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 감독의 장편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영화 내내 강사장으로 불리던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왕자(백윤식 분)가 "이 별엔 희망이 없어"라고 외치며 지구에 레이저 빔을 발사한다. 그렇게 지구는 두 조각으로 쪼개지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면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지구멸망으로 영화가 끝나거나 이미 멸망한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비단 <지구를 지켜라>뿐만이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에서는 인간을 위험요소라고 판단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스카이넷'이 자체판단으로 지구에 핵폭탄을 쏜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포한 인공냉각제 'CW7'에 의해 빙하기가 된 지구가 등장한다. 영화이기 때문에 <터미네이터>와 <설국열차>의 설정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이다.

핵무기와 지구온난화 만큼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되는 문제가 바로 쌓여가는 쓰레기 문제다. 환경문제 때문에 함부로 소각할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썩기를 기다리자니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쓰레기 문제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숙제가 된 지 오래다. 지난 2008년에 개봉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 월-E >는 지구 대청소에 들어갔다가 멸망해 버린 지구에 홀로 남은 청소로봇의 사랑을 다룬 독특한 작품이다.
 
 <쿵푸팬더>와의 흥행대결에서 살짝 뒤진 <월-E>는 이듬 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을 통해 아쉬움을 달랬다.

<쿵푸팬더>와의 흥행대결에서 살짝 뒤진 <월-E>는 이듬 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을 통해 아쉬움을 달랬다. ⓒ 한국소니픽처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개국초기부터 함께 한 픽사의 최고 스토리텔러

1986년 <북극 어디에선가>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앤드류 스탠튼 감독은 1990년 픽사의 두 번째 직원으로 입사했다. 1995년 오늘의 픽사를 있게 만든 <토이스토리>의 원안과 각본 작업에 참여한 스탠튼 감독은 3년 후 존 라세티 감독과 함께 <벅스 라이프>를 공동연출했다. 1999년 <토이스토리2>와 2001년 <몬스터 주식회사>의 각본작업에 참여한 스탠튼 감독은 2003년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

스탠튼 감독의 첫 단독 연출작은 장난감이나 곤충, 괴물이 아닌 물고기 가족 중 아들을 잃어버린 아빠를 주인공으로 한 2003년 개봉작 <니모를 찾아서>였다. 스탠튼 감독이 감독, 각본, 원안에 바다거북 크러시의 목소리 연기까지 참여한 <니모를 찾아서>는 제작비(9400만 달러)의 10배에 달하는 9억 40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리며 크게 성공했고 200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니모를 찾아서> 이후 <인크레더블>과 <카>의 성우로 참여했던 스탠튼 감독은 2008년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영화로 완성했다. 멸망한 지구에 남은 청소로봇의 사랑이야기 < 월-E >였다. 드림웍스의 야심작 <쿵푸팬더>와 맞대결을 벌인 < 월-E >는 세계흥행에서 5억 3400만 달러로 6억 3100만 달러의 <쿵푸팬더>에 살짝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 월-E >는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한 번 스탠튼 감독에게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겼다.

<니모를 찾아서>와 < 월-E >를 성공으로 이끌며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스탠튼 감독은 2012년 실사영화에 도전하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스탠튼 감독은 무려 2억 63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을 연출했지만 <존 카터>는 세계적으로 2억 8400만 달러의 성적을 올리는 데 그쳤다(할리우드에서는 일반적으로 제작비의 2배 수익이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탠튼 감독이 명예회복을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16년 <니모를 찾아서>의 속편인 <도리를 찾아서>가 세계적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크게 흥행했기 때문이다. <도리를 찾아서>는 픽사영화 중 <토이스토리3>에 이어 2번째로 10억 달러를 돌파한 작품이 됐다. 스탠튼 감독은 2019년 <토이스토리4>에서도 기획과 원안에 참여하며 여전히 '픽사의 개국공신'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최신 탐사로봇과 사랑에 빠진 청소로봇
 
 폐허가 된 지구에서 만난 월-E(왼쪽)와 이브는 로봇임에도 여느 인간들 못지 않게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폐허가 된 지구에서 만난 월-E(왼쪽)와 이브는 로봇임에도 여느 인간들 못지 않게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 한국소니픽처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인류문명이 붕괴한 지구와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로봇의 사랑이야기. 아무리 상상의 한계가 없는 애니메이션이라지만 관객들을 납득시키기 쉬운 소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스탠튼 감독은 <토이스토리>부터 <니모를 찾아서>까지 픽사의 히트 애니메이션 대다수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 월-E >의 각본을 직접 쓴 스탠튼 감독은 청소로봇과 식물 탐사로봇의 사랑을 사람이 등장하는 그 어떤 멜로 영화보다도 아름답고 가슴 시리게 그려냈다.

