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 ⓒ KBS


KBS <태종 이방원>처럼 조선 건국 직후를 다루는 사극들이 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시기에는 도읍이 자주 바뀌었다. 1392년 이성계 즉위 당시에는 도읍이 개경이었다. 이때 고려 주상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런 다음,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 상태로 5년이 뒤인 1399년에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1405년에 한양 재천도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도읍이 자주 옮겨졌기 때문에, 이 시기를 다루는 사극은 도읍 위치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잘못하면 개경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양에서 일어난 일로 잘못 묘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성계는 건국 2년 뒤인 1394년부터 5년간 한양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는 한양에 영구히 머물기 위한 작업들이 있었다. 법궁으로 불리는 경복궁도 1395년에 세워졌다. 제1궁궐의 건립은 한양에 터전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뒤에 있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이방원이 과거의 개경인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음력으로 태조 7년 8월 26일(양력 1398년 10월 6일)에 있었고, 개경 천도는 정종 1년 3월 7일(1399년 4월 13일)에 있었다. 아버지를 배신한 지 6개월 만에 한양을 버리고, 송도(松都)로도 불리던 옛 개경 땅으로 환도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개경을 선택한 것은 서둘러 천도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한양 탈출을 서두르다 보니 기존 도읍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읍을 옮기면 주력 군대도 함께 이동해야 했으므로, 멀리 움직이기 힘든 사정도 영향을 주었다.
 
한양 탈출을 급히 서두른 것은 이방원의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그가 꺼림칙해 했다는 것은 추정이나 추측의 결과물이 아니다. 당시의 공식적인 천도 사유가 '꺼림칙하다'였다.
 
왕자의 난 뒤에 이방원이 임금으로 추대한 인물은 형인 정종 이방과였다. 정종은 허수아비 임금이고 이방원이 실권자인 이 시기에 천도의 명분으로 활용된 것은 서운관(書雲觀)의 건의였다. 오늘날의 기상청에 해당하지만 역술원 기능도 겸한 서운관이 건의한 내용이 정종 1년 2월 26일자(1399년 4월 2일자) <정종실록>에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서운관은 "까마귀 떼가 모여 떠들어대고 야생 까치가 와서 집을 짓고 재난과 이상 현상이 누차 나타났으니, 마음을 닦고 반성하셔서 변고를 없애야 하며 또 피방(避方)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거처를 옮기시라는, 도읍을 옮기시라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천도에 관한 제안을 서운관 관리들이 불쑥 꺼낼 수는 없었다. 이방원의 의중을 어느 정도 확인했기에 그런 건의를 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다. 서운관의 제의가 신속히 채택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위 실록 기사에 조(噪)라는 한자가 들어간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울 명(鳴)을 써서 '까마귀 떼가 운다'고 하지 않고 떠들어댈 조(噪)를 써서 '까마귀 떼가 떠들어댄다'고 했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민감해 하는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고 해서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바뀌었을 리는 없다. 왕자의 난 이후에 도성 사람들이 까마귀 울음소리에 한층 민감해졌기 때문에 '까마귀들이 떠들어댄다'는 말들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왕자의 난을 불길하게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서운관의 건의는 신속하게 채택됐다. 이것이 공식적인 천도 명분이 됐다. '까마귀들이 떠들어대서 한양은 꺼림칙하다'가 공식 사유가 됐던 것이다.
 
산의 북쪽에서는 음지가 조성되기 쉬운 반면, 강의 북쪽에서는 양지가 조성되기 쉽다. 그래서 산의 북쪽 마을에는 음(陰)이 들어간 지명이 많고, 강의 북쪽 마을에는 양(陽)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한성부가 한강 북쪽이라 하여 한양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 ⓒ KBS


그렇지만 이방원한테는 한양이 양지바른 따뜻한 곳으로 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를 배신한 도시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꺼림칙한 곳이었다. 이것이 한양 천도 5년 만인 1399년에 개경 환도가 이뤄지는 원인이 됐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이방원을 따라 개경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이성계한테는 개경이 꺼림칙한 곳이었다. 그가 앞장서서 고려왕조를 배신한 도시였다.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번에는 이성계가 이 도시를 견디지 못했다. 이방원 역시 고려왕조를 배신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만큼은 부담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앞장서서 배신한 이성계가 개경에 가자마자 심리적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일은 쿠데타와 정권 찬탈이었다. 왕실의 성씨가 바뀌었다는 의미에서 역성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신하인 상태에서 왕실을 배반했다. 재야 혁명가인 상태에서 왕조를 전복한 게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배신 경력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경으로 돌아간 뒤로는 더욱 더 그랬다.
 
고려를 배신한 뒤 한양으로 간 이성계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개경으로 돌아갔다. 형식상으로는 태상왕으로 격상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왕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그것도 집안 내 살육전으로 자녀들을 잃은 상태에서 개경으로 천도했다. 기가 죽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꺼림칙한 개경으로 가게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야음을 틈타 외출해야 했다. 백주대낮에 길거리를 다니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정종 1년 3월 13일자(1399년 4월 19일자) <정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내가 한양으로 천도해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나서 지금 환도했으니, 정말 도성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챙긴다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와 형의 왕위를 잇는 형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버지를 자기편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고려 멸망의 후유증이 여전히 상당했고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을 염려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챙기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전직 임금인 아버지가 자기를 불신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 반대파들이 정변을 일으키기도 그만큼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내놓은 절충안 중 하나가 한양 재천도 혹은 한양 환도였다.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자고 이방원을 압박했고 이는 이방원이 1405년에 한양으로 환도하는 원인이 됐다.
 
그런데 한양으로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꺼림칙해 한 것이 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참극을 일으킨 현장인 경복궁이 바로 그곳이다. 신하들은 그곳으로 가시자고 했지만, 이방원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경복궁을 기피한 이유는 한양 환도 6년 뒤의 언급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태종 11년 10월 4일자(1411년 10월 21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경복궁은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역술가가 말했다', '무인년의 일이 일어난 곳이라서 차마 들어갈 수 없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난 곳이라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법궁은 경복궁인데도 창덕궁이 실질적 법궁 기능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방원을 계승하는 역대 임금들이 이방원의 꺼림칙함을 대대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잔인한 행동을 많이 했다. 당대의 거물급 지식인이자 정치인인 정몽주와 정도전을 무참히 살해하고,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동복형제를 유배보냈다. 또 아버지 자리까지 빼앗았다.
 
동시에 그는 여린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 잔인한 듯하면서도 여린 모습은 <태종 이방원>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이방원은 꺼림칙하다며 한양을 버리고 떠났다가 아버지의 압력을 못 이기고 한양으로 환도하더니 무섭다면서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윤리적 타락과 정통성 결여를 상기시키는 기억들이 그곳에만 가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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