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신신방>은 일제강점기의 만주에서 펼쳐진 젊은 조선인의 소소한 일상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연극 <신신방>은 일제강점기의 만주에서 펼쳐진 젊은 조선인의 소소한 일상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남산예술센터의 피날레를 장식한 작가를. 당시 올렸던 <왕서개 이야기>는 그해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공이모'(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에서 작품상을 받아 화제를 모았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드러나지 않은 개인사를 다룬 그의 대표작과 비슷한 서사구조를 가진 연극이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 작품은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 부문에 선정된 <신신방>(12~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다. 

김도영(35) 작가의 작품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창작활동에 불이 지폈던 <왕서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번에 공개하는 <신신방>까지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소소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 이밖에 여느 작품과 다르게 대하 역사드라마 같이 흐르는 러닝타임도 빼놓을 수 없다. <신신방>은 3시간15분이나 되는데, 3월에 열리는 <금조 이야기>는 4시간이나 된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길어도 100분을 넘기가 쉽지 않은데, 유독 그에게 어떤 비결이 숨겨 있을까. 두 번째 공연을 앞둔 지난 13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그를 만나 작품과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압축하는 연극적 구조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요즘은 문학적으로 가보고 싶어요." 

380장에 이르는 대하소설 같이 방대한 원고를 쓰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모됐을 거 같다는 물음에 다소 의외의 대답을 들려줬다. 

"구상기간이 길었지 정작 쓰는 건 4~5일밖에 안돼요. 한 번 앉아서 끝날 때까지 계속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전쟁이야기를 몇 년간 해와서 그런지 이야기가 딱 걸린다고 할까요. 그때(2019년)부터 만주에 애착이 생긴거 같아요. 그런데 비슷한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할까봐 솔직히 부담돼요." 

<신신방>은 전쟁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초점이 '전쟁'에 맞춰져 있진 않다. 전쟁 속에서 일어난 보통 사람들의 일상사라고 보면 맞을텐데, 그러면 평범한 사람을 다루면서 굳이 전쟁을 배경으로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현재 일어나는 동시대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뉴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비롯해 인권, 경제, 권력, 정치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는 있어도 작품으로는 쓸 수가 없더라고요.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반응하기도 바쁜 지금 이야기를 작품으로 바꿔쓰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갑니다." 

특히 과거의 사건들 중 35년간 이어진 식민지 기간에 관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전쟁이 포함된 해방이전의 기간'이 맞는 표현이란다. 그것은 일본뿐 아니라 그전에는 중국에게 억눌린 채로 있었던 식민지화까지 범위를 넓힌 것이다.   

서로 다른 부류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인물 구조

일제치하의 끝자락 해방 전후가 <신신방>의 시대적 배경이다.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자라 각자의 사연으로 만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소시민이 등장한다. 여기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 자신의 신분상승을 꿈꾸는 자본가부터 역사와 정치의 업악에 짓눌려 가족과 헤어진 채 만주개척민으로 강제 이송자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쳤던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낱낱이 보여주는 <신신방>은 어떻게 보면 친일파의 비열한 자본가로 포장되어 온갖 고통에 휩싸이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여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마음의 병을 얻은 남자, 창씨개명을 거부당해 아들과 생이별한 채 개척민으로 끌려오게 된 여인 등 일제강점기에 발생하는 구구절절한 개인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다. 

피가 섞인 동족의 뿌리도 통하지 않는 비열함으로 난무한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까지 등장한다. 과연 무엇이 비극 앞에서도 이 젊은이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을까. <신신방>은 경제와 정치의 상반된 이념 속에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끌고 간다. 돈을 쫓는 이는 현대의 관점에서도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군납공장에 끌려온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역사 속 인물의 서사는 오늘날 재해석되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화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신신방>은 '이야기를 해야하는 문제'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 현재로 건너와서 3포 세대, 코인, 주식 등 경제적 욕망에 가득찬 사람들을 당시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 중 김 작가는 유독 한 인물에 애착이 간다고 고백했다.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아편에 빠져버린 나약한 '고갱'이다.

