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볼 만한 공연을 소개해야 한다면, 저마다 서로 다른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명불허전 배우의 연기 때문이라든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이든지, 아니면 손수건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스토리 때문이라든지. 저마다 추천하려는 이유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꼭 봐야할 리스트'에 앞으로 소개할 작품을 올리는 이유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스쳐지나가고 쳐다도 보지 않았던 시니어의 지독한 멜로극이란 소리다. '격정낭만극'이란 부제를 붙인 이 연극의 주인공은 20대 젊은 남녀가 아니라 60대를 훌쩍 넘긴 이들이다. 단순히 나이든 배우들이 주인공이라서 주목하는 게 아니다. 젊은이 못지 않게 시니어의 가슴이 울리는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관객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대다수의 공연장은 러브스토리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티켓을 구매하는 대다수는 20~30대라 그런지, 실제로 60대 이상을 위한 공연은 아예 제작되지 않거나 설령 무대에 오른다 해도 어느 역할에 치중할 뿐 이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젊은 남녀의 그저그런 이야기가 지겹거나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이들의 불꽃같은 사랑이 궁금하다면 이번 공연을 보는 것은 어떨까. 

'감정 거세된 인간'으로 여겨지던 노인들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 부문에 선정된 극단 인어의 <화로>최원석 연출가가 지난 20일 공연을 마친 이후 객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 부문에 선정된 극단 인어의 <화로>최원석 연출가가 지난 20일 공연을 마친 이후 객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필립리

 
"그저 추레하고 완고한 뒷방 늙은이로, 감정이 거세된 인간이죠."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 부문에 선정된 <화로>(2월 19~2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를 제작한 최원석 연출가는 나이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이렇다고 고백했다. 약간은 비하하고, 때론 냉정하게 들리는 이 쓸쓸한 어감 때문에 우울하지만 대부분의 연극이 이런저런 이유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2012년에 극단 인어를 창단한 이후 <빌미>(2019), <불멸의 여자>(2017), <변태>(2014) 등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심도깊게 다뤘던 그가 이번에는 격정낭만극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향후 10년 이내에 한국사회의 25% 이상을 1970년대생 이전의 중장년이 점유할 것이란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펼쳐질 낯선 일상과 노후의 삶에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며, 이제는 이를 계기로 "행복한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던지는 것이 이번 작품의 목표라고 밝혔다. 

두 남녀 사이에 놓인 장벽 때문에 힘든 사랑을 펼쳤던 <타이타닉>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와 같은 이야기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화로>는 시니어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가 사실적으로 열거된다는 점이 다르다. 중년의 끝에 이르러 폭풍처럼 밀어닥친 사랑의 설레임, 유산분배 때문에 재혼을 반대하는 가족,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장애인을 대상으로 성매매에 빠진 여자, 실연의 파탄으로 들이닥친 죽음 등까지.

아마도 시니어가 겪고 있거나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여과 없이 때려넣은 이 작품은 처음부터 시니어를 위한, 시니어에 관한 연극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단순히 어르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섹스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솔직히 반가웠다. 작품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이런 작품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 보인다. 
 
40년 만에 우연히 만난 두 남녀는 보자마자 서로의 첫사랑임을 알아보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각자 홀로 남게된 이들은 남은 인생을 새롭게 보내려 하지만, 유산상속에만 관심이 있는 자식은 이들의 재혼을 반대한다. 어느 날, 상견례 도중 각자의 핸드폰으로 이상한 문자가 전송된다. 여자의 전 애인이 이별에 앙심을 품고 지인에게 전송한 성관계 동영상이다.웹사이트에까지 업로드한 몰카 때문에 남자는 자살을 선택한다.

