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자기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대중예술인과 체육인들에게는 이름 앞에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1980년대 가요계를 지배했던 '가왕' 조용필에게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했고 이내 영화계에서도 한국영화의 독보적인 원톱 배우였던 안성기를 '국민배우'로 부르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어린 신부>로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문근영이 '국민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갔다.

스포츠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IMF 시절 해외에서 맹활약하며 우울한 국민들을 위로했던 박찬호와 박세리,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국민 영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2003년 일본의 왕정치가 세운 아시아 최다홈런 기록을 깬 이승엽은 '국민타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한 번도 세계 3등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는 김연아는 '국민요정'에서 '국민여신'으로 수식어가 업그레이드되기도 했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흔해지자 사람들은 현실에서 해야 할 연애와 사랑의 수식어를 대중예술인에게 붙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2010년 걸그룹으로 데뷔해 가수와 배우로 동시에 활동하며 큰 사랑을 받던 missA의 수지에게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missA의 예쁜 막내였던 수지에게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영화는 바로 건축학과 출신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건축학개론>이었다.
 
 <건축학개론>은 비수기에 개봉한 멜로영화임에도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건축학개론>은 비수기에 개봉한 멜로영화임에도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인기 걸그룹 막내에서 '국민 첫사랑'이 된 수지

수지가 2009년 < 슈퍼스타K > 광주지역 예선에 참가했다가 JYP 연습생으로 캐스팅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1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거친 수지는 2010년 7월 4인조 걸그룹 missA의 막내로 데뷔해 데뷔곡 'Bad Girl Good Girl'로 당시 걸그룹 최단기간(23일)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현재는 12일 만에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한 ITZY와 Kep1er가 공동 1위 자리를 보유하고 있다).

2011년 김수현과 함께 <드림하이>에 출연하며 연기활동을 시작한 수지는 가수와 배우, 예능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2년 <건축학개론>에 캐스팅됐다. 수지의 청순하면서도 사랑스런 연기가 돋보인 <건축학개론>은 전국 410만 관객을 동원했고 수지는 단숨에 '국민 첫사랑'으로 떠올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수지는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가수와 드라마, 영화, 예능 부문에서 모두 신인상을 휩쓸었다.

2013년 이승기와 함께 <구가의서>에 출연한 수지는 갓 20세를 넘긴 나이에 방송가와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2015년 11월에 개봉한 <도리화가>가 전국 31만 관객에 그치며 데뷔 후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경험했다. 하지만 수지는 2016년 EXO의 멤버 백현과 함께 듀엣곡 'Dream'을 발표해 방송활동 없이 음원차트 1위와 지상파 음악방송 5관왕을 기록하며 또 한 번 '수지파워'를 증명했다.

수지는 2016년 여름 김우빈과 함께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에 출연했지만 동 시간대 경쟁작인 < W >에 밀려 최종회 시청률 8.4%로 아쉽게 종영했다. 2017년 9월 이종석과 호흡을 맞춘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 출연한 수지는 2019년 3월 JYP 엔터테인먼트를 떠나 배우전문회사인 매니지먼트 숲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사전제작 드라마 <베가본드>를 통해 <구가의서>에 함께 출연했던 이승기와 재회했다.

<도리화가>의 흥행실패 후 <리얼>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면 영화 출연이 한동안 뜸했던 수지는 2019년 호화캐스팅을 자랑하는 재난 블록버스터 <백두산>에 출연했다. 수지는 하정우의 아내 최지영 역으로 데뷔 첫 임산부를 연기했고 <백두산>은 82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수지는 지난 2020년 박보검과 정유미, 최우식, 탕웨이 등과 함께 김태용 감독의 신작 <원더랜드>의 촬영을 마쳤다.

정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일까
 
 <건축학개론>을 본 남성관객들 대부분은 수지와 '내적사랑'에 빠지곤 했다.

