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시작된 1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신영균 배우

1962년 시작된 1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신영균 배우 ⓒ 국가기록원(문체부)

 
1990년대 들어 세력을 확대한 한국 영화운동이 기존 주류였던 충무로 구체제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계기는 대종상이었다.
 
기획영화를 통해 충무로의 신예로 부상한 영화운동은 차별화된 작품으로 흥행에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존재감을 확대해 간다. 오랜 시간 기득권을 갖고 있던 충무로 구체제는 영화운동의 성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일정 부분 견제심리도 작용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도전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충무로의 새로운 세대의 성장은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었고, 이는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충무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세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보니 충무로 구체제는 젊은 세대가 기존 틀을 인정하고 존중하길 원했으나, 한국영화를 바꾸고 싶은 변화의 욕구가 강했던 젊은 영화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영화운동이 성장하면서 두 세력이 맞부딪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 전선으로 작용한 것이 1990년대 대종상이었다. 대종상은 충무로 구체제 입장에서 낡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도구였다. 반면 영화운동 진영은 여기에 균열을 내고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이 차이가 충돌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신구세대의 충돌은 치열한 다툼을 거쳐 1990년대 충무로 구체제의 입지를 점차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2000년 초반 이후 영화운동의 충무로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대종상이 그 역할을 한 것이었다.
 
대종상 논란을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96년 34회 대종상영화제였다. 김호선 감독 <애니깽>이 수상하면서 파문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논란이 됐던 행사가 1994년 32회 대종상이었다. 1996년은 1994년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종상이 갖는 역사와 의미 가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종상의 출발은 1959년과 1960년 당시 문교부의 우수국산영화상 제도를 공보부가 이관받아 1962년 11월 2일 1회 대종상영화제를 시작한 것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군사독재가 영화법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하던 시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예총과 한국영화인협회 등으로 이관돼 진행되던 대종상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영화부문에 흡수돼 8회(1969년)와 9회(1970년)는 열리지 못했고, 10회 이후 영화진흥조합, 문공부, 영화진흥공사가 15년간 주도해 오다가 1986년에 이르러서 당시 영화인협회(현 영화인총연합회)가 주도하게 된다.
 
대종상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최석규(전 시나리오작가협회 부회장)는 1994년 대종상 백서에서 "영화제 개최 예산을 국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 자율성에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지난 시간의 대종상을 평가했다.
 
실제로 대종상은 영화인협회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정부 기관의 입김이 강했다. 정진우 감독은 "작품상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가정보원), 감독상은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배우상은 치안본부(현 경찰청) 등에서 개입해 결정했을 정도로 실세 권력기관들의 입김이 강했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1986년 이후 영화진흥공사에서 주관하던 대종상이 영화인협회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외부 개입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게 오랜 관행이 되면서 충무로 구체제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만 영화운동을 기반으로 한 충무로의 새로운 세대들은 구습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는 과정에서 안 좋은 관행들이 되풀이되는 것에 문제의식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관습을 유지하려는 충무로 구체제와 개혁을 원하는 새로운 세력의 갈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대종상 실무 책임 이정하와 김혜준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 KBS 화면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김혜준 전 영진위 사무국장(오른쪽)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김혜준 전 영진위 사무국장(오른쪽) ⓒ 김혜준 제공

 
1994년 32회 대종상을 주목할 이유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피로 등장한 젊은 영화인들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신구세대의 갈등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1994년 대종상은 1993년 12월 영화인협회 내부에 대종상 사무국이 꾸려지면서 시작된다.
 
당시 사무국장이 최석규(전 시나리오작가협회 부대표)였고, 기획홍보 담당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행정 담당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이었다.
 
이정하와 김혜준은 1991년 해소된 민족영화연구소 출신으로 충무로에서 인정받던 정책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이 충무로 구체제의 본산 격인 영화인협회에서 업무를 시작한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물론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이정하가 제도권의 상징이었던 충무로와 연대를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운동 기조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운동으로서 영화를 중시하며 이론과 정책에 탁월한 역량을 갖춘 두 사람이 대종상 실무를 맡았다는 것은 특별했다.
 
김혜준에 따르면 형식적으로는 최석규가 대종상 사무국장이었지만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것은 이정하였다. 이정하와 김혜준은 영화인협회 기획조사실에 속해 있었는데, 이 조직이 다름 아닌 스크린쿼터감시단이었다. 재정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감시단과 대종상 일을 병행한 것이다.
 