지난 20일,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이날 객석의 상당 부분은 그동안 연극을 보지 않았던 중년들이 극장을 찾았다. 동년배의 불꽃같은 사랑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이들의 심리를 철저하게 분석한 연출가의 노련함 때문일까. 하지만 이 질문에 최원석 연출가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실제로 예순을 바라보는 그가 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의 삶과 연극의 배경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원래는 70대 노인을 전면으로 내세우려고 했었는데 작품을 거듭하면서 "조금 더 극적인 구성을 위해 60대로 조금 낮춘 것일뿐"이라 설명했다. 어쨌든 중장년의 뜨거운 마음을 담아 "불같은 사랑에 빠진 노인"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화로'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번 작품은 그동안 최 연출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전작들에 비해서 다른 결을 보여준다. 특히, '올해의 공연 베스트7', '대한민국 연극대상', '서울연극인 대상' 등 내로라하는 연극제를 휩쓸었던 지난 몇 년간은 자본주의에서 계급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을 다룬 반면, 이번에는 평범한 노인이 직면한 문제를 몽환적으로 풀어낸 것이 돋보인다. 특히 사회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는 시대상에서 벗어나 작품의 초기 기억단계부터 '통속멜로'를 염두해두고 작품을 제작한 것이 다르다. 즉, 역사와 시대적 관점에서 벗어나 대중의 마음을 건드리는 시도만으로도 이번 작품은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연극은 크게 중장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전반부와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장면을 서사적으로 풀어낸 후반부로 갈린다. 작품은 60대 이후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발성법에서도 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충분히 깔았다. 그리고 초반에 열거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노인들이 처한 문제를 백화점식으로 집중해서 보여준다. 재산을 둘러싼 가족간의 오해, 한 핏줄을 믿지 못해 유전자 검사를 강행하는 가족, 예비 시어머니를 유산을 갈취하기 위한 꽃뱀으로 취급하는 장면,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은 전 애인이 무작위로 동영상을 전송한 디지털 폭력 등 일일드라마에서 봐왔던 막장요소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실, 중년의 욕망이라는 것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요. 저도 내일 모레가 예순인데 줄어들기는 커녕 외로움이 커지거든요(하하). 다만, 많은 작품에서 이것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나이든 사람의 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더럽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그의 마음을 건드린 하나의 포인트는 '사랑에 대한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즉,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후반부를 장식하는 장면처럼 죽음의 세계로 들어선 세대에서 마주한 사랑이 이번 작품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가 죽음 앞에 놓인 사랑에 이토록 목을 매는 특별한 사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극을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를 찾아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채우는 <화로>(연출 최원석)의 스펙타클한 무대장치는 연극의 또다른 볼거리이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채우는 <화로>(연출 최원석)의 스펙타클한 무대장치는 연극의 또다른 볼거리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사선을 넘었던 적이 한 번 있었어요. 8년 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병원에 1년 정도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채소인간'(작품 중 아프고 병들어 병원에 있는 힘 없는 사람들을 채소인간이라 빗대는 대사가 나온다)을 많이 봤거든요. 저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이때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특히, 노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죽어야 할 때가 온다면, 잘 계산해서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을 말이죠." 

<화로>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으로는 역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극사실주의 미술품을 보는 것처럼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디테일하게 묘사됐다. 특히, 배우가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독백으로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은 마치 1960~1970년대 무성영화에서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대해서 최 연출가는 오히려 문장 구조가 요즘 젊은이가 쓰는 어법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이것은 대사가 문학적 구조로 보여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화된 것이라 설명했다.  

연극의 또다른 볼거리는 대극장의 큰 무대를 빼곡히 채우는 스펙타클한 무대장치에 있다. 여기에 뮤지컬 <캣츠>를 떠올리는 장면은 정통파 연극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요소다. 이 장면을 연출한 최씨는 이렇게 말한다.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우리나라의 연극에서는 그동안 사용해오지는 않았던 구조일 뿐이죠. 사실적인 배우들 사이사이에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양이들의 춤사위가 장식됩니다."

여기에 뮤지컬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장면까지 삽입시켜서 연극의 범주를 스스로 뛰어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아파트 10층 높이에서 투신하는 장면에는 덤블링이 동반된 무대장치를 세팅하여 대극장이 허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시도했다. 여기에 두 남녀의 심리적 공황을 극한으로 몰아넣기 위해 고양이의 춤동작을 배치시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에서 벗어나 보다 서사극적 인물들의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연극을 기능적으로 도와주고 빠지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제3자의 위치에서 해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다소 코러스 기능을 했다면 맞을까요." 

노인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120분 안에 몰아놓은 것도 그렇고 연극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 국립극단 배우를 거쳐 작가와 연출가, 대표 등 모든 것을 놓지 않았던 그는 모든 면에서 욕심쟁이로 보인다. 이번 작품 이후에 그는 어떤 커리어로 기억되길 바랄지 궁금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땐 작가로 남고 싶어요. 작품도 그렇고 다른 것도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 결국엔 글이 남으니까요." 

그의 첫 작품은 30대 중반부터 작가의 글을 시작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앞으론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익구조를 창출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것은 그동안 극단 인어가 쌓아왔던 방식과 조금 다른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라는 물음에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마니아층이 보는 연극에서 대중이 즐거운 오락으로 넘어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볼거리가 풍부한 작품이 맞겠네요. 전작들처럼 사람을 때리면서 갈구는 것은 아주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단지 늙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행했던 상황을 재조명하고 싶었던 최원석 연출가. 이것이 나이든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했던 지난날의 속내를 이제는 숨기지 않고 발톱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하다. 

"노인들은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비난을 받아왔어요. 이것은 언제부턴가 금기사항이었어요. 섹스 가지고 떠들면 자식들이 부끄러워 하고 그랬거든요. 이제는 노인들을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던 와중에 이렇게 무대에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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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을 지냈으며,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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