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여성 배우 중 한 명인 손예진은 다양한 장르의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넓은 연기 폭을 자랑한다. 역대 케이블 드라마 최고 시청률(21.68%, 닐슨코리아 유료가구 플랫폼 기준)을 기록했던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손예진은 한 작품 속에서 멜로부터 코믹, 카리스마 있는 연기까지 다양한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5중대의 특무상사 표치수(양경원 분)와 나누는 말싸움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300만에 육박할 정도로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데뷔 초까지만 해도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유명했던 손예진이 남자 배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청자(또는 관객)에게 웃음을 전달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데뷔 초기 손예진이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대부분 말이 없고 차분한 역할들이었다. 그나마 2003년 로맨틱 코미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 출연했지만 이 영화에서 관객을 웃기는 역할은 손예진이 아닌 차태현과 유동근의 몫이었다.

<주몽>과 <바람의 나라> <신이라 불린 사나이> 등에 출연하며 2000년대를 주름잡았던 배우 송일국 역시 '장군의 증손자'라는 신분(?) 때문인지 좀처럼 망가지는 연기를 보여준 적이 없다. 그렇게 작품 속에서 진지한 역할만 주로 연기했던 배우 손예진과 송일국이 2005년 한 작품에서 만나 변신을 시도했다. 상대를 울리는 '바람둥이 선수'를 연기하며 전국 230만 관객을 웃겼던 영화 <작업의 정석>이었다(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작업의 정석>은 청순배우 손예진(왼쪽)과 진지배우 송일국의 첫 번째 코믹연기 도전이었다.

<작업의 정석>은 청순배우 손예진(왼쪽)과 진지배우 송일국의 첫 번째 코믹연기 도전이었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작품 속에서 망가지기 어려운 송일국의 신분(?)

송일국은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을 외증조할아버지로,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두한 전 의원을 외할아버지로 제18,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겸 정치가 김을동 전 의원을 어머니로 두고 있다.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도중 IMF 외환위기로 귀국한 송일국은 "내가 너 같은 인물에 조건이면 배우 하겠다"는 선배 유동근의 조언을 듣고 1998년 MBC 공채 27기 탤런트에 도전해 합격했다.

공채 탤런트 신분이었던 송일국은 2001년까지 MBC 드라마에만 출연했는데 초창기 송일국의 출연작 중에서는 외할아버지인 김두한이 주인공 김춘삼(차인표 분)의 친구로 나오는 <왕초>도 있었다. 배우로서 당연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당시 김두한 역은 이훈이 맡았고 신인이었던 송일국은 김두한의 부하로 짧게 출연했다(송일국은 훗날 <야인시대>에서도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고사했다).

2004년 KBS 주말드라마 <애정의 조건>에서 중도하차한 지성 대신 투입돼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은 송일국은 같은 해 KBS의 퓨전사극 <해신>에서 악역 염장 역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송일국은 2005년 두 편의 영화를 선보였는데 하나는 전국 21만 관객으로 흥행에 실패한 <레드아이>였고 또 한 편은 송일국의 코믹 연기가 돋보였던 <작업의 정석>이었다(<작업의 정석>은 영화 출연이 많지 않은 송일국의 유일한 흥행작이기도 하다).

송일국은 2006년 '친정' MBC로 돌아와 <주몽>을 통해 5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견인하며 2006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특히 <주몽>은 이란 등 아랍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송일국은 현지 방문 당시 국빈 대접을 받았다. 송일국은 2008년과 2010년 김진 작가와 박봉성 작가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바람의 나라>와 <신이라 불린 사나이>에 차례로 출연했지만 '<주몽>급' 인기를 재현하진 못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공연된 연극 <나는 너다>에서 안중근 의사와 그의 아들 안중생을 연기한 송일국은 2008년 판사 정승연씨와 결혼했고 2012년엔 세 쌍둥이의 아빠가 됐다. 송일국은 2014년 삼둥이와 함께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했고 '국민 귀요미'로 떠오른 대한, 민국, 만세의 활약에 힘입어 2014년 KBS 연예대상에서 최고 엔터테인먼트상, 2015년에는 우수상을 수상했다.

