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언론과 스포츠 팬들은 올림픽에서 '금메달 우선주의'를 앞세워 4년의 땀과 노력으로 값진 은메달을 따낸 선수들을 마치 죄인 취급하는 나쁜 풍토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도 점점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딴 선수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에서 메달은 색깔에 상관없이 모두 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스포츠 팬들을 가장 열광시켰던 은메달은 역시 4년 전 평창올림픽에서 따낸 컬링 여자 4인 단체전 '팀킴'의 은메달이었다. '안경선배' 김은정을 비롯해 학교 친구와 친자매, 선후배 사이로 구성된 '팀킴'은 2018 평창올림픽 4강에서 일본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며 귀중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전국에 "영미~" 열풍이 불었고 대중들에게 낯선 종목이었던 컬링은 단숨에 익숙한 종목으로 급부상했다.

그렇다면 과연 역대 하계올림픽에서 스포츠 팬들을 가장 뜨겁게 했던 은메달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종목에서의 많은 메달이 떠오르지만 역시 열악한 조건에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여자 핸드볼을 빼놓을 수가 없다. 2차 연장전에 이어 핸드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승부던지기'까지 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쓴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이야기는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한 <우생순>은 임순례 감독과 배우 문소리의 최고 흥행작이다.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한 <우생순>은 임순례 감독과 배우 문소리의 최고 흥행작이다. ⓒ 싸이더스

 
베니스영화제 신인상 배우의 최고흥행작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정도로 연기와는 큰 인연이 없었던 문소리는 1999년 김지운 감독의 단편영화 <사랑의 힘>에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설경구 분)의 첫사랑 순임 역으로 출연했다. 문소리는 <박하사탕>에서 비중이 썩 크지 않았지만 문소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창동 감독은 문소리를 차기작 <오아시스>의 한공주 역에 캐스팅했다.

문소리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과자 남자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여성의 사랑을 그린 독특한 시각의 멜로 영화 <오아시스>를 통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라는 '괴물'에 가려 있던 문소리는 <오아시스>를 통해 국내외 6개 영화제의 신인상 또는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단숨에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배우로 올라섰다.

2003년 <바람난 가족>으로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최고의 배우로 인정 받은 문소리는 2004년 <효자동 이발사>로 2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문소리는 <사랑해, 말순씨>와 <사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가족의 탄생>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에 빠졌다.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에도 출연했지만 <태왕사신기>에서 문소리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1월, 문소리는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핸드볼 선수로 변신했다. 실업팀 해체 후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으로 돌아온 한미숙을 연기한 문소리는 <우생순>으로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배우 데뷔 후 최고의 히트작을 만든 문소리는 이후 작은 영화에 주로 출연하다가 2013년 설경구와 11년 만에 재회해 <스파이>로 340만 관객을 동원하며 또 한 번 큰 사랑을 받았다.

지난 2006년 <지구를 지켜라>를 연출한 장준환 감독과 결혼해 2011년 딸 연두양을 낳은 문소리는 연기뿐 아니라 연출에도 도전하며 단편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단편영화들을 모아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장편 데뷔작을 극장에 올리기도 했다. 2018년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의 엄마를 연기했던 문소리는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서 김희애와 연기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올림픽 은메달 쾌거
 
 <우생순>의 배우들은 여자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에게 직접 자세와 기본기 등을 교육 받았다.

<우생순>의 배우들은 여자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에게 직접 자세와 기본기 등을 교육 받았다. ⓒ 싸이더스

 
한국 여자 핸드볼은 피지컬과 힘이 좋은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기술과 스피드를 앞세워 1990년대 세계 핸드볼계를 호령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여자 핸드볼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4위로 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 언론에서는 '한국 여자 핸드볼의 위기'라는 기사를 앞 다투어 실었을 정도로 한국 여자 핸드볼은 세계에서 그 위상이 대단했다.

하지만 국제대회 효자종목인 여자 핸드볼이 정작 국내에서는 '비인기종목'으로 홀대를 받았다. 실제로 아테네 올림픽이 열렸던 2004년 당시 국내에 여자 핸드볼 실업팀 숫자는 단 5개에 불과했다. 아테네 올림픽 결승 상대였던 덴마크가 무려 1000개가 넘는 핸드볼 클럽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열악하다 못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불리함을 극복하고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값진 성과를 만들어냈다.

사실 결과를 알고 보는 스포츠 영화처럼 시시한 장르도 드물다. 하지만 <우생순>의 경우 실제 경기 내용과 결과가 워낙 극적이었기 때문에 결과를 미리 안다 해도 감상에는 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애초에 <우생순>은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성공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힘든 상황들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실제로 <우생순>은 크게 변하지 않을 여자 핸드볼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임영철 감독의 눈물로 끝이 난다.

물론 <우생순>에서 등장하는 선수들의 현실은 영화적으로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특히 문소리가 연기한 한미숙은 생활고 때문에 마트에서 일을 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가난한 선수로 표현된다. 하지만 한미숙의 실제 모델인 오성옥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천재 선수'로 불리며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었다. 오성옥의 남편 역시 오성옥이 해외리그에 진출했을 때 함께 해외로 이주하며 아내의 선수생활을 적극 외조했다.

<우생순>은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들며 주목 받은 임순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우생순>으로 400만 관객을 모으며 처음으로 흥행작을 만든 임순례 감독은 2012년 김윤석 주연의 <남쪽으로 튀어>와 2014년 박해일, 유연석 주연의 <제보자>를 연출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 전국 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또 한 번 흥행에 성공했다.

베테랑 감독 대신 젊은 해외파 감독으로 각색

실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감독은 1960년생의 베테랑 임영철 감독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김혜경(김정은 분) 감독대행을 밀어내고 유럽에서 활동하던 스타선수 출신의 새 감독이 부임하는데 대표팀 감독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엄태웅이다. 승부던지기를 앞두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오늘 여러분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여줬습니다"라는 영화의 주제가 담긴 대사를 하는 캐릭터다.

배우 박원상은 임순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세 친구>를 통해 영화에 데뷔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여자문제가 복잡한 밴드멤버 정석을 연기했다. 박원상은 <우생순>에서도 한미숙의 남편이자 대표팀 감독의 선배로 출연해 빚에 쫓기는 힘없는 남편 연기를 선보였다. 박원상은 미숙이 올림픽에 출전한 사이 약물과다복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미숙이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때 병원에서 극적으로 눈을 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약하던 조은지는 <우생순>에서 국가대표 주전골키퍼 수희 역을 맡았다. 언니라인 중에서는 유일한 미혼이라 결혼을 꿈꾸며 맞선을 보는데 여기서 등장한 맞선남이 바로 하정우였다. 지난 2016년 단편영화 < 2박3일 >을 연출하며 다양한 재능을 뽐낸 조은지는 작년 11월에 개봉한 류승룡, 오나라 주연의 <장르만 로맨스>를 만들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지난 2006년 <앨리스를 위하여>로 대한민국 청소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차민지는 <우생순>에서 대표팀의 막내 장보람을 연기했다. 당돌한 성격과 행동으로 김혜경 감독대행을 비롯한 선배 선수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알고 보니 김혜경을 동경하며 핸드볼 선수의 꿈을 키운 유망주였다. 장보람은 프랑스와의 4강에서 부상을 당하지만 결승 연장전에서 부상 당한 동료 대신 출전을 자처하는 어른스러운 행동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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