<건축학개론>을 본 남성관객들 대부분은 수지와 '내적사랑'에 빠지곤 했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사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30대 서연을 연기한 한가인이 2010년대의 수지만큼 당대 최고의 미녀로 불리며 남성 팬들의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다. 2005년 만 23세의 한가인과 결혼한 연정훈이 한동안 남성 팬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불렸을 정도. 한가인은 <건축학개론>에서도 여전한 매력을 발산하며 엄태웅과 남성 관객들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한가인과 2인 1역을 연기한 배우가 다름 아닌 '국민 첫사랑' 수지였다.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연기한 20살의 서연은 자신이 살고 있는 정릉이 정조가 묻혀 있는 릉인 줄 알고 개포동이 미사일인줄 아는 순수한(?) 음대생이다. 하지만 수지를 만난 20살의 서연은 다소 부족한 상식조차 귀여워 보일 정도로 영화 속에서 엄청난 미모와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승민(이제훈 분)과 막걸리 집에서 둘만의 생일파티를 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리면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연기는 대단히 사랑스럽다.

<건축학개론>의 카피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이다. 하지만 사실 이 카피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10대나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또래의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한다면 분명 누군가의 첫사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소위 '모태솔로'로 긴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건축학개론>의 카피는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누군가는 우리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가 더 와 닿을 것이다.

<건축학개론>의 배경은 1996년이지만 1996년 배경의 영화로는 고증오류가 적지 않다. 특히 승민이 재욱(유연석 분)의 집에 놀러 가서 1G의 하드디스크가 장착된 펜티엄 컴퓨터에 놀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1996년이면 이미 개인용 컴퓨터에 3기가 이상의 하드디스크가 장착되던 시절이다. 당시 재욱을 비롯한 3인이 공대생이고 재욱이 강남에서 자취를 하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설정을 고려하면 <건축학개론>의 최신형(?) 컴퓨터는 분명 고증오류였다.

<건축학개론>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은 영화의 배경이 된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영화 일에 뛰어들기 전에는 실제 건축회사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2000년대 초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연출부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영화 쪽 일을 시작했고 2009년 <불신지옥>을 통해 데뷔했다. 이용주 감독은 2019년 촬영을 마치고 작년 티빙을 통해 공개된 공유, 박보검 주연의 <서복>을 연출하기도 했다.

<건축학개론> 전후로 나뉘는 조정석의 배우인생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조정석은 <건축학개론> 이후 일약 인기배우로 도약했다.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조정석은 <건축학개론> 이후 일약 인기배우로 도약했다. ⓒ 롯데 엔터테인먼트

 
<건축학개론>에서는 4명의 주인공이 모두 좋은 연기를 선보였지만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고의 신 스틸러는 단연 승민의 친구 납뜩이를 연기한 조정석이었다. 지금이야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조정석은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였다. 하지만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을 통해 놀라운 코믹연기를 보여주며 일약 '납뜩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조정석과 함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출연했던 유연석은 <응답하라 1994>로 스타가 되기 전,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에게 흑심을 품은 못된 선배 재욱을 연기했다. 재욱은 잔뜩 술에 취한 서연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면서 풋풋한 멜로 영화였던 <건축학개론>을 순식간에 '미스터리 스릴러'로 만들어 버렸다(시나리오를 쓴 이용주 감독도 이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본인도 시나리오를 쓰면서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현재의 승민이 일하는 건축회사의 동료이자 30대 승민의 약혼자 은채 역은 직업이 '단발머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단발의 아이콘' 고준희가 연기했다. 처음에는 승민의 친구이자 큰 손(?) 고객인 서연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승민이 서연의 일에 매달리며 결혼일정에 차질을 빚자 짜증을 내기도 한다. 고준희는 2015년 6월에 개봉한 <나의 절친 악당들> 이후 7년째 영화 출연 소식이 없다.

<건축학개론>에서는 승민의 건축과 동기로 선배인 재욱에게 툭하면 밥을 사달라고 하는 눈치 없는 후배 동구가 등장한다. <건축학개론>에 출연할 당시엔 단역에 가까울 정도로 분량이 작았던 동구 역은 최근 인지도가 급상승하고 있는 조현철이 연기했다.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에서 주로 활약하던 조현철은 2017년 서른이 넘은 나이에 드라마 출연을 시작했고 작년 < D.P >에서 조석봉 일병을 연기하며 '한국의 호아킨 피닉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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