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두세 번 곱씹어 읽어봐도 좀처럼 뜻을 헤아리기 힘든 제목이다. 막공까지 불과 이틀을 남겨둔 지난 1일, 뒤늦게 이 연극을 접했다. 만우절을 기념이라도 하듯 '우화인지 실화인지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다. 무엇이 '나무'이고 도대체 '신발'은 어떤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무엇보다 '불온한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극단 그린피그의 작품이라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발칙한 실험을 시도하는 윤한솔 연출은 과거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천만 관객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네 식구가 식당에 가도 모두 다른 메뉴를 시키는데, 5명 중 1명이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늘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촉이 이번에도 작동됐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도를 관극 전부터 알아채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문제였는지 모른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장면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장면 ⓒ 그린피그 제공

 
극장에 들어서자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백(아니 수천 장은 넘어 보인다)장의 자투리 천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무대를 빼곡히 쌓아올린 이것들을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궁금하다. 스케일을 압도하는 오브제를 보고있으니 앞으로 펼쳐질 연극에 대한 호기심이 점차 증폭됐다. 오래 전, 상암동 하늘공원의 쓰레기 매립장을 연상하는 비주얼. 게다가 매립지 중간을 뚫고 나온 메탄가스통을 연상하듯 천장에는 서너 개의 파이프에서 연기가 뿜어 나온다.

음침한 조명 사이로 산처럼 쌓아올린 폐기물 속에는 빈 페트병과 재활용 가방까지 엉켜있다. 이런 무대장치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 그동안 알고 있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벗어난 것임을 눈치챘다. 배우의 대사보다는 시각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미장센을 강조한 작품임을. 그렇게 제목부터 무대까지 요란하게 시작하는 이번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된 극단 그린피그의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3월26일~4월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이다. 

극단 그린피그의 설명을 옮기자면, 이번 작품은 'e(환경)-삼부작의 첫 번째 시도'란다. 인간을 옥죄어온 환경문제를 공감시키기 위해 작품에 사용된 의상, 도구, 소품의 90% 이상을 재활용 물건으로 채워넣었다. 더구나 켜켜이 쌓아올린 천더미 속에서 맨발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은 묘한 대비감을 이끌어낸다. 암울하지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시종일관 같은 메시지를 던져주려 노력한다. 인간의 허황된 욕망이 불러온 참사, 편리함을 쫓지만 결국엔 파멸로 귀결되는 새드엔딩, 앞뒤 재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경종, 서로의 신뢰가 처절하게 무너져버린 삭막한 관계는 결국 문명과 인류의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장면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장면 ⓒ 그린피그 제공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두 가지 극한 대립구조를 갖는데 여기선 '나무'와 '신발'이 그 역할을 맡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준 '신발'은 두 발로 걷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적절한 오브제가 있을까. 작품은 인간이 여느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직립보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류. 이렇듯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두 발을 외부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신발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반대로 자연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는 단절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자연을 상징하는 '나무'는 직립보행과는 반대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감으로써 문명에 대비되는 영역으로 자리잡았다. 

이 연극은 한국 연극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던 고(故)윤영선(1954~2007) 작가의 7쪽짜리 초고에서 시작됐다. 게다가 이미 10년 전인 2012년 12월, 윤영선 연극제에서 초연으로 선보인 이후 10년 만에 재공연됐는데, 이것은 당시에 윤영선 희곡집에 실린 이성열 연출의 작품과는 다름을 강조했다. 인간의 허황된 욕망이 불러온 비극, 그리고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엄마와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인간에게 무한한 편리함을 가져다준 핵과 원전의 양면성을 극대화시키며, 제동이 걸리지 않는 인간의 욕심은 결국에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여운을 남긴다. 좁은 의미로는 지금 이 시대가 직면한 인간사회의 문제점을, 넓은 의미로는 기후변화가 몰고 온 인간의 위협요소를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80분은 이야기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따라가기 쉽지 않다. 배우들이 전하는 대사의 의미를 하나하나 이해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한없이 불편한 연극. 그러나 뒤죽박죽 뒤섞인 네 개의 에피소드를 조각처럼 연결한다면 연극의 종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의미를 서서히 체득할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 인간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단편적인 어려움, 그것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말이다.

윤영선의 시적이고 멜랑콜리한 언어는 그대로 배우들의 입말로 전해지며, '원숭이 꽃신', '태아잡담', '계약',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등 여러 에피소드는 짧은 호흡으로 교차된다. 외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전환은 핵과 원전,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문명과 인류의 끝에 태어나고 싶지 않은 태아의 시선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의 장면으로 매듭짓는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온갖 감언이설에 속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하며 지구를 힘들게 했을까. 엄마와 태아 사이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계약을 통해 인간의 숨겨진 악의 본성을 느끼게 만들었나. 나무를 타야했던 원숭이조차 꽃신에 길들여져 자신의 본능을 잃어가는 모습이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눈앞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결국엔 후손에게 상처만 떠넘기는 원전의 실상을 보았는가.

기후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던 인간은 방독면을 써야만 견딜 수 있었던 비극적 단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우리가 지켜야할 자연은 인류의 욕심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교훈을 남긴다. 제한 없는 실험이 정극의 대사보다 생각할 여운을 던져주는 작품으로 공연의 마지막은 몇 분간의 미동도 없는 시간을 던져줌으로써 연극이 던지는 숙제를 관객이 고민해보길 바란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포스터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공연 포스터 ⓒ 그린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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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가볼만한 소식을 전하는 '주간추천 전시공연'과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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