이런 패턴은 전작 <왕서개 이야기>의 주인공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불쌍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캐릭터로. 그것은 피해자의 탈을 쓰곤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에 휩싸인 인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데, 미숙아로 자란 불쌍한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작가는 그에게 연민의 정을 던지는 이유를 인물의 심리에 두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인물은 목적의식이 분명해요. 욕망이 분명한 자는 나아갈 방향이 명확한데, 어떤 이는 인물로는 알겠는데, 욕망이나 욕구가 하나로 정리가 안될 때가 있어요. 선명한 욕망은 무대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물이 저에겐 인간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왕서개'가 와닿았던 이유는 딸을 찾거나 어디에 묻혀있을지 모르는 아내를 찾아가는 것이 분명하지만 복수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아요.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작가인 저조차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죠." 

인고의 20대를 거쳐 극작계의 중심에 선 최근 5년
 
 연극 <신신방>의 마지막 장면

연극 <신신방>의 마지막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대를 다니다가 문예창작과로 옮긴 이후 22살부터 시작한 김 작가 경력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몇 년간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20대에는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하지만 극단 여행자가 여러 작가를 뽑아서 5백만 원으로 단막극을 올리는 사업에 선정돼 25살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신춘문예는 최종에 한 번 올라간 이후론 "이 정도면 됐다"고 위안했단다. 그때부터는 꼭 뽑히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쓴다는 얘기가 있을 것"이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가로 들어섰다. 이후 공공기관 지원사업의 선정작가로 알린 것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아카데미'(2018)로 시작해 서울연극센터 '초고를 부탁해'(2018), 남산예술센터 '서치라이트'(2019), '왕서개 이야기'(2020), 동아연극상 희곡상(2020), 우란문화재단(2021), 서울연극제(2021)를 거쳐 오는 3월 말에는 국립극단 기획초청작을 준비 중이다. 처음에는 극단 여행자와 인연으로 반 소속작가로 활동했지만, 이후에는 여러 극단을 만나서 일을 해왔다. 이번에도 젊은 연극인으로 구성된 극단 실한과 손을 잡고 <신신방>을 제작했다. 

"작품을 쓰기 전인 10월에 극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창작산실 공모 마감 2주 전, 한 번 내보자고 했거든요. 이후 꽤 급박하게 제작됐어요."

최근 몇 년간 김 작가의 상징으로 여겨온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을 알아줘서일까. 아니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젊은 극작가와 새로운 동행을 원했던 것일까. 이유야 어쨌든 그가 잘해왔던 소재가 이번에도 화려한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결같이 근현대사와 역사 속 인물을 집중해서 다루는 제작과정이 궁금했다. 

"극단 실한은 젊어요. 그동안 제 작품은 연령대가 높은 사람이 많았어요. 젊은이가 기본 골자인 이번 작품에서는 청년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인물사전에 있는 친일파의 얼굴 옆에는 늘 '자본'이라는 말이 있어요. 환수해야할 재산은 얼마라든지 등을 보면서 일제강점기에 돈 벌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청년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연출을 만나 1년 동안 리딩하면서 완성시켰습니다." 

1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치면서 원래는 8인극이었는데, 극단이 15명의 젊은 배우들로 구성된 것을 알았다며, 전작 <수정의 밤>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모든 단원이 나올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연극적이지 않고 소설 같은 구조로 승부를 보다

30대 중반,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작가의 커리어는 최근 5년간 집중적으로 몰입됐다. 국공립 주요기관과 함께 활동의 폭은 점차 넓혀갔고, 인터뷰를 하는 지금도 동시에 서너 개가 올라가거나 준비되고 있을 정도다. 촉망받는 작가를 넘어서 연극계의 대표작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색깔 때문일 거 같냐는 물음에 '연극적이지 않고 소설 같은 구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것이 초기의 활동에는 방해가 됐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만의 색채가 됐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문학적, 영화적, 방대한 것, 젊은 나이에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려는 태도'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작가의 '글'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전에 선보였던 작품뿐 아니라 지속적인 소재로 차용되고 있는 만주 이야기가 독특한 소재는 아니다. 더구나 친일파 이야기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그렇다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그런 이유를 뒤로 하고 작품의 결정적인 매력은 작가의 문체, 서사, 이야기 중심인 '소설같은 희곡'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체에는 문어체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예전에는 문제가 되어 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연습과정에서는 너무 소설같았고, 살아있지 않은 말로 들려 수정을 거듭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문어체로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김 작가의 고집이 이제서야 존중받고 있다. 배우들도 연습할 때는 뱉으려고 노력해주고, 고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연출가를 만나다 보니 작가만의 스타일로 자리잡게 됐다.  