호스트 아닌 바람둥이들의 불편하지 않은 코미디
 
 많은 여성들을 홀렸던 서민준의 노련한 작업 방식은 같은 선수인 한지원에게는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많은 여성들을 홀렸던 서민준의 노련한 작업 방식은 같은 선수인 한지원에게는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윤종빈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비스티 보이즈>는 여성을 오로지 돈을 뜯어내는 존재로만 보는 호스트들의 삶을 다룬 영화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인 <작업의 정석>에서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작업의 정석>의 두 주인공 한지원(손예진 분)과 서민준(송일국 분)은 스스로 프라이빗 뱅커와 유명 건축가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삶을 즐기기 위해, 또는 자신과 어울리는 짝을 찾기 위해 이성을 유혹하는 '작업'을 벌인다.

사실 '작업'이라는 단어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됐던 시트콤 <세 친구>에서 바람둥이 캐릭터 윤다훈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유혹하러 가면서 "나 지금부터 작업 들어간다"라고 했던 것이 유행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작업'은 2003년 국립국어원에 신조어로 등재될 정도로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단어가 됐고 결국 2000년대 중반 최고의 라이징 스타 송일국과 손예진이 출연하는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영화 속에서 지원과 민준은 지원의 친구가 운영하는 피부 관리샵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작업본능을 느낀다. 사실 출중한 외모와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까지 느끼고 있다면 앞뒤 잴 필요 없이 만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 만큼은 언제나 백전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던 두 사람은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흐름대로 연애를 주도하기 위해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검승부'를 펼친다.

지원은 자신을 위해 제주도까지 날아온 민준에게 "다금바리가 먹고 싶다", "여인숙이 아닌 호텔에서 자고 싶다"며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한다. 지원의 전 애인 성모(박용우 분)의 활약(?)으로 자금줄이 막혀버린 민준은 빗속을 뛰어 전당포에 고급 시계를 맡겨 돈을 마련하고 아버지(노주현 분)를 제주도까지 불러 지원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준 후 욕실에서 탈진해 쓰러진다. 도도하던 지원도 그제야 민준의 정성에 감동해 마음을 연다.

다큐멘터리 감독에서 광고기획사 PD, 방송국 FD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오기환 감독은 2001년 이영애와 이정재 주연의 <선물>을 연출하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작업의 정석>이 흥행 성공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던 오기환 감독은 2007년 윤진서 주연의 <두 사람이다>와 2009년 옴니버스 영화 <오감도>를 연출했다. 하지만 2014년 <패션왕>이 전국 59만에 그치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큰 시련을 경험했다.

<작업의 정석> 최고 개그 대사는 현영의 몫
 
 <야인시대>의 쌍칼 박준규(오른쪽)는 <작업의 정석>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코믹연기를 시도했다.

<야인시대>의 쌍칼 박준규(오른쪽)는 <작업의 정석>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코믹연기를 시도했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2000년대 초·중반 독특한 목소리와 뛰어난 예능감으로 영화와 드라마, 예능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현영은 <작업의 정석>에서 피부관리숍을 운영하는 지원의 절친 양수진 역으로 출연했다.

현영은 <작업의 정석>이 흥행한 후 2006년 3월 루마니아 출신의 남성 3인조 그룹 오존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누나의 꿈>을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6년에도 드라마 <불량가족>과 영화 <조폭 마누라3>에 출연한 현영은 2007년 자신의 첫 주연작인 <최강로맨스>를 통해 120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최강로맨스>는 한국영화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2007년 상반기 개봉작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7편 중 한 편이다.

드라마 <무인시대>와 영화 <혈의 누> 등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박용우도 <작업의 정석>에 특별출연해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박용우는 <작업의 정석>에서 한지원의 전 남자친구이자 현재는 스토커가 된 강성모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는 김해에서 제주까지 수영해서 건너갈 정도로 미련하고 무모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지원과 민준의 카드를 모두 정지시킬 정도로 배경이나 능력은 매우 뛰어난 인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엔 배우 박노식의 아들, <야인시대> 출연 후엔 '쌍칼'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버린 배우 박준규는 <작업의 정석>에서 강원도의 현금부자 봉사장을 연기했다. 지원을 좋아해 지원이 다니는 은행에 항상 거액을 예치하는 인물인데 땅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라 땅을 개인금고처럼 사용한다. 박준규는 과장된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봉사장 캐릭터를 코믹하게 연기했지만 아쉽게도 쌍칼의 이미지를 지울 만큼 분량이 썩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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