영화인협회 안에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시작하기 전 진보정당에서 활동했던 김혜준은 민영연 해소 이후 대종상 사무국 업무를 맡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11월 10일 진보정당인 민중당이 창당하던 과정에서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연대와 참여를 결의했다. 홍보활동이 필요한 영상작업을 돕는 방식으로 적극 연대하면서 정책 쪽 작업도 함께 하려 했었다. 연결고리는 장기표와 이효인이었다. 민영연이 전태일 영화를 제작하려던 생각이 있기도 해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때 가장 먼저 병원으로 달려가 대학생 친구를 자임했던 장기표와 깊이 교류하고 있었고, 당시 장기표는 민중당의 주축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민중당 활동에 참여한 것은 나뿐이었다. 민족영화연구소 활동과 병행하면서 이재오가 의장이었던 서울민중연합에서 잠시 사무처장 등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실제 당에서 맡은 업무는 민중당 사무처 재정국 부국장이었다. 당 운영비를 마련하고 집행하는 역할로, 후원회 관리와 함께 북한 술과 대량 주문 연하장을 팔거나 논란거리였던 가수 민혜경 힐튼호텔 콘서트 등의 재정사업을 진행했다."

 
진보정당을 표방했던 민중당은 1992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시 정당법에 따라 정당 존립에 필요한 2%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면서 해산했다. 고 김낙중 대표 등 민중당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이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가 발표한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도 영향이 있었다.
 
김혜준은 "당 해산 이후 임권택 감독과 이효인(전 영상자료원장. 경희대 교수) 등이 공동출자에 참여했던 타블로이드판 영화매체 <영화저널>의 관리부장으로 있다가 영화인 출자자들이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다시 스크린쿼터감시단으로 와서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정하가 책임을 맡아 막 스크린쿼터감시단을 출범시키던 참이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긴 것이고, 당시 스크린쿼터감시단이 영화법 폐지와 영화진흥법 제정 준비 같은 영화인협회 기획조사실 업무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대종상 관련 업무를 병행했다"고 설명했다.
 
유동훈과 정지영의 연대
 
여기서 당시 유동훈 이사장(작고. 제작자)은 왜 영화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들을 끌어들였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김혜준은 "유동훈 이사장과 당시 영화운동 진영을 대표했던 정지영 감독의 동상이몽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유추했다.
 
이어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원했던 정지영(감독)의 생각과 적절한(?) 수준의 영화인협회 개혁을 원했던 유동훈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면서 "스크린쿼터감시단의 운영비를 따로 조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영화인협회를 통해서 급여 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활동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유동훈 전 영화인협회 이사장(작고)과 정지영 감독

유동훈 전 영화인협회 이사장(작고)과 정지영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당시 정지영(감독)은 1987년 6월항쟁 직전 영화인 시국선언을 주도한 이후 사회성 짙은 <남부군> <하얀전쟁> 등을 연출하며 영화운동 진영의 좌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충무로에서 역량을 인정받는 감독으로 젊은 영화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맏형이기도 했다.
 
정지영은 "당시 유동훈 이사장이 연대제안을 했던 것이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동훈 이사장이 충무로 구체제의 하수인이었으나, 세상이 변하는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영화인들에게 자기편이 돼 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다소 약은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기존 구체제 영화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다만 정지영은 "유동훈 이사장이 충무로 구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안을 의심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유동훈이 "진정성을 믿어달라"면서 스크린쿼터감시단을 영화인협회 내부에 두겠다는 제안을 먼저 해 왔고, 신뢰가 생겼던 것이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스크린쿼터감시단은 젊은 영화인들이 충무로 구체제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다. 1980년대 후반 미국영화직배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영화운동은 직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스크린쿼터감시 활동을 강화하는데, 유동훈이 이를 당시 충무로의 대표인 영화인 조직 안에서 품은 것이다. 정지영과의 약속대로 유동훈 이사장은 1993년 1월 29일 영화인협회 이사회를 열어 스크린쿼터감시단을 발족한다.
 
정지영은 "비록 구체제 사람이지만 유동훈 이사장과 연대함으로써 영화인협회라는 조직을 영화운동 쪽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손을 맞잡음으로써 극장을 갖고 있던 기존 구체제에 도전장을 내는 의미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혜준은 "유동훈 이사장이 '나를 49%만 믿으라'는 말을 했다"면서 "정치적인 감각도 있고 기존 충무로 구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기존 체제에 함몰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1992년 겨울 나름의 조직쇄신을 단행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특히 "당시 삼성문화재단에서 대종상 후원자로 나선 상태였으므로 유동훈 이사장이 기부금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정한 수준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차원의 조치로서 영화정책적인 부분과 함께 대종상 기획 운영까지 맡긴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삼성이 대종상을 후원한 것에 대해 1994년 삼성전자에 근무하며 1회 서울단편영화제를 기획했던 김은영(영화제작자. 추계예대 교수)은 "당시 삼성문화재단 손기상 상무가 영화에 조예가 깊어서 대종상을 조건 없이 후원해 도와준 것이었다"며 "이후 삼성전자·드림박스·제일기획 등으로 분산돼 있던 업무가 1995년 삼성영상사업단으로 모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하와 김혜준은 1993년 영화인협회 업무와 대종상 관련 실무까지 맡으면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 사실 충무로 구체제 역시 이들의 역량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정하는 1988년 외국영화직배반대 투쟁 당시 전면에 섰을 만큼 실천과 이론에 탁월했고, 김혜준 역시 민족영화연구소 활동 이후 영화법 개정 문제 등 현안 대응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이정하나 김혜준이 상당히 똑똑했고 정책적인 면에서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다"라며 "갈등도 있었으나 한국영화의 인재로 인정한다"고 평가했다.
 
