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개봉된 두기봉 감독의 영화 <화급>은 홍콩 소방대원들의 일과 삶을 심도 있게 다룬 영화다. 25년 전 영화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방대원의 보건과 안전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매우 교과서적인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화급(火急)의 사전적 의미는 대단히 급함 또는 걷잡을 수 없이 타는 불과 같이 매우 급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 내려간다. 
 
 영화 <화급> 포스터

영화 <화급> 포스터 ⓒ Cosmopolitan Film Product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자운산 소방대는 다른 소방대로부터 재수가 없다며 비난받는다.  

주인공인 구조반장 유수(유청운 분)는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가는 고집 센 사람이다. 함께 근무하고 있는 로가혜 견습대장은 수습기간 동안 임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정도로 업무에 열심이다. 소방서의 막내 왕호연(황호연 분)은 경직된 소방대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고 신임 대장 장문걸(방중신 분)은 엄격한 리더십으로 대원들과 종종 마찰을 빚는다. 

영화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상한 야채를 먹은 자운산 소방대원들이 단체로 식중독 증세를 보이며 병원을 찾는다. 여기서 구조반장 유수는 운명의 여인 닥터 진(이약동 분)을 만난다. 이후 구조작업 중 봉 구조대장이 추락하면서 다발성 골절사고로 심한 척추부상을 당하고 닥터 진이 봉 대장의 치료를 담당하면서 유수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화면이 바뀌고 봉 대장 후임으로 젊은 대장 장문걸이 부임한다. 운이 아닌 실적을 믿는다는 그는 첫날부터 엄격하게 부서별 점검을 하고 바로 훈련을 지시한다. 

한편 구조반장 유수는 훌륭한 경험과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현장에 진입하겠다는 예전의 답변을 고수하면서 승진 면접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신임 소방대원 왕호연의 아버지가 소방서를 방문해 직접 요리한 수프를 대접하고, 로가혜 견습대장은 남편과 아이를 갖는 문제로 실랑이를 벌인다. 신임 대장 장문걸은 이혼한 전 아내와의 가정 문제로 복잡하지만 그렇게 소방관으로서의 삶은 현장과 함께 흘러간다. 

아무래도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97년이다 보니 지금은 볼 수 없는 오래된 장면들도 연출된다. 예를 들면 출동을 위해 빠르게 달려 나가는 장면이라든지, '파이어맨 폴(Fireman's Pole)'이라고 불리는 봉을 타고 위층에서 내려오는 장면들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출동 장면이 다이내믹해 보일 수 있겠지만 소방대원의 보건과 안전이 가장 중요한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출동 중 달려 나가다가 넘어지는 2차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서 빠른 걸음으로 출동준비를 하고 봉을 타고 내려오다가 발목이나 무릎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봉을 사용하지 않는 소방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방서 청사 내에서 또는 현장활동을 마치고 소방대원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출동을 나가면서 소방대원이 설치된 버튼을 눌러 소방서 앞 도로의 교통신호를 바꾸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예전에 홍콩이 영국령이었기 때문일까. 출동하는 소방차의 브랜드가 영국산 소방차인 데니스(DENNIS)라는 모델이 많다. 아울러 함께 출동하는 소방차 중에는 독일의 벤츠, 일본의 이스즈(ISUZU)와 도요타, 이탈리아 이베코(IVECO), 스웨덴의 스카니아(SCANIA), 미국 브랜드 사이먼(SIMON) 등 마치 소방 엑스포를 보듯 이채롭다.    

한편 구조반장 유수는 출동 현장에서 투신하려는 닥터 진을 다시 만난다. 그녀는 시련의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자살을 결심하는데 그런 그녀는 유수의 설득과 자운산 소방대가 미리 설치해 놓은 에어매트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사고 이후 분홍 장미를 들고 문병을 하러 간 유수와 닥터 진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쌓여간다.  

자운산 소방대원들은 교통사고, 화재, 인명구조 등 현장을 뛰며 함께 성장해 간다. 종종 대장 장문걸과 구조반장 유수는 현장에서 충돌한다. 대장 장문걸은 물불 가리지 않고 현장에 진입하는 유수의 돌발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가 중반을 지나면서 방화범의 소행으로 6층 높이의 전만 방직공장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건물 내부에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데다 내부에 가연물질이 많아 화재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4급 화재 경보가 발령되고 자운산 소방대를 비롯한 많은 소방대가 현장으로 투입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는 5급으로 격상된다. 엔진오일과 표백제, 염색 약품 등 위험물질이 쌓여있고 그로 인한 폭발, 그리고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독성가스는 건물에 진입한 대원들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자운산 소방대는 4층에 갇힌 것으로 추정되는 여직원 2명을 수색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백드래프트 현상으로 폭발이 발생하고 소방국장은 모든 대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한다. 

자운산 소방대는 위험에 빠진 다른 팀 대원들을 구조하지만 다량의 산화칼슘이 쌓여 있는 4층에 고립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베이터에 남겨진 2명의 여직원까지 구한 자운산 소방대는 메탄이 가득 찬 공장 지하 하수구를 통해 탈출한다. 달콤한 휴식도 잠시, 또 다른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소방관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철학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준다. 

장문걸: "오늘이 출근 첫날인가? 물도 없이 화재 현장에 가다니..."
유수: "노인이 갇혔다고 해서요."
장문걸: "우리 일은 목숨 바쳐 사람 살리는 게 아니야."

유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소방국장 정부위: "이렇게 질문하는 건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란 뜻이다. 화재 현장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로가혜 견습대장: "내가 꺼냈을 땐 살아 있었어. 아기가 죽었다고... (흐느낀다)."
남편: "알아. 뉴스 봤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소방대원들에게 반드시 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영화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보건과 안전에 관한 전반적인 부분들을 매우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나라 소방공무원 노조에서 제기하고 있는 하루 일하고 이틀을 쉬는 소위 당번·비번·휴일 근무를 이야기 한 점, 현장에 진입하기 전 안전담당관에게 개인의 이름이 적힌 인식표를 전달해서 건물 진입 시점부터 누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점, 또한 현장에서 수시로 대원들의 숫자를 체크하고 공기호흡기의 남은 공기량을 확인한 점 등이다. 감독이 소방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연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현장 대원들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소방 지휘부의 전략은 비록 영화가 올드해 보이고 무거운 소방호스를 던져서 받는다는 과장된 설정에도 훌륭한 소방 영화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재수가 옴 붙었다고 비난받았던 자운산 소방대의 활약을 보면서 오늘 하루는 무척 재수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소방관 별점: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건 소방칼럼니스트 이건 소방검열관 소방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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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Columbia Southern Univ. 산업안전보건학 석사.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소방칼럼니스트. <미국소방 연구보고서>, <이건의 재미있는 미국소방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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