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똑 떨어졌다. 10kg 포대에 든 쌀을 언제 다 먹었는지 금세 바닥이 보였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이 아닌가. 당장 마트에 가서 쌀 판매대 앞에 섰다. 경기부터 충청, 전라, 전국 방방곡곡 이름이 붙은 포대들이 한쪽에 가득 쌓여 있다. 쌀은 다 똑같은 쌀인데 뭐 이리 종류가 많담? 지난번엔 어떤 쌀을 사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조금 고민하다 행사를 한다고 적힌 쌀을 카트에 옮겨 담는다. 아마 지난번에도 그랬겠지.

내가 얼마나 무지한 소비자였는지를 영화 한 편을 본 뒤에야 알았다. <미인>이란 제목의 1시간 조금 넘는 짤막한 다큐멘터리다. 아름다운 여자의 이야기냐고? 아니다. 쌀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독특한 영화였다. 평생토록 쌀을 먹고 살면서도 얼마나 그것에 무심했던지 단박에 일깨우는 바로 그런 영화였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제 강점기 이전 한반도에 있던 쌀 품종이 몇이나 됐을까. 놀랍게도 1451종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엔 까투리찰, 조동지, 화도, 흰배, 북흑조 등 한반도 각 고장에서 수천 년 간 자라온 토종 벼 품종들이 낱낱이 적혀 있다. 각 마을 농가에선 주력으로 기르는 쌀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키우는 쌀을 볍씨로 따로 보관했다. 결혼 같은 중대사가 있을 땐 축의금 대신 좋은 볍씨를 건네주는 것도 오래된 풍속이었다.
 
미인 포스터

▲ 미인 포스터 ⓒ 필름에이픽쳐스

 

100년 만에 멸종된 토종쌀

다양한 쌀이 여러 고장에 나뉘어 있으니 마을마다 논의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오늘날 개량종 품종이 빚어낸 황금빛 들판이 이전엔 검고 붉고 누런 색깔들로 다채로웠다는 것이다. 어느 마을은 노란 조동지를, 어느 고장에선 청록색의 까투리찰을, 또 어느 곳은 하얀빛깔의 흰배를 주력 품종으로 길렀으니 조선 팔도 논의 색깔도 그야말로 형형색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쌀들이 오늘날을 자취를 감췄다. 패망한 일본이 물러났을 때 한반도에 남은 품종은 400여종에 불과했다. 일제가 저들 개량쌀을 한반도에 보급한 뒤로 토종쌀 상당수의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명맥을 이은 품종이 그렇단 것이지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다수가 일제의 쌀을 우리 것인 양 길러내고 있어서 한반도 토종쌀은 뜻 있는 농가가 근근이 지켜내고 있는 정도였다.

독립 후에도 토종쌀 억압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군부가 정권을 찬탈한 1970년대부터는 개량종인 통일벼로 생산을 일원화했기 때문이다. 쌀 생산이 크게 늘어 기아가 최우선 과제가 아니게 된 뒤엔 밥맛이 더 좋은 일본 쌀 품종으로, 다시 개량종으로 주력 생산이 옮겨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토종쌀 생산은 전체 쌀 생산의 0.1%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토종쌀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백두산 호랑이가 동물원에 살고 있듯, 토종쌀 450여 종이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에 보관돼 있다. 이것이 토종쌀이 처한 현실이다.
 
미인 스틸컷

▲ 미인 스틸컷 ⓒ 필름에이픽쳐스

 
쌀에 미친 두 농부... 엇갈린 두 길

홍태선 감독의 <미인>은 두 농부의 이야기다. 먼저 등장하는 농부는 서른한 살의 남호현씨로, 결혼 뒤 고향에서 농자를 짓기 시작한 젊은 귀농인이다. 그의 관심은 농업의 현대화에 있다. 그중에서도 드론을 활용해 넓은 논에 볍씨를 파종하는 기술에 완전히 꽂혀 있다. 모판에 모를 기른 뒤 논에 옮겨심는 모내기는 노동력이 많이 드는 탓에 70대 이상 노인들이 주력인 한국 농촌에서 더는 이어나가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마침 한국농수산대학교와 관이 함께 추진한 사업에 참여해 드론 직파를 실제로 해볼 기회를 얻었다.

다른 한 사람은 토종볍씨를 복원하는 일에 인생을 건 농부 이근이씨다. 주말농사로 시작해 전업 도시농부가 된 그의 관심은 남아 있는 450여종 토종 볍씨를 한국 들판에서 길러내는 것이다. 이미 그의 손에서 자라난 수십 종의 토종볍씨는 쌀이 되어 소비자들과 만났고, 그중에 상당수가 호평을 받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보단 벌이가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제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분명한 곳을 보고 있는 듯 보인다.

<미인>이 담은 두 사람의 도전기는 한국 쌀이 처한 현실과 농업이 당면한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는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과 여전히 부족한 기술력 사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농부의 시도이며, 다른 하나는 무너진 토종쌀이 설 토양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고군분투인데 어느 하나 쉽지가 않다.
 
미인 스틸컷

▲ 미인 스틸컷 ⓒ 필름에이픽쳐스

 
볍씨는 새가 먹고, 토종쌀은 아무도 모른다네

드론으로 직파한 남씨의 볍씨는 새들이 주워 먹는 통에 싹을 틔우질 못한다. 볍씨가 고인 물 위로 떨어져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협력사업을 이끄는 교수는 남씨의 농사법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에게 질책까지 하는데, 남씨 역시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둘의 불협화음이 스크린 너머까지 전해져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씨의 도전기도 쉽지는 않다. 현대화된 기술을 활용하는 대신 일일이 제 노동으로 토종쌀을 복원하는 작업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높은 장벽은 사람들이 토종쌀에 무심하다는 것이다. 토종쌀을 알지 못하니 마트에서 파는 개량쌀과 무엇이 다르냐는 의견과 흔하게 맞부딪힌다. 그렇다고 어디 크게 광고를 할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닌가. 발품을 팔아 작은 시장과 강연에서 토종쌀의 우수성을 알려나가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버거워 보일 때가 있다.

영화를 본 뒤 관객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몹시 궁금하다. 한국사람 치고 쌀 안 먹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말 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쌀을 사랑하는, 쌀을 생산하는, 쌀을 아끼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미인>이다.
 
미인 스틸컷

▲ 미인 스틸컷 ⓒ 필름에이픽쳐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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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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