시기적으로 스크린쿼터감시단을 발족을 통해 유동훈-정지영 연대가 형성됐던 1993년은 노태우를 끝으로 기나긴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표방한 출범하던 때였다. 3당 야합 정권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나, 공안통치를 자행하던 군사독재시절이 끝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유화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계속됐으나 <파업전야>를 제작한 이용배 장산곶매 대표에게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났을 만큼 경직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언경(감독) 손주연(프로듀서) 김영(프로듀서) 등의 주도 아래 최초의 여성영화제인 페미니즘필름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등 영화운동의 활동 폭이 제작 분야를 넘어 다른 방향으로도 두드러지고 있었다.
 
정부의 스크린쿼터축소 방침에 영화계의 반발도 거세게 일었던 시기기도 했다. 1993년 10월 한국영화 제작 편수 부족을 이유로 문화체육부 이민섭 장관이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쿼터 20일 단축 조정 고시를 하자 정지영 감독을 운영위원장으로 한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가 가동됐다.
 
영화계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한 문체부가 사태 수습 차원으로 영화계가 요구한 대규모 토론회를 수용하면서 11월 30일부터 1994년 1월 20일까지 영상산업진흥법 제정 토론회가 세 차례에 걸쳐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서 개최되기도 했다.
 
김혜준은 "1993년은 특히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미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쥬라기 공원>과 <제르미날>의 맞대결로 상징되는 문화전쟁이 벌어지던 때였다"며 "한국 영화계로서는 문화체육부의 월권적인 스크린쿼터 20일 재량 단축 조치에 맞서던 비상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대종상 업무를 담당하기는 했으나 정책대응 업무가 훨씬 크고 많은 상황이었다"고 덧붙였다.
 
젊은 세대 품었던 대종상
 
32회 대종상은 이정하와 김혜준이 실무를 담당하면서 영화운동의 주축들이 대거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특징적이었다. 예심과 본심을 합해 심사위원 절반 가까이가 개혁적 젊은 영화인들이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구성이었고, 구체제 중심을 탈피한 대종상의 신선한 변화였다.
 
여기에도 유동훈 이사장이 역할이 있었다. 정지영은 "대종상 심사위원 선정 때문에 유동훈 이사장이 충무로 구체제 윗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994년 32회 대종상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용관, 주진숙, 강한섭

1994년 32회 대종상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용관, 주진숙, 강한섭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예심 심사위원 25인에 여성영화운동의 시초였던 카이두의 한옥희(감독. 평론가)를 비롯해 이충직(전 영진위원장), 이춘연(작고, 영화인회의 이사장), 이효인(전 영상자료원장), 김지석(작고, 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영진(명지대 교수, 전 영진위원장), 정재형(동국대 교수), 조선희(전 영상자료원장) 등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48세였던 한옥희와 43세였던 이춘연을 제외하면 대부분 30대였고, 김영진이 30세로 가장 어렸다.
 
본선 심사위원에는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강한섭(작고, 서울예대 교수), 주진숙(전 한국영상자료원장) 3인이 참여했다. 한국영화 개혁을 외치던 젊은 영화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이었으나, 충무로 구체제로서는 갑작스럽게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대종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것이 못마땅할 법도 했다.
 
당시 젊은 평론가들은 날카로운 시선과 깊이 있는 비평을 통해 한국영화의 문제를 지적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학계에서 활동하며 영화운동의 이론적 터전을 다졌고, <영화언어> 등 계간잡지를 발행하거나 언론에 평론을 기고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1990년대 충무로 구체제는 평론 등 학계 인사들을 따로 구분하는 태도를 보였다. 기득권자로서 똑같은 영화인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점도 있었다. 그래서 구분했던 게 '영화인'과 '영화관계자'였다. 충무로 구체제 쪽 심사위원들은 영화인으로 규정했고, 그 외 젊은 평론가와 영화 관련 기관에서 선정된 심사위원들은 영화관계자로 나눈 것이었다.
 
기준은 제작 현장이었다. 영화에서 현장 중심주의는 사실 지금도 우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를 통해 영화인의 정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젊은 비평가들을 비주류 취급했던 것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현장을 알아야 영화인이지 제작을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영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냐"며 "감독 제작자 촬영 스태프 등 현장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이 영화인이고 그 외 평론가 등은 영화관계자일 뿐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당시 심사위원 구성은 영화인과 영화관계자 비율이 균등했다. 예심이 영화인 12명과 영화관계자 13명으로 구성됐다면, 본심은 영화인 6명과 영화관계자 5인이었다. 본심 심사위원 중 영화관계자는 이용관, 주진숙 강한섭 외에 양성일 공연윤리위원회 사무국장과 이덕상 영화진흥공사 진흥부장이었다. 주로 이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로 젊은 축이었다.
 
