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 코드

소스 코드 ⓒ ㈜롯데 엔터테인먼트

 
제이크 질렌할과 미셸 모나한 주연의 영화 <소스 코드>(2011년)는 기발한 발상 위에 로맨스와 영웅스토리를 세워 만든 액션영화이다. 던칸 존스가 연출한 이 영화에서 제목이자 죽은 사람의 생애 마지막 8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플랫폼인 '소스 코드'를 설명하며 평행우주와 양자역학 같은 조금 머리 아픈 이론이 동원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평행우주나 양자역학과는 크게 상관이 없고 고전적인 철학의 주제인 주체, 혹은 사유와 연장을 다룬다. 철학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법한데, 무엇보다 <소스 코드>가 공상과학(SF, science fiction)영화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이야기가 꼭 과학이론에 부합할 필요는 없다.
 
평행우주와 양자역학 마케팅
 
질렌할과 모나한이 주연으로 돼 있지만 영화의 유일한 주인공은 질렌할이다. 사실상 죽은 상태인 콜터 스티븐슨 대위의, 적절한 용어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열차 테러로 사망한 남자의 '잔여' 기억으로 침투하여 그 남자의 기억을 탐색함으로써 테러범을 색출한다는 게 '소스 코드'의 기본얼개이다.

그러나 <소스 코드>는 설정과 다르게 전개된다. 사망한 남자의 '잔여' 기억으로 침투하였기에 영화처럼 스티븐슨 대위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건 불가능하다. 8분으로 설정된 사망자의 생애 마지막 기억에서는 이론상 관찰 말고는 할 게 없다. 대충 양보해서 기억에 개입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사망한 사람의 두뇌에 저장된 정보의 변화에 불과하다. '소스 코드'란 플랫폼을 통해 테러범을 찾아내는 상상이 상상으론 불가능하지 않지만 거기까지다.

극중 스티븐슨 대위가 살리려고 애쓰는, 모나한이 연기한 크리스티나 워렌은 사망한 사람으로 인체나 기억이 없다. '소스 코드'에서 만나는 워렌은 스티븐슨의 정신이 뒤집어쓴 기억 안의 워렌이기에 실제 워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두 개의 막을 투과한 환영의 그림자이다. 설령 스티븐슨이 '잔여' 기억을 조작하여 영화에서 그러하듯 워렌과 사랑을 확인하고 생명을 구한다고 한들 그것은 워렌의 몸, 기억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스티븐슨이 워렌을 구하고 테러범을 잡아낸 것은 '사실'일 리가 없지만, 따지고 들면 영화 속 사실이 꼭 사실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SF라는 장르가 가진 그럴 듯한 형상화를 전제한 자유를 인정해줘야 한다. 관객은 그 결말을 영화 속의 '사실'로 받아들여도, 혹은 영화 속의 '꿈'으로 받아들여도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평행우주와 양자역학은 여기서 일종의 마케팅 용어로 사용될 뿐이다.
  
     소스 코드

소스 코드 ⓒ ㈜롯데 엔터테인먼트

 
알파고 대 스티븐슨
 
마케팅 말고 생각거리를 찾는다면 오히려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 장면을 영화에서 현실로 옮겨보자.

2016년 3월 9~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간의 총 5회 바둑 대국이 열렸다. 인공지능(AI) 기사인 알파고는 당시 인류 대표인 이세돌과 대결을 벌여 4승 1패로 압승했다. 대국이 열리기 전에는 승패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대국 이후론 바둑에서 인간이 AI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선선히 받아들인다. 오히려 알파고가 기록한 1패를 두고,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간'으로 이세돌이 칭송받는 분위기다.

나도 당시 이세돌이 이른바 '신의 한 수'로 불린 78수를 둔 4국을 지켜보았다. 이 4국에서 흑을 잡은 알파고는 180수 만에 돌을 던져, 이세돌이 불계승을 거뒀다. 내 관심사는 '신의 한 수'가 얼마나 절묘한 수였는지보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떻게 불계패를 선언할까였다. 인간 기사는 보통 말로 의사를 표시하거나, 바둑판의 모서리에 슬그머니 돌을 올려놓거나, 혹은 상대가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바둑에 패배했음을 전달한다.

알파고는 "AlphaGo resigns"라고 말했다. 알파고는 "resign"에 s를 붙여 3인칭을 사용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아무튼 알파고는 1인칭이 아니었다. 알파고는 바둑에서 세계 최고 기량을 자랑했지만, '나'가 아니었다.
  
     소스 코드 영화포스터

소스 코드 영화포스터 ⓒ ㈜롯데 엔터테인먼트

 
사유와 연장 사이
 
<소스 코드>의 스티븐슨은 철저한 '나'였다. 타인의 몸, 정확하게는 타인의 기억 속의 몸에 들어간 '나'의 인식에서, 분열되었지만 확고한 주체를 주장했다. 근대를 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존재론이 <소스 코드>에서 발견된다. '나'는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강건하지 않으며, 또한 '나'의 존재라는 게 그렇게 분명하게 또한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있지 않다는 견해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영화 <소스 코드>의 스티븐슨의 '나'는 완벽한 부재 때문인지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나'를 시전했다.

알파고는 (인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행동했지만 (인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데는 실패했다. 가정해 만일 정상의 바둑기사가 불의의 사고로 신체를 잃고 영화 <소스 코드>처럼 두뇌만 남아 컴퓨터 형태 비슷한 것으로 살아남게 됐다면, 그는 신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나'로 인식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영화에서 그려지진 않았지만, 만일 스티븐슨이 알파고를 대신해 이세돌과 바둑을 둬 불계패를 했다면,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화면에다 표시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알파고에게 부재한 '나'가 스티븐슨에겐 그렇게 뚜렷하였기에 표시 또한 "Stevenson resigns" 대신에 "I resign"이라고 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사유와 연장이란 것이 있다. 사유는 정신의 속성이고 연장은 물질의 속성이다. <소스 코드>에서 사유는 물질계에 의해 동원된다. 스티븐슨의 사유는 마치 주사액처럼 테러로 사망한 남자의 기억에 주입된다. 사유는 능동이 아니라 피동의 형태로 실현된다.

물질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다. 처음엔 스피븐슨의 사유와 그의 사유를 작동시키는 세계, 그의 사유가 넘겨져 (사유 안에서) 연장되는 8분짜리 세계의 구분이 뚜렷했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이미 사망한 그의 사유와 그의 사유를 사용하는 현실 세계 사이에 통로가 생기고 결국 혼란이 일어난다. 또한 궁극의 사유라고 불러야 합당할 터인데, 스티븐슨의 사유는 8분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확장돼 혹은 리셋돼 존재의 연장을 성취한다. 그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아니면 스티븐슨의 사유 안에 생성된 폐쇄회로인가. 이것이어도 좋고, 저것이어도 좋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가 아닐 수도 있다. 핵심은 그것이 영화적 세계라는 것이다.
 
그 영화적 세계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알파고와 달리, 어찌 보면 알파고와 다를 게 하나 없는 사망한(죽었다는 것은 물질이란 뜻이다) 스티븐슨의 사유가 '나'를 천착한 모습이다. 3인칭이기를 거부하고 시종일관 1인칭을 고집하며 그 1인칭에 호응한 2인칭을 불러내어 마침내 8분의 막을 뚫고 세계를 연장한 허무맹랑한 사유. 세계가 나를 죽음으로 관통했지만, 죽은 나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해 세계를 거슬러 사유를 연장했다는 철학놀이가 <소스 코드>의 배면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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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미술,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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