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도전을 중시하는 'LDP(Laboratory Dance Project)'의 공연 < Ash >가 24~27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2021년 11월 서울무용제에 40분 공연으로 출품된 < ASH >가 이번에 1시간 버전으로 바뀌어 관객을 만났다. 2001년 창단한 LDP무용단의 22번째 정기공연이다.
  
     <애쉬> 공연 포스터

<애쉬> 공연 포스터 ⓒ LDP

 
무대는 색깔은 잿빛 혹은 가능태?
 
공연제목이 < ASH >, 재이다. 나무 같은 것이 타고 남은 희끄무레한 물질이 재다. 타기 전의 형체를 유지한 재가 있는가 하면 무너져 내려 가루가 된 재도 있다. 바람에 날리든 형체를 유지하든 재의 색깔은 회색과 흰색 그 언저리이다. 반면 공연 무대의 색감은 검다. 굳이 재의 색깔을 찾자면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조명 정도라고 할까.

공연을 보기에 앞서 나는 동화 <신데렐라>를 떠올렸다. 아마 '재'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공연 < ASH >의 제목이 연상을 촉진했을 것이고 연출의도에 "시간의 역행"이 들어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신데렐라를 소환했다. "결핍이 가져오는 마음의 구멍"(김동규 예술감독)은 위에서 쏟아부은 형태와 바닥에 뚜렷하게 자리한 형태의 무대조명으로 확연하게 제시됐는데, 춤에선 무용수들의 몸짓을 세심하게 따라가야 했다. 때론 격하게 때론 무력하게, 또 느릿하고 나른하게 '구멍'이 무대 위에서 숭숭 뚫리는 가운데 그것이 마음의 구멍인지, 결핍 자체의 구멍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재'와 '시간의 역행'은 다시 신데렐라에게 나를 데려갔다. 신데렐라라는 이름의 유래는 '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cenere'에 '~하는 사람'을 뜻하는 'tola'를 붙인 '체네렌톨라(cenerentola)'이다. 재투성이 아가씨 정도. 독일에서도 같은 뜻으로, 그림 형제에 의해 '아슌푸틀(Aschenputtel)'로 불렸다. 영어 동화와 디즈니 영화를 접한 우리에게는 '재'를 뜻하는 신더(cinder)를 확장한 신데렐라(Cinderella)가 익숙하다.

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아슌푸틀(Aschenputtel)'처럼 왜 '애쉬렐라'가 아닐까. 비슷한 곳에서 발견되고 속성이 인접하지만 신더(cinder)와 애쉬(ash)는 다르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게 타면 아무것도 없어야 하지만) 애쉬는 무언가가 완벽하게 타고 남은 잔존물이고, 신더는 타고 남은 부분, 즉 타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신더는 탔지만 완전히 타지 않은 상태의 물질이다. 색으로 말하면 확연하게 이해되는데, 애쉬는 희끄무레한 반면 신더는 검은색에 가깝다.
 
     <애쉬> 공연모습

<애쉬> 공연모습 ⓒ LDP

 
앞에서 언급하였듯 공연 < ASH >의 색은 검은색이다. 보기에 따라 잿빛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애쉬'와 '신더'로 나누면 '신더'의 색이지만 나누지 않으면 뭉뚱그려 잿빛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LDP 예술감독 김동규의 얘기를 잠깐 들어보자.
 
코로나 팬더믹 이후 사회의 양극화는 가속화되었고, 인간다움을 구체화하는 예술의 방식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모두가 멈추고 제한되는 시간이지만, 결핍이 가져오는 마음의 구멍은 점점 차이나게 커졌다. 이 작품은 마음을 채우고 삶을 다독이던 작은 것들이 빠져나가는 이 시점에서, 결핍조차 무덤덤해지는 시간을 역행해본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소실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과연 실존하던 것이었던가. 이 작품은 저마다의 결핍에 대해 질문하고, 시간을 역행하면서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 본다.
 
"시간을 역행해보고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이 무엇인지"를 춤으로 표현한 게 < ASH >이다. '애쉬'이지만 '신더'로 거슬러 가는 개념이다(물론 '신더' 이전이 있지만, 그곳으로 이동하려면 속성의 점프를 감수해야 한다). 색감의 변화를 설명하면, '희끄므레'에서 '거무스레'로 갔다가 까매져야 한다. '애쉬'가 현재라면 '신더'는 과거이자 변화 혹은 실현 이전이다. '애쉬'는 '신더'의 가능태인 셈이다. 사실 동일 시간이라면 '신더'가 가능태이고 '애쉬'가 현실태일 수 있지만, 시간의 역행 구조에선 뒤바뀔 수 있다. 무대는 가능태의 색깔로 꾸며졌다.
 
소실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들의 실존

신데렐라의 원전은 17~18세기에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야기의 원형은 기원전 고대 이집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름다운 그리스계 여성 로도피스가 목욕하고 있는데 독수리가 그의 샌들을 채가서 파라오의 궁정에 떨어뜨렸다. 파라오가 수하를 보내 신발 주인을 찾다가 로도피스를 알게 되고 멤피스의 궁정으로 불러들여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당황스럽게도 재가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로도피스의 직업이 매춘부였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신데렐라 동화는 원전 혹은 원형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된다.
 
     <애쉬> 공연모습

<애쉬> 공연모습 ⓒ LDP

 
김동규 감독은 "내가 소실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과연 실존하던 것이었던가"를 묻는다. 사실 실존하던 것이 소실하는 현상은 일반적이다. "소실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들"의 실존을 묻는 시간의 역행은 그러나 인식의 제한된 경로를 밟기에 특수한 탐색이다. 게다가 춤으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결핍에 대해 질문하며" 전체로서 결핍 이전을 몸으로 상상해야 한다.

독무로 시작한 공연은 걸맞은 음악과 함께 역동적인 군무로 끝난다. 중간에 상반신을 벗은 듯한 느낌을 주는 자켓 탈의 상태의 무대가 한동안 이어지는데, '애쉬'와 '신더'의 공존으로 여겨졌다. 윗도리를 차려입은 아래위 검은색 의상의 후반부는 그렇다면 '신더'이다. "온전한 모습"과 "본래의 형태"는, 그런 게 있기야 하겠지만 회고의 영역에서 '신더' 너머로는 탐색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마치 우리가 청소년기는 기억해도 태중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아슌푸틀(Aschenputtel)보다 신데렐라(Cinderella)의 기억이 더 살갑다고 할 때 공연의 대미가 위로를 준다. 관객도 위로를 느꼈을까.
 
     <애쉬> 공연모습

<애쉬> 공연모습 ⓒ LDP

 
오브제 없이 조명과 음악, 그리고 춤만으로 '재'의 회상을 그렸다. 지난 공연과 달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회전무대가 없어서 공연의 느낌이 달라졌을 텐데, 시간까지 늘어나서 어느 공연이 더 나았을지는 지난 공연을 보지 못한 까닭에 말할 수 없지만, 의도한 대로 작품을 넉넉하게 풀어헤치는 이점이 회전무대가 없는 단점을 상쇄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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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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