새 나는 화장실에 시너를 뿌리고 볼일을 보다가 재철이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에 화장실이 불에 타 화상을 입는 연기는 <마파도> 최고의 웃음포인트였다.

재철은 철없던 시절 충수 때문에 감옥에 갔던 기억 때문에 충수를 매우 싫어하지만 두 사람은 섬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충수가 대마밭을 보고 잠시 눈이 돌아갔을 때도 재철이 가장 앞에 나서 충수를 말렸고 신사장이 낫으로 끝순을 인질로 잡아 협박할 때도 충수와 재철은 한마음으로 신사장을 말렸다(물론 신사장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활약을 한 인물은 끝순의 생모 제주댁이었다).

<마파도>는 이정진과 김수미가 하차하고 이규한과 고 김지영 배우가 합류한 채로 2007년 속편이 개봉했다(김수미 배우는 속편에도 특별출연으로 잠시 등장한다). 예능 PD출신 이상훈 감독이 연출한 <마파도2>는 전국 150만 관객을 동원했고 <마파도>는 당초 계획대로 3편까지 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회장댁 역의 고 여운계 배우가 타계하면서 3편의 제작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진지한 오달수와 '또' 박복했던 서영희
 
 <마파도>는 배우 오달수의 진지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마파도>는 배우 오달수의 진지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올드보이>의 감금방 사장 철웅 역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던 오달수는 <마파도>에서 복권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된 건달 두목 신사장 역을 맡아 변신을 시도했다. 할머니들이 사는 집에 불을 지르고 끝순을 낫으로 위협할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지만 제주댁의 눈물에 마음을 돌린다. 특히 낫을 내려놓은 신사장이 모든 걸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바다 봐라"라고 한숨짓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연쇄살인범한테 잡히고(<추격자>) 리코더에 목이 찔리고(<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남편에게 맞고 뒹구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등 박복한 연기를 자주한 배우 서영희는 <마파도>에서도 복권을 들고 잠적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다(심지어 그 복권마저 새에게 빼앗겼다). 그래도 서영희에게 다행인 사실은 <마파도>를 계기로 배우로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됐다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감초 배우로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던 유해진도 <마파도>에서 재철과 충수가 마파도로 들어갈 때 탄 작은 배를 모는 어부 역할로 특별 출연했다. 유해진은 심한 뱃멀미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재철과 충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배를 몰다가 도착이 가까워 올 때 즈음 "잘못 왔네"라는 외마디 대사로 두 주인공에게 큰 절망을 안겼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마파도 추창민 감독 이문식 고 여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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