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PIP-위대한 유산> 공연 장면

뮤지컬 공연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개막 직후 출연배우가 코로나19에 확진되면서 일주일간의 중단을 마치고 재가동됐다. 당초 17일까지 공연하려던 계획은 24일로 연장됐는데, 휴식기 동안 예약한 관객들이 주말에 몰리면서 지난 토요일(9일)에는 오후 2시 낮공연임에도 불구하고 티오엠(TOM) 1관의 매표소 대기줄은 길게 늘어섰다.

실제로 공연한 날짜가 얼마 안 됐는데, 60명에 이르는 관객들이 인터파크 관람평에서 9.8점(10점 만점)을 낼 정도로 입소문이 자자했다. 이 작품은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아래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뮤지컬 부문에 선정된 < PIP-위대한 유산 >(극단 파파프로덕션 제작)이다. 

< PIP-위대한 유산 >은 본격적으로 작품이 제작되기 전, 창작산실 쇼케이스에 참여했던 모든 심사위원들과 평가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웰메이드(well-made, 완성도가 높은 창작물을 일컫는 용어)가 예견됐다. 이처럼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기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이유는 윤희경 작가를 비롯해 정유진 작곡, 성종완 연출, 최인숙 안무, 이경화 음악감독 등 뮤지컬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스태프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인공 '핍(PIP)'역에는 탄탄한 연기와 다양한 음역대의 노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소화하는 정동화와 유승현이, 아름답지만 차가운 심장을 가진 '에스텔라'역에는 한재아가, 핍의 든든한 매형이자 인간성이 돋보이는 대장장이 '조(JO)'역에는 이경수가 캐스팅되면서 공연을 손꼽아 기다려온 이들 사이에 기대감은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또한 김아선, 정명은, 조휘, 왕하성, 이선근, 윤데보라, 심건우, 전찬욱 등 견고한 실력을 자랑하는 12명의 배우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비결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며 역사의 검증을 마친 원작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대표작 <위대한 유산>이 이 뮤지컬의 출발점이다. 원작의 제목에 주인공 이름을 덧붙인 뮤지컬 < PIP-위대한 유산 >은 핍(PIP)이라는 소년이 가난한 대장장이에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신사가 되기까지의 사건을 겪으면서 변하는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은 고전 소설을 모티브로 제작됐던 대부분의 창작물이 원본에서 벗어나 현대적 시선을 더해 재해석하거나 각색자의 손길로 시대의 뒤틈을 허용한 것과는 다른 패턴을 보였다.

가급적 원작을 오롯이 무대화한 이 작품에서 눈 여겨볼 부분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계층'을 가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들이 한국적 선율이 담긴 노랫말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대사를 전달한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긴장의 높낮이 달리한 다양한 음역대는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조연 역할을 한 것이다. 

< PIP-위대한 유산 >에는 등장 인물들 간의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하는 모든 에피소드는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초반에 등장한 죄수가 나중에 유산을 기증한 후원자라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원작의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은 160년 전 세상에 빛을 본 원작이 수많은 독자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신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진짜 신사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뮤지컬 < PIP-위대한 유산 >은 영국 대문호의 작품 덕분에 뮤지컬에서도 빈틈을 찾아보기란 쉽게 않았다. 이것은 초연을 공개하는 자리인데도 높은 완성도를 가져온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이며, 이전에 영상화를 마친 다른 사례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실제로 1998년에 에단 호크와 기네스 팰트로가 주연으로 나선 동명의 드라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서 제작된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는 세기를 넘나드는 명작 덕분에 극의 완성도는 대체로 호평으로 이어졌다. 

< PIP-위대한 유산 >은 '핍(PIP)'이라는 고아 소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1800년대 중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시절에 만연했던 '신사 계층'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신분 때문에 우울한 시절을 보낸 '핍'은 대저택 새티스 하우스(Satis House)의 수양딸 '에스텔라'를 만나게 되면서 "누구보다 멋진 완벽한 신사가 되고 싶은" 환상을 꿈꾼다. 포스터 상단을 장식하는 이 문장이 무대를 이끌어가는 작품의 원천이며 다양한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한적한 영국의 바닷가가 배경이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도제 교육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핍'에게 어느 날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엄청난 금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이로써 '핍'은 한순간에 인생역전을 맞게 되면서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반대로 흘러간다. 신사가 되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변할까. 엄청난 부로 인생역전을 했지만 가난했던 과거를 외면하며 자신을 응원했던 가족조차 외면한다. 신사가 되기 전후에 겪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위대한 유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뮤지컬 <PIP-위대한 유산> 공연 장면

뮤지컬 공연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PIP-위대한 유산 >은 150분에 걸쳐 여러 인물들의 관계도가 다소 복잡하게 엮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선악 구조가 뚜렷한 양면성 아래 구조는 간단하다. 가난하지만 따뜻함을 잃지 않고 서로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인간, 막대한 부와 재산을 가졌지만 '찢어진 가슴'과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인간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가난했지만 신사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핍'은 과거 남자에게 상처받아 복수를 꿈꾸는 '해비셤'의 계략에 빠지며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해비셤의 입양인 '에스텔라'는 예쁜 얼굴을 가졌지만 거만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주인공 '핍'을 혼돈으로 몰아넣으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다. 

원작을 영어로 'Great Expectations'라 하는데, 작품의 제목인 '위대한 유산'을 몇몇의 독자는 '막대한 유산'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작품 속 내용처럼 핍이 바라는 바에 따라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으면 진짜로 신사가 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당시 시대상에서 비판을 받아온 '신사 계층'에 대한 민낯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신사처럼 보일지라도 인간다움에서 배신을 느낀 주인공 '핍'은 결국 막대한 유산을 포기하면서 진정한 '위대한 유산'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핍의 인생역전 전후에 나타난 변화를 눈여겨 봐야 한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신사가 되는 꿈을 이루었지만, 자신 곁에서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던 주위 사람들을 부끄러워하고 배신하는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작품의 핵심 포인트인데, 과연 이런 비극적인 인간의 민낯이 소설 속 한심한 인간의 일부분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이 상태에 내몰리면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있는지 묻고싶다. 

착하고 순수했던 핍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찰스 디킨스가 던지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또한 '핍'이 바랐던 신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길 바란다. 돈으로 신사의 옷을 입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교육을 받는다면 진짜로 신사가 된 것일까. 하지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겉모습과 달리 내면에서도 신사다움을 가졌는가. 하층민의 계급이었던 대장장이 '조'가 보여준 행동, 그리고 핍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했지만 그를 믿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으로 돌아온 죄수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신사는 겉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옴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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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을 지냈으며,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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