반면 충무로 구체제가 중심이 된 영화인은 장일호 감독(심사위원장), 윤일봉 배우, 문상훈 시나리오작가, 양영길 촬영감독, 정윤주 영화음악, 김석진 영화조명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주로 50대 후반에서 60대~70대의 한국영화 원로 축에 속했다.
 
신구세대 충돌
 
1994년 대종상은 당시 한국영화인협회라는 영화인 대표조직 안에서 영화운동 세력과 충무로 구체제가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수상자를 논의한 시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신구세대가 본격 충돌하는 장이 됐다. 두 세력이 공식적으로 맞부딪힌 전선이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심사과정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신구세대의 의견이 달라 대립 양상을 나타낸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충무로 헤게모니 다툼의 신호탄이었다. 신구세대의 인식 차이가 컷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영화운동 진영 시각에서 충무로 구체제는 낡은 인식에 사로잡힌 개혁의 대상이었다. 반면 충무로 구체제 시각에서는 운동권 세력이었던 젊은 세대의 도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대치 전선이 형성된 것은 본심 심사과정에서였다.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길이 개입한다고 느낀 젊은 평론가들이 충무로 구체제의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만큼 양측의 인식 차이는 컸다. 젊은 평론가들에게 구시대적 사고와 관행대로 행동하는 충무로 구체제의 방식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32회 대종상 시상식 당일인 1994년 4월 2일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3차 회의는 신구세대의 대립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자리였다. 최종 수상작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시상식 직전까지 무려 9시간 정도 회의가 이어졌을 만큼 놓고 진통이 계속됐다. 예심과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심각한 대립이었다.
 
심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지적한 것은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었다. 부산 경성대교수로 재직하며 부산영화운동의 기틀을 다졌던 이용관은 1994년 말 중앙대 교수로 옮겨왔는데, 충무로 구체제와 충돌과정에서 가장 전면에 선 것이다.
 
당시 수상작 선정을 앞두고 균열이 드러난 것은, 남녀조연상, 기획상, 녹음상, 음악상, 편집상 등을 선정한 이후 점심식사 자리에서였다. 여기서 이용관 강한섭 주진숙 3인이 심사위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지금까지 심사가 명백히 특정 영화를 둘러싸고 담합의 혐의가 짙고, 대체토론에서 의견집약과 반하는 기표결과가 나왔다"는 이유였다. 심사과정에서 참았던 불만이 폭발하며 심사과정 전반에 불신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항의한 것이다.
 
 영화 <만무방>

영화 <만무방> ⓒ 대종필름

 
이들이 문제 삼은 특정 영화는 <만무방>이었다. 엄종선 감독이 연출한 <만무방>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낮에는 태극기를, 밤에는 인공기를 걸면서 생존을 위해 애쓰던 이 초가에 노인과 청년이 차례로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홀로 초가를 지키고 있던 주인 여자(윤정희)가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처음에는 노인(장동휘)이 초가와 주인 여자를 차지했으나, 엄동설한 추위에 청년이 땔감을 구해온 후 주인 여자가 땔감과 젊은 남자의 육체에 흔들리면서 세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줄거리다. 
 
당시 <만무방>은 32회 대종상 5개 부문을 수상했다. 그렇지만 심사과정에서 젊은 평론가 3인의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며 분명한 의견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에 오른 부문마다 표결을 통해 수상이 이뤄지자, 집단 사퇴 의사를 표명하며 제동을 건 것이었다.

시상식을 몇 시간 앞두고 갑작스러운 심사위원들의 집단 사퇴 표명은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당시 유동훈 집행위원장과 대종상 사무국은 "심사가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시점이니 최선을 다해 논리적 합리적 의사표출로 나머지 심사에 임하자"며 적극적인 설득을 기울인다.
 
경고성 사퇴 선언이었기에 3인의 평론가는 설득을 받아들여 다시 심사에 복귀했으나 이용관은 작정한 듯 심사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는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다. 어떤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이용관이 비판한 심사 문제는 수상작 선정 결과가 표결을 통해 계속 11:0이나 6:5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해 이렇게 유감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진행해온 것을 보면 대체토론이라기보다는 그냥 기표방식에 따른 것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좀 활발한 토론을 통해 좋은 의견을 모으자는 것이 이 대체토론의 취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를 보면 그것이 안 됐다는 것이고, 지금 메모하신 것을 보면 6:5 아니면 11:0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표수가 나타나는 것은 자칫하면 담합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상 <만무방>의 경우 먼저 제가 제의를 해서 토론을 통해 결정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절 반구가 없으셨다는 거죠. 그런데 방금 끝난 편집상의 경우를 보면 저도 학교에서 편집 가르치는 입장에서 충분히 말씀드렸고, 이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게 드러났다는 거죠. 더 나아가 6:5 아니면 11:0 숫자가 보여주듯 이것은 명백한 담합을 의미합니다."