<신신방>이 공개되기 직전에 두산아트랩에서 막을 내린 <낙지가 온다>는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 낙지를 어깨에 태우고 전쟁터에 갔다가 돌아오는' 내용이다. 이것은 그의 페르소나로 자리잡은 '전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함을 이어왔다. 뭔가를 자꾸 끌어당기는 촉매재 같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 이후 3월에 막이 오르는 국립극단의 <금조 이야기>도 한국전쟁이 배경이고 피난민이 주인공이다. 국립극단의 '창작공감에서 제작한 이 작품과 같은 날(3월 31일) 홍대 아트센터에서 김태훈 배우가 사비로 만든 작품까지 기다리고 있다. 

지원사업으로 다듬어진 작품의 허와 실
 
 연극 <신신방>의 김도영 작가가 지난 13일, 대학로예술극장 1층 스태프회의실에서 작품과 창작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연극 <신신방>의 김도영 작가가 지난 13일, 대학로예술극장 1층 스태프회의실에서 작품과 창작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필립리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공공기관의 지원사업에서 초호화 사단의 지원을 받아 무대에 오르는 작품부터 개인의 사비로 힘들게 완성되는 공연까지 연이어 공개된다. 그에게 서로 다른 환경을 비교하며 작품에 대한 속내를 물어봤다. 해야하는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작 따로 있을까 궁금했다.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낙기가 온다>와 같은 거예요. 지원사업에 의해서 제작되는 것에는 공교롭게 전쟁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것은 피해자와 같은 역사성도 없고요. 이런 것은 누가 물어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요.(하하) 머릿 속에서 공부된 것이 아니라 저도 잘 모르는 세계관을 쓰거든요. 조금 더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랄까." 

지원사업과 관련된 작품은 상상력을 열어두기보다는 이야기의 구조, 내가 하나하나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 같은, 공부가 되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란다. 이번 작품뿐 아니라 대부분의 오랜 기간 제작기간을 거쳐 연출, 배우뿐 아니라 드라마투르그 등 다양한 베테랑 스태프들이 붙은 제작환경이 오히려 그에게 창작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했다. 작품을 쓴 이후 끈임 없이 연습실에 들러 배우들의 연습장면을 지켜본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썼지만 거리를 두고 싶어요. 연극은 작가에서 시작해 무대로 끝나죠. 제가 작품을 붙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인물, 대사와 작별하기 위해서죠. 나한테서 시작된 것이 이 사람들에게 가는걸 지켜봐야 끝나도 허무하지 않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공허하고 소진되는 거 같거든요. 연습실에 매일 나가면 덜해요. 나에게 출발한 것이 배우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작별하는 시간이죠. 내 것을 보내기 위한 시간이 작가에게는 필요합니다."

근현대사, 전쟁 이야기, 문어적 문체, 정교하게 다듬어진 입말 등 그를 떠오르는 작가의 대열로 들어서게 한 이유를 뒤로 하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정작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지 말이다. 

"처음 희곡을 썼던 '사후세계'를 제대로  쓰고 싶어요. 희곡 시간에 처음 썼던 것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22살에 썼으니 얼마나 유치하겠어요? 당시에는 표현 방법과 대사를 쓸줄도 몰랐어요. 전쟁은 현실을 바로 고칠 수 있는 이야기로 자꾸 상상해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사후세계는 출발하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신신방과 같이) 배경이 분명한 작품은 분석하거나 토론하기도 좋은데, 상상력만으로 솜사탕처럼 만들어진 작품은 분석하는 테이블 작업이 괴로워요. 무슨 이야기인줄은 몰라서 병맛인데 매력있는 것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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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을 지냈으며,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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