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OTT서비스와 IPTV로 편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영화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 최소 2시간 안팎의 귀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특히 호감이 있는 사람과 극장 나들이라도 가는 날에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더욱 늘어난다. 따라서 어렵게 고른 영화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실망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영화를 봤다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한 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보여 주려고 하는 작품들은 내용이나 주제가 방향을 잃고 산으로 가면서 관객들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도 2~3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영화의 짧은 런닝타임 동안 코미디의 웃음과 드라마의 감동, 스릴러의 긴장감, 액션의 통쾌함, 멜로의 애절함을 한꺼번에 관객들에게 전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 내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졸작이 된 영화들을 보면 관객들은 '차라리 한우물만 제대로 파는 영화가 낫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오직 '눈물'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했던 한 편의 영화가 끝까지 울음을 참으려 했던 관객들의 눈물샘을 고장 나게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8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기도 한 김유진 감독의 <약속>이다.
 
 <약속>은 상영관이 많지 않던 90년대 후반 서울에서만 7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약속>은 상영관이 많지 않던 90년대 후반 서울에서만 7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 신씨네

 
신인상 건너뛰고 남우조연상 휩쓴 정진영

고교 시절부터 영화 감독을 꿈꾸던 정진영은 서울대 국문과 입학 후 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연출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막동이(한석규 분)의 작은 형 역할을 맡은 배우의 출연이 무산되면서 정진영이 대타로 들어갔고 작은 역활이었음에도 상당히 자연스런 연기를 선보였다. 그렇게 졸지에 배우활동을 시작한 정진영은 1998년 김유진 감독의 <약속>에 캐스팅되면서 자연스럽게 '직업배우'가 됐다.

정진영은 <약속>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보스 공상두(박신양 분)를 하늘처럼 모시는 2인자 엄기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약속>은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98년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건너뛰고 곧바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정진영은 관객들에게 개성 있고 연기 잘하는 늦깎이 신예의 등장을 알렸다. 

정진영은 2000년대 들어서도 <달마야 놀자>와 <와일드카드> <황산벌> 등에 출연하며 주연급 배우로 자리 잡았고 2005년에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을 연기하며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황산벌>에서 이준익 감독과 인연을 맺은 정진영은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평양성>까지 연속으로 출연하며 2000년대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로 활약했다(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평양성>을 끝으로 잠정은퇴를 했다).

2000년대까지 영화를 위주로 활동하던 정진영은 2010년대부터 드라마로 활동범위를 넓혀 <동이>에서 서용기, <브레인>에서 천하대 신경외과 김상철 교수, <사랑비>에서는 장근석의 중년을 연기했다. 정진영은 2002년5월부터2006년1월까지 3년8개월 간 SBS의 탐사보도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했는데 이는 김상중(14년1개월)과 문성근(6년4개월)에 이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역대 3번째로 긴 기간이었다.

2013년 < 7번 방의 선물 >에서 교도소 보안과장을 연기하며 2번째 천만 영화를 만든 정진영은 2014년 1400만 관객을 모은 <국제시장>에서도 덕수(황정민 분)네 4남매의 아버지로 출연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학창시절부터 영화 감독이 오랜 꿈이었던 정진영은 지난 2020년 조진웅과 배수빈이 주연을 맡은 <사라진 시간>을 연출하며 50대 중반의 나이에 드디어 영화감독의 꿈을 이뤘다.

뻔해도 눈물 나는 '수도꼭지 멜로'의 힘
 
 전작 <편지>를 통해 뛰어난 눈물연기를 선보였던 박신양은 <약속>에서도 명불허전의 오열연기로 관객들을 울렸다.

전작 <편지>를 통해 뛰어난 눈물연기를 선보였던 박신양은 <약속>에서도 명불허전의 오열연기로 관객들을 울렸다. ⓒ 신씨네

 
<약속>이 개봉하던 1998년11월 박신양은 이미 고 최진실과 함께 출연했던 또 하나의 '수도꼭지 멜로영화' <편지>와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를 통해 한석규를 위협할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약속>의 성공 여부는 박신양의 커리어에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약속>은 다행히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이 관람했고 박신양은 2000년대에도 배우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전도연 역시 한석규와 함께 한 영화 데뷔작 <접속>이 서울 67만 관객을 기록하며 '영화체질'임을 증명했다. 전도연은 두 번째 영화였던 <약속>이 흥행에 크게 성공한 데 이어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까지 수상했다. 결과적으로 <약속>은 전도연에게 연기와 흥행파워를 겸비한 '믿고 보는 여성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작품이 됐다.

영화 후반부 공상두(박신양 분)는 평소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던 오기량(조선묵 분)이 살해되자 이성을 잃고 반대파인 남정택(김명국 분)에게 복수를 하러 간다. 하지만 뒤늦게 찾아온 엄기탁(정진영 분)이 상두에게 살해된 반대파 조직원들의 피를 자신의 흉기에 묻히고 자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는 상두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하며 범행현장에서 상두를 내쫓는다. 많은 남자관객들이 엄기탁, 그리고 정진영이라는 배우에게 반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극장 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약속>의 최고 명장면은 역시 상두와 희주(전도연 분)가 성당에서 약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당신께서 저한테 '네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이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홀로 남겨두고 떠난다는 게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라는 박신양의 오열과 "다른 여자 만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야. 네 맘 속에서 날 제껴 놓는 것도 나한텐 배신이야" 등 <약속>의 주제가 담긴 대사들이 대거 등장하며 관객들을 울렸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와 <금홍아 금홍아> 등을 연출했던 김유진 감독은 <약속>을 통해 일약 멜로 영화연출에 능한 감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5년 만에 선보인 신작은 형사들이 주인공인 범죄액션영화 <와일드카드>였고 2008년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기전>을 연출했다.<신기전>은 전국3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김유진 감독은 <신기전>을 끝으로 더 이상 상업영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다.

영화와 함께 OST < Good-Bye >도 인기
 
 <약속>으로 주요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휩쓴 정진영은 2000년대 주연급 배우로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약속>으로 주요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휩쓴 정진영은 2000년대 주연급 배우로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 신씨네

 
사실 <약속>은 두 주인공 박신양과 전도연을 제외하면 정진영의 존재감이 워낙 강해 다른 조연배우들 중에서는 크게 돋보이는 인물이 없었다. 다만 1968년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영화 <엄마의 일기>로 데뷔했다가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재개한 배우 조선묵이 공상두의 왼팔에 해당하는 오기량을 연기했다. 사업을 정리하려 했던 상두는 오기랑의 죽음을 확인한 후 이성을 잃고 살인을 저지른다.

연극배우 출신으로 <약속>에서 공상두 라이벌 조직의 보스 남정택을 연기했던 김명국은 <약속> 이후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의 박정달 형사, 영화 <와일드카드>의 장칠순 형사 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모 햄버거 CF에 출연해 'X도날드 아저씨'로 불리며 전성기를 달렸다. 김명국은 최근 2000년대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진 않지만 작년엔 윤다훈과 함께 오랜만에 영화 <이번엔 잘 되겠지>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팝송을 OST로 쓰면서 대중들에게 재조명되는 노래들이 적지 않았다. 황신혜,유동근이 출연했던 드라마 <애인>의 < I.O.U >와 영화 <접속>의 < A Lover's Concerto >, <쉬리>의 < When I Dream > 등이 대표적이다. <약속>에서도 OST로 쓰인 Jessica Folcket의 < Good-Bye >가 영화의 슬픔을 극대화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사실 이 노래는 리메이크 곡으로 원곡자는 호주의 전설적인 듀오 AIR SUPPL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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