 
강한섭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편집상 부문에 있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발언했는데, 뚜렷한 반박 없이 토론이 종결된 다음 투표에 들어가서 <만무방>의 단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 결과가 <만무방>이 되는, 그런 점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이런 회의와 심사가 어딨나?"
 
 한국영화음악의 선구자였던 정윤주 작곡가.

한국영화음악의 선구자였던 정윤주 작곡가.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이에 대해 정윤주 심사위원이 발끈한다. 젊은 평론가들의 비판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정윤주 심사위원은 윤이상 작곡가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작곡한 영화음악이 298편에 달할 만큼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음악의 장인이었다.
 
"이것 참 내··· 이상한 질문 같은데, 투표가 6:5가 나오던지 4:5가 나오던지 11명이 투표해 11표가 나왔으면 다행이지. 나도 음악전문가 입장에서 음악상을 <휘모리>로 주고 싶었지만 다른 작품이 선정되니 승복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자기 개인 주장이 관철 안 되면 투표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하면 이거 뭐 얘기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이용관의 재반박이 나오면서 정윤주와 공방이 전개됐다.
 
"지금까지 투표 결과가 6:5, 6:5, 11:0, 6:5, 11:0. 11:0입니다. 7:4나 9:2 정도가 나와도..."
"그렇게 나오기 마련이에요! 남의 의사를 표명한 것을 갖다가 그렇게 말하면 인신공격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에 우선 대답을 해주십시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6표는 고정돼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되나! 아이고 참!"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각자가 의사표시를 한 건데!"
"그 의사표시가 어떻게 5명, 6명으로 똑같이 나눠질 수 있냐는 겁니다. 이런 회의가 어딨고, 이런 심사가 어디 있으며 이런 토론이 어디 있냐는 겁니다!"

 
논쟁이 이어지자 유동훈 영화인협회 이사장이 끼어들었고, 예심 결과를 알려달라는 젊은 평론가들의 요청을 수용하게 된다. 각 작품이 얻은 표수를 발표한 후 다른 심사위원들이 발언이 이어지면서 진정국면으로 흐르지만, 긴장은 내내 풀리지 않았다.
 
이날 사퇴 선언을 통해 심사과정의 문제를 경고했던 이용관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심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토론을 하고 기표를 할 의미가 없다"고 했고, 강한섭 역시 "투표를 해서 이기려면 대체토론에서 대세를 휘어잡아야 하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에서만 이기는 것은 심사를 사시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동조했다.
 
이에 충무로 구체제 쪽 배우 윤일봉 심사위원은 "내가 4개 부문 수상에 던진 표는 교수들과 똑같았다면서 6표로 지적한 게 영화인 쪽으로 생각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자 대종상 사무국 이정하가 끼어들어 평론가들의 심사 의구심에 힘을 싣는다.
 
"예심에서 1등으로 올라온 것은 본심에서 떨어진 것이 많지만 <만무방>은 예심에서 1등으로 올라온 것은 백발백중 다됐습니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초점은 이거입니다. 지금 보시면 알지만, 일단 <만무방>이 후보로 올라간 것은 계속 선정되고 있습니다. 해당자가 없었던 조연남우만 빼고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하게도 예심 결과와 맞춰보면 그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심사위원장 장일호 감독이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진행하기로 약속하면서 다시 심사가 진행된다. 대종상 백서는 당시 안팎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대종상 최종토론은 9시간을 끌었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한 평가 때문이었다. <만무방>이 그것이다. 영화의 작품성을 둘러싸고 심사위원들은 두 편으로 확연하게 갈렸다. 그것이 가장 집약된 부분이 감독상 선정과정이었다.'
 
김종필의 외압
 
심사과정 외적으로 신상옥 감독의 <증발> 역시 당시 대종상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증발>은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했던 김형욱 실종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내용은 전 국가보안부 장관 박진욱이 충성경쟁의 희생양이 되어 미국에서 반국가행위 및 회고록 집필 사건으로 납치되고, 대통령인 한성태는 박진욱을 48시간 안에 회유시킬 것을 지시해 옛 동료였던 이상규는 특수감방으로 연행된 박진욱에게 회고록 집필을 중지토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진욱이 부패한 역사를 통감하고 참회하는 의미로 회고록을 쓸 수밖에 없다고 거절하면서 지난 18년을 회고하는 줄거리로,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는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

신상옥 감독 ⓒ 국가기록원

 
대종상 백서는 당시 안팎의 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4월 2일 오전 10시 각 부문 수상자 결정을 위한 본심 최종회의가 열리기 직전 대종상 사무국에는 한 장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합동영화사에서 신상옥 감독이 <증발>을 출품 철회하겠다는 공문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오전 11시경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증발>에 대한 외압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는 본심 회의가 진행 중이던 시점으로 시상식을 대여섯 시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미개봉작 문제와 예심에 대한 불만 표출 등 대종상 전반의 운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던 시점이었다.'
 
