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에픽하이의 정규 10집 파트 2 'Epik High Is Here 下'

그룹 에픽하이의 정규 10집 파트 2 'Epik High Is Here 下' ⓒ (주)아워즈

 
래퍼들이 TV 프로그램에 나오면 '힙합 전사'라는 표현이 남발되던 시절이 있었다. 에픽하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 다섯 살의 나는 그 표현이 참 싫었다.

"랩마다 담고 있는 정서가 다른데 왜 무조건 '전사'가 되어야 하는걸까?
방송국은 힙합을 몰라"


그 시절 지켜본 에픽하이는 하나의 수식어로 가둘 수 없는 입체적인 존재였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에픽하이는 3인조 개그팀처럼 보였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언제나 '서사적인 높음'을 들려주고자 고민했다. 구도자와 '동네 형'의 시점을 오가는 타블로의 리릭시즘, 팝적인 감각, 미쓰라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 힙합의 멋을 추구하는 투컷의 프로듀싱은 완벽한 팀플레이를 이뤘다.

많은 90년대생이 그랬듯, 에픽하이와 내가 함께 한 추억은 많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집에 가서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를 들으며 킥킥대기도 했고, 중1 수학여행 장기자랑에 나가서 에픽하이의 '혼(2007)'을 불렀다가 참패를 겪었다. 배고픈 시절의 에픽하이가 부른 'Lesson 2'와 'My Ghetto'를 들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불태우기도 했다.세뱃돈을 모아 에픽하이의 앨범을 샀다. 모든 앨범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들의 음악은 곁에 있었다. '타진요' 사태의 긴 터널을 지나 타블로가 꽃피웠던 <열꽃>(2011), 군 복무 중 CDP로 들었던 <신발장>(2014)의 감동도 기억에 남는다.

2022년인 지금도, 에픽하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발표한 10집의 첫 번째 파트 'EPIK HIGH IS HERE 上'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 한복판에 걸렸다. RM과 쿤디판다, 릴보이 등 현재의 뮤지션들이 에픽하이의 자손을 자처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페스티벌 중 하나인 코첼라의 두 번째 출연도 확정되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레거시(Legacy)를 세어 보기에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 에픽하이가 있다
 
 에픽하이(왼쪽에서부터 투컷, 미쓰라, 타블로)

에픽하이(왼쪽에서부터 투컷, 미쓰라, 타블로) ⓒ (주)아워즈

 
밸런타인데이였던 지난 2월 14일, 'Epik High Is Here' 파트 2가 발매되면서 에픽하이의 10집이 완성되었다. 새로움보다는 안정감을 추구했다. <신발장> <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 > 등 에픽하이 후반기 앨범들의 공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씩씩한 붐뱁 오프닝, 핫한 래퍼들이 참여한 단체곡, 에픽하이표 랩 발라드도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있다. 누자베스를 소환하는 'BRB'의 나른함 역시 기시감이 느껴진다. '앨범의 구성이 예측 가능해진다'는 일각의 비판도 이해된다. 클리셰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나, 흐트러짐 역시 없다. 타블로가 편곡한 'Super Rare'처럼 젊은 감각을 과시하는 트랩도 인상적이다.

에픽하이의 오랜 팬들이라면 파트 1의 마지막 트랙 'Wish You Were'과 이어지는 'Here'과 'Prequel'에 열광했을 것이다. 'Prequel'에서 타블로는 지금까지 에픽하이가 발표한 열 장의 앨범을 가사로 묶어 노래한다. 마지막 트랙 'Champagne'은 데뷔 앨범 < Map Of The Human Soul >의 수록곡인 '막을 내리며(2003)'의 가사인 "Check one, two. You're my destination. We thank you. It's a dedication"으로 마무리된다.

다사다난한 역사를 다독이는 축배랄까. 20년 짜리 수미상관이다. 힙합 전사는 배고픔의 동의어였던 시절,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랩 스타를 꿈꾸는 오늘날이 대비되는 듯하다. 에픽하이는 자신들의 과거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앨범을 완성한다.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는 히든 게스트 윤하의 등장과 함께 '우산(2008)'의 정신적-감성적 후속작으로 완성된다. 언뜻 평범해질 수 있었던 멜로 영화가 멋진 쿠키 영상을 숨기고 있었다. 

이처럼 에픽하이의 새 앨범을 듣는 행위는 아티스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뒷받침되었을 때 완성된다. 은퇴와 해체의 위기, 세상과 멤버들이 겪었던 불화, 이 역사를 모른 채 이 앨범을 듣는다는 것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지 않고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보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아빠의 야윈 품에 안겨 깨달았지 천국도 나이 드네"
- '가족관계증명서' 중


김필이 피처링한 '가족관계증명서'를 듣고 눈물이 났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것은 혼자 스탠드를 켜 놓고, '당신의 조각들(2008)'을 들으면서 울었던 중학생 시절과 비슷한 결의 감정이었다. 가사의 힘이다.

'밈'과 말초적 재미의 시대, 에픽하이는 우직하게 서사의 중요성을 천명한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음악으로 당신의 곁에 있겠다'는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20대 청년들이었던 에픽하이는 40대가 되었고, 10대였던 나는 30대가 되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친구 에픽하이는 여기에 있다. 

"세월에 길을 잃은 친구들과 사람들 기억 속에 파묻힌 그 이름들 사이 우린 여전히 존재 과거와 현재 늘 출발점에 선 듯이 무대 위 Go 해"
- 'Prequel'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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