월-E는 지구대청소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기 때문에 언어능력 같은 필요 이상의 기능을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월-E는 자기 이름 외에는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단어가 거의 없다(심지어 첫눈에 반한 로봇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이브를 '이바'라고 부른다). 팔에서 강력한 대포가 발사되는 최신 식물 탐사로봇 이브 역시 짧은 단어만 말할 수 있을 뿐 대화기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그럼에도 월-E와 이브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교감한다. 이는 의자에서 일어날 필요조차 없어진 인간들이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과 대비돼 보여진다. 특히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브가 고장 난 월-E를 고치기 위해 월-E의 집으로 날아가 급하게 수리를 하는 장면은 그 어떤 멜로드라마보다 애틋하다(재부팅된 월-E는 처음엔 이브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브와 손을 잡은 후 이브를 알아보고 수줍게 손깍지를 한다).

< 월-E >에서는 애플기기 유저들에게 익숙한 효과음들이 자주 들린다. 월-E가 재부팅될 때 나오는 효과음은 OS X의 부팅음과 일치하고 월-E의 충전완료 알림음 역시 Mac의 부팅음을 사용했다. 또한 이브의 감각적인 디자인은 애플 제품들의 디자인과 비슷한데 실제 픽사 디자이너들이 이브의 디자인을 만든 후 애플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의 검수를 받았다. 픽사의 전 회장이 고 스티브 잡스였음을 고려하면 사실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 월-E >는 지난 2016년 영국방송협회가 영화평론가 177인의 투표를 거쳐 선정한 '21세기의 위대한 영화 100편'에서 29위에 이름을 올렸다.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샌과 치히로의 행방불명>(4위)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공교롭게도 한국영화인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 월-E > 바로 아래 순위인 30위에 랭크됐고 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66위에 랭크됐다).

최종보스의 전원을 꺼버린 인간들의 영웅
 
 액시엄호의 선장은 오토의 전원을 수동모드로 바꾸고 액시엄호의 지구귀환 명령을 내린다.

액시엄호의 선장은 오토의 전원을 수동모드로 바꾸고 액시엄호의 지구귀환 명령을 내린다. ⓒ 한국소니픽처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 월-E >에서는 월-E와 이브를 제외한 대부분의 로봇들이 두 주인공을 위험한 로봇으로 감지하지만 청소로봇 '모' 만큼은 월-E와 이브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월-E가 폐기물 처리 전문 로봇이라면 모는 말 그대로 때 빼고 광내는 청소로봇이다). 모는 이브가 잃어버린 지구의 식물을 불순물 감지센서를 활용해 찾아내는 결정적인 활약을 해냈다. 참고로 월-E와 모의 목소리 연기는 한 사람(벤 버트, 본업은 음향편집 전문가)이 맡아서 했다.

모가 월-E와 이브의 대표적인 조력자 로봇이라면 액시엄호의 자동조종을 담당하고 있는 오토는 지구귀환계획을 철회한다는 BnL사의 비밀지령을 수행하고 있는 영화 속 흑막이자 최종보스다. 물론 오토는 기계로서 자신을 만든 회사가 내린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죄 밖에 없다. 하지만 고장 한 번 나지 않은 오토로 인해 인간들은 700년 동안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몇 세대에 거쳐 우주를 떠돌아야 했다.

약 5만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거대 우주선 액시엄호의 선장은 우주선 안의 다른 승객들처럼 최소한의 활동조차 하지 않은 채 모든 업무를 앉아서 수행하는 나태한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탐사로봇 이브가 가져온 지구의 식물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지구로의 귀환을 결정한다. 선장은 오토의 방해에 지구귀환이 무위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치열한 사투 끝에 오토를 수동모드로 전환한 후 지구귀환에 성공한다.

< 월-E >에서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든 생활을 앉아서 하면서 심각한 비만에 시달리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는 넘어졌다 일어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월-E와 만나는 존과 메리는 자리에 앉아서 화면만 보던 생활에서 벗어나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가장 먼저 '활동'의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특히 영화 후반부 아기들이 경사로 미끄러져 내려올 때는 손을 뻗어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아기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