여기서 신상옥 감독의 <증발>과 관련된 논란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시 통제와 억압의 시대를 거쳐온 대종상의 안팎 상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일부분 드러난 것으로 대종상에 정치 권력이 개입했다는 의구심을 키웠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기였으나 3당 합당으로 생겨난 민자당을 통해 군사독재 세력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박정희 독재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의 정치적 힘은 여전했다. 박정희 독재에서 벌어진 의혹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대종상에 오르자 외압 논란이 불거진 이유였다.
 
신상옥 감독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출품 철회를 밝히면서 논란이 커지자 심사위원 중 배우 윤일봉이 "참고 발언을 하겠다"고 나서 외압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밝히게 된다.
 
"대종상 때문에 김종필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었고, 한달반 전에 최무룡 배우와 배우협회 사무국장을 통해 '영화인들이 너무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전달된) 것이다. (최무룡 배우가) '김종필과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영화인들을 많이 보호해주고 그러다 보니 우리 연기자들하고 다른 정치인들보다 직업을 떠나서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건 도대체 사실인 것을 묘사했으면 괜찮은데, 없는 것까지 이렇게 해서 나쁘게 만들었으나 대단히 난 섭섭하다'는 입장을 들었다."
 
윤일봉은 또한 "김종필씨가 기분이 좋지 않았고,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정치적 묘사할 때는 정확히 해야 할 텐데, 뭐 그런 뜻으로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락은 없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무룡 배우는 1988년 총선에서 김종필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기에 김종필과 가까운 인사였다. 외부 압박설이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이때 강한섭은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나 들은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김종필 개입설과 안기부 개입설, 가짜 안기부 개입설 등이 있다. 이런 혼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발언했다.
 
 신상옥 감독 <증발>

신상옥 감독 <증발> ⓒ 합동영화사

 
다만 대종상 사무국은 백서를 통해 <증발> 논란을 이렇게 정리했다.
 
'예심이 끝난 뒤 <증발>에 관한 이런저런 루머는 집행위원회와 사무국의 긴장을 부를 만큼 심각한 상태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대체로 세 종류의 것이었다.
 
첫째 <증발>이 본심에서 수상하지 못하도록 모 정치인과 기관이 압력을 넣었다는 외압설, 둘째 집행위원장이 <증발> 출품사와의 사업상 관계 때문에 주요한 상을 줄 것이라는 예정설, 셋째 <증발>에 대한 외압은 사실이 아니며 출품사가 증발을 떨어뜨리기 위해 퍼트렸다는 가짜 외압설이었다.
 
하지만 <증발>은 예심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다. 이 영화는 예심에서 조연남우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 등 4개 부문에 올랐으나 1등으로 올라간 것은 조연남우 밖에 없다. 그러니 예심결과를 외압설과 연관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심 실사 과정에서 <증발>의 실사 심사가 끝났을 때 예심위원들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독상 격론
 
<증발> 외압설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나, 갈등의 근원이 된 <만무방>은 그렇지 않았다. 수상작으로 선정될 때마다 격론이 오가면서 찬반대립이 심할 정도로 신구세대 충돌의 발화점이었다.
 
감독상에 앞서 여우주연상 수상자 선정과정에서도 이견이 많이 표출됐다. 강한섭은 "작품의 격조가 오르지 못했다", 주진숙은 "작품성이 굉장히 취약하다" 이용관은 "격이 떨어지는 작품이다"라며 매우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반면 윤일봉 배우는 "<만무방>이 나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옹호했다. 토론 끝에 표결에 부쳐졌고, 윤정희 배우가 6표를 얻으며, 4표를 얻은 <나는 소망한다> 최진실을 누르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2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으로 발표되는 순간 동료 배우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윤정희 배우

32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으로 발표되는 순간 동료 배우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윤정희 배우 ⓒ KBS 화면

 
<만무방>의 잇단 수상작 결정은 감독상 선정과정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장시간 격론을 통해 양측의 대립이 심화한 것은 더는 충무로 구체제에 물러설 수 없다는 평론가들의 결연함이 작용한 것이었다. 처음의 의구심이 갈수록 확신으로 변하다 보니 담합 심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영화상에서 작품상 다음으로 비중있게 평가되는 것이 감독상이다 보니 수상자 선정을 놓고 팽팽한 대립이 이어진 것이다. 충무로 구체제는 <만무방>을 수상자로 결정해 화룡점정을 찍으려고 했고, 영화운동을 대표하는 평론가들은 저지 작전에 돌입한다.
 
당시 감독상 후보작은 <만무방> 외에 신상옥 감독 <증발>,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 싶다>. 장선우 감독 <화엄경>, 박철수 감독 <우리 시대의 사랑> 등 5편이었다.
 
