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임금이 되는 1400년을 전후에 원경왕후 민씨 및 처갓집과의 권력투쟁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왕후 및 왕비족과의 대결이 그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된 것이다.
 
왕후는 대통령 부인과 달리 독자적 위상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독자적인 취임식(책봉식)을 거쳤고, 임금이 도성을 비울 때는 조정을 이끌기도 했고, 임금이 후계자 없이 변고를 당하면 차기 임금을 지명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하는 대통령 부인과 달리, 왕후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권한과 권력을 유지했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가 되어 더욱 막강해질 수도 있었다.
 
이방원은 권력에 특히 민감했다. 아버지의 권력까지 질투하는 사람이었다. 부인의 권력을 시샘하는 것이 그에게는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왕후에게도 막강한 힘이 주어졌으니, 임금이 된 뒤에 그의 부부 싸움이 잦아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KBS <태종 이방원>의 최근 방영분은 이들의 부부 싸움을 집중 조명했다. 그런데 좀더 심혈을 기울였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

원경왕후 민씨에 대한 태도 바꾼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 KBS1

 
드라마 속의 이방원(주상욱 분)은 왕이 된 뒤부터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박진희 분)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부인과 처갓집의 도움을 빌려 임금이 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면을 바꾸었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은 부인 민씨에게 '나의 신하가 되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 임금이 된 자신과 함께 걸으려 하지 말고 뒤로 물러서서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원경왕후는 아주 단호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그의 답변을 지난 2일 방영된 제23회에서 들을 수 있다.
 
제23회 방영분 초반, 원경왕후가 이방원의 편전(일상적 집무실)에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방원이 자신의 권한을 제약하고 궁인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를 하기 위한 기습 침입이었다.
 
때마침 어전회의 중이었던 대신들은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해줬다. 그런 다음, 왕후와 주상의 부부 싸움이 시작됐다. 아내는 토사구팽이란 사자성어까지 거론하며 배신감을 토로했고, 남편은 모든 게 당신이 자초한 일이 아니냐고 대꾸했다.
 
왕후는 "그동안의 제 헌신에 대한 보답이 결국 이것이옵니까?"라며 "오로지 서방님만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면서 보낸 제 인생이 결국은 사냥이 끝나면 버림받는 사냥개의 삶이었던 겁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이방원의 반응은 '내 탓이오'가 아니라 '니 탓이오'였다. "그런 결말을 초래한 건 바로 중전이오"라며 "끝내 나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끝없는 불충을 자행한 중전 때문이란 말이오"라고 항변했다.
 
왕후는 '내가 니 신하 되려고 결혼했느냐?'는 식으로 받아쳤다. "저는 전하의 신하가 되려고 전하와 혼인한 게 아닙니다"라며 "발걸음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부부가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응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왕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신하뿐이오"라고 쏘아붙였다. 나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니 가당치도 않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이 말한 것처럼 왕후 역시 군주의 신하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왕조시대의 논리 구조에 비춰보면, 왕후를 일반적인 신하로 보기는 힘들었다. 임금 역시 왕후를 그렇게 대하지는 못했다.
 
왕후는 나라의 어머니, 군주는 나라의 아버지라는 관념이 있었다. 자녀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서열을 매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후와 왕의 서열을 매기기가 곤란했다.
 
봉건적 가족제도 하에서는 남편이 아내보다 높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높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아내일 때와 어머니일 때에 여성의 지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백성과 신하들의 관점에서 보면, 왕후를 군주의 신하에 포함시키기가 이론상 곤란한 면이 많았다.
 
옛날 한국인들은 만물을 음양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런 관념이 군주권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인 왕후와 남성인 군주의 조화 속에 군주권이 행사되는 게 옛날 사람들에게는 바람직했다. 그랬기 때문에 왕후는 왕의 신하인 면도 있지만 왕의 동행자·동반자인 측면도 컸다.
 
원경왕후와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 임금 때 통과된 왕명이 있었다. 왕명이 통과될 때의 어전회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그전부터 있었던 관습을 재확인하는 성격의 왕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음력으로 세종 14년 7월 21일자(양력 1432년 8월 16일자) <세종실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들이 중궁전에 하례하고 감사를 올리고 선물을 바치는 등의 일이 있을 때에 옛 제도에 의거해 모두 다 신(臣)으로 칭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도성과 지방의 신하들이 왕후 앞에서 스스로를 신하로 부르게 하자는 건의였다. 신하들이 군주를 대하듯 왕후를 대하도록 하는 왕명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세종은 이를 수락했다.
 
이런 제도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예조는 "옛 제도에 의거해(依古制)"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기존에 관습적으로 인정됐던 것을 왕명을 통해 정식으로 확립해두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왕후를 군주처럼 대하는 관습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을 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신(臣)이라는 글자는 본래 노비를 뜻했다. 임금의 노비들을 그렇게 불렀다.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조정 대신들이 높은 사람들로 비쳤지만, 왕실이 볼 때 조정 관료들은 왕실의 노비에 불과했다. 자기네 집안일을 해주는 '임직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신'이란 글자가 조정 관료들을 가리키는 데 쓰였던 것이다.

중국 후한시대(후기 한나라, 25~220년)에 허신이 편찬한 한자사전인 <설문해자>는 신(臣) 항목에서 "신이란 것은 매여 있는 것이다,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臣牽也. 事君也")라고 설명했다. '신'은 임금에게 종속된 존재이며 임금을 섬기는 존재라고 풀이한 것이다.
 
그런 뒤에 이 글자의 모양과 관련해 "굽혀 복종하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象屈服之形)"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두 팔을 땅에 대고 엎드린 모양을 본떠 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하와 군주의 예속적 관계를 글자 모양 속에 담았던 것이다.
 
1432년의 예조 관료들은 군주뿐 아니라 왕후에 대해서도 '굽혀 복종'하는 것을 '옛 제도'라고 인식했다. 왕후에 대해서도 신하로 자처하고 왕후도 군주처럼 모셔야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군주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 KBS1

 
왕후도 여느 신하처럼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드라마 속 이방원의 대사는 이 같은 당시의 관념에 배치된다. 드라마 속의 태종 이방원은 '너도 저 신하들처럼 나를 대하라'는 식으로 쏘아붙였다. 신하가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군주와 동행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왕비와 군주의 관계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후 역시 백성들이 군주처럼 떠받들어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신하가 아니면서도 군주와 동행할 수 있는 왕후의 특수 위상이 왕조시대의 관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제의 태종 이방원 역시 그런 시대 관념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관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부부싸움 장면에 은연중에라도 나타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왕후의 특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이방원의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왕후와 군주의 특수 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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