당시 평론가 심사위원 3인은 선호 작품이 일치하지 않았다. 주진숙은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에 긍정적이었고, 이용관과 강한섭은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토론은 주로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만무방>을 중심으로 가고 있었으나,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자 주진숙은 <화엄경>을 상기시키며 논의가 이어졌다.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만무방>은 둘 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지향하는 바는 달랐는데, 심사위원들의 시선 차이도 컸다.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문재구(문성근)가 자신을 고향 섬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문덕배의 상여를 배에 싣고 섬을 찾아오지만, 섬에 다가올수록 섬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지고 배를 섬에 대지도 못하게 하면서, 재구의 친구 김철(안성기)이 혼자 섬에 도착해 지난날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시기 발생한 마을 주민들의 상처를 그린 영화였다.
 
강한섭은 두 작품을 비교하며 <만무방>에 대해 "<변강쇠>로 대중에게 알려진 엄종선 감독이 이번에 작가적인 시도를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고 싶으나, 민족분단을 남과 여로 풀어보겠다는 것이 중반 이후부터는 좀 풀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만무방>은 분단의 비극 전쟁의 상처를 원초적 본능으로 풀었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상처를 민족의 신화로 풀었다"고 덧붙였다.
 
<만무방>을 옹호했던 문상훈(전 시나리오작가협회 대표) 심사위원은 "연출자가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전쟁의 사각지대에서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라고 긍정했고, 심사위원장 장일호 감독 역시 "우리들의 아픔이 들어 있다. 라스트를 테마로 잡았다는 것이 높이 평가해 줄 수 있다"고 호평했다.
 
주진숙은 "<그 섬에 가고 싶다>나 <만무방> 둘 다 똑같이 6.25로 인해 어떤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그린 것인데, 감독이 어떻게 접근했느냐에 따라 깊이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며 "<만무방>은 그런 것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좀 애매모호하게 처리하고 우리가 풀 수 없는 그런 차원으로 이끌어 간 것 같다. 섬과 여성 네 명을 합쳐 좀더 다른 해석을 내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토론 진행 과정에서 이용관과 주진숙은 <만무방> 제외에 힘을 쏟았다. 이용관은 "대종상이 명예롭게 그야말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면서 그 취지에 부합할 수 있는 작품이 되려면 적어도 <화엄경>이나 <그 섬에 가고 싶다>에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진숙은 "영화를 평가하는 객관성은 있는 것 같다면서 <만무방>은 연출력에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심사위원 사퇴 배수진
 
 1994년 4월 2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32회 대종상 시상식

1994년 4월 2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32회 대종상 시상식 ⓒ KBS 화면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가운데 TV 중계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사장소는 행사장인 국립극장으로 옮겨서 논의가 이어졌으나 행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 심사위원장 장일호 감독이 "감독상 후보를 <화엄경>과 <만무방>으로 압축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용관이 반발했다. "<만무방> 이야기가 나오는 게 이해를 못 하겠고 <그 섬에 가고 싶다>와 <화엄경>으로 압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격론이 이어진 끝에 최종적으로 세 편의 영화를 놓고 투표에 들어갔다. 결과는 <화엄경> 1표, <만무방> 5표, <그 섬에 가고 싶다> 5표였다. <화엄경> 1표는 계속되는 6:5 문제 제기에 부담을 느낀 듯 심사위원장 장일호 감독이 던진 표였다.
 
그러나 <만무방>과 <그 섬에 가고싶다>가 5:5 동률이 확인되는 순간, 장일호 감독은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최종적으로 <만무방>을 선택하면서 감독상 수상작이 결정된 것이다. 젊은 평론가들의 격렬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숫자로 밀어붙인 충무로 구체제의 뜻대로 귀결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 또 한 번 이용관이 판을 뒤집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곧바로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하더니 단호한 어조로 심사위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지금까지 가능한 대종상의 명예를 위해 최대한 노력을 했습니다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제가 생각하는 영화관점이나 이런 것을 생각해서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이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심사위원을 사퇴하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종상 사무국 이정하도 나서 우려를 표명하며 이용관에게 힘을 실었다.
 
"정치적인 사태에 휘말릴 경우 대종상이 개판이 된다. 1부 끝 순서 두 개의 시상이 <만무방>이고 2부 끝 순서 들어가면 두 개가 또 <만무방>이 나오는데 시상식이 제대로 될 것 같습니까?"
 
<만무방>은 여우주연상, 기획상, 편집상, 미술상, 녹음상 수상을 확정한 상태에서 감독상까지 포함하면 6개 부문 수상이었다. 강한섭도 "심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대종상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수렁에 빠뜨린 상태로 가면 저도 이용관 위원과 같이 사퇴하겠다"면서 배수의 진을 친다.
 
순간 충무로 구체제 쪽 심사위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젊은 평론가들의 반대를 뚫고 표결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또다시 심사위원 사퇴를 선언하며 결기를 세우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 싶다>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 싶다> ⓒ 박광수 필름

 
이때 양쪽을 살피던 유동훈 이사장이 절충안을 제시하게 된다. 차리라 감독상 수상자를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쪽도 편들어 주지 못할 상황에서 낸 고육책이었다. 원로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찬성이었고, 윤일봉 배우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수상자 없음'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심사위원장인 장일호 감독도 동조하며 본심을 드러냈다. 그는 "<화엄경>을 썼으나 다른 분들이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썼기 때문에 나는 찬성할 수 없는 영화여서 <만무방>을 선택했다"며 "감독상을 해당 없음으로 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충무로 구체제의 시선에 있어 절대 상을 줄 수 없는 영화였던 셈이다. 분단문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그린 박광수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거부됐고, 의상상 수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감독상 수상작을 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강한섭은 장일호 심사위원장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린다"며 "제발 대종상을 수렁에서 꺼내 달라"고 호소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윤일봉 심사위원이 한 발 빼는 자세를 취하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작품상만을 남겨 놓고 있는데, 심사위원이 사퇴하고 엉망진창이 됐을 때를 생각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게 좋겠다"고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최종 절충안을 내놓은 것은 강한섭이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지지했던 분들은 <화엄경>을 같이 지지했다"며 다시 결론을 내자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감독상 해당 없음과 재투표를 놓고 의견을 물은 결과 심사위원 8인이 재투표에 동의하면서 <화엄경>과 <만무방>을 놓고 재투표에 들어가게 된다.
 
결과는 <화엄경> 7표, <만무방> 4표. 고착화된 6:5 구조가 평론가들의 압박에 깨지면서 장선우(감독)가 감독상 수상자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만무방>의 대립에 <화엄경>이 어부지리를 얻은 모양새가 됐으나, 1994년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상인 알프레트 바우어상 수상작으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정보기관이 개입했던 것
  
 이정국 감독

이정국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영화운동 진영의 <만무방> 수상 저지가 성공을 거두면서 작품상은 수월하게 결정됐다. 감독상이 극심한 진통을 겪은 여파로 인해 감독상 기싸움에 이긴 젊은 평론가들이 작품상 결정을 주도한 덕분이었다. 후보는 <두 여자 이야기>, <만무방>, <휘모리>, <증발>, <화엄경> 5편.
 
강한섭은 "감독과도 관련이 있다"며 "(이정국 감독이) 신인감독상을 탔고,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작품상을 받을 영화"라고 분위기를 띄웠고, 주진숙 역시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은 작품으로 미개봉작이지만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작품"이라고 거든다. 토론 없이 바로 투표에 들어가면서 8표를 얻은 <두 여자 이야기>가 <만무방>(2표)과 <화엄경>(1표)을 제치고 수상작으로 결정된다.
 
당시 대종상 주요 수장작 면면을 보면 남우주연상은 <투캅스>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공동수상했다.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는 당대 흥행 영화였지만 남우주연상 외에는 대종상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32회 대종상은 영화운동 출신들이 처음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이전 대종상과는 달랐다.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첫 상업영화 <부활의 노래>를 만든 이정국 감독이 다음 작품인 <두 여자 이야기>로 신인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며 연출능력을 인정받은 점은 뜻깊었다.
 
 장선우 감독

장선우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장선우 감독은 문화운동을 거쳐 1980년대 초기 충무로로 옮겨온 영화운동의 선배로서 첫 대종상의 감독상 수상이었으나 뒤늦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평론가들이 격렬한 논쟁을 거치며 충무로 구체제의 장벽을 뚫어낸 것 자체가 큰 성과였다.
 
비록 1987년 <칠수와 만수>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으며 영화운동 출신으로 첫 대종상을 받았던 박광수(감독)가 수상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었으나, 수상작 면면은 대종상의 개혁을 충분히 보여준 것이었다.
 
이용관은 "당시 <만무방>은 정보기관이 개입한 것이었다"며, "비슷한 일이 되풀이된 게 <애니깽>을 수상자로 선정한 1996년 대종상이었다"고 회상했다. "1996년 대종상 심사 과정에서 수상작 선정 반발하며 백서 발간을 요구한 것도 1994년의 대종상 경험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32회 대종상 백서는 심사과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 긴 시간을 두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상을 결정한 것은 비록 과정이 험난하긴 했으나 대종상 심사의 성격이 바뀌는 데 있어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원이 진통이 앞으로의 대종상에서 되풀이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1994년 정치적 논란 상황에서 영화운동이 구해낸 대종상은 이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1996년 수상작 논란이 크게 불거진 것은 대종상 침몰의 시작이었다. 감독상에서 밀려난 <만무방> 엄종선 감독은 이듬해 33회 대종상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했다.

대종상은 이후 빈번하게 신구세대 충돌의 격전지가 됐고, 충무로의 보혁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격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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