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남은 수명을 미리 아는 먼 미래의 일이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한시'는 다른 사람의 미래를 효율적으로 설계해주는 플래너다. 감정적인 것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모든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지만 정작 자신은 세상을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날, 특별한 임종식을 준비해달라고 거액의 제안을 받는다. 지금까지 안해본 일이 없는 광고자인 고객은 자신의 임종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세상에 없었던 단 한 번의 임종식을 꿈꾼다.

미래의 소재를 현대의 말투와 과거의 음악으로 풀어낸 < TIMER(타이머) >가 2월11~1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2021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전통 부문에 선정된 이 작품은 철저하게 분리된 전통연희의 다양한 요소를 재조립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을 변주하고, 인물의 감정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무대 위에 혼재되어 있는 과거·현재·미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 작품은 과연 연극인가, 무용인가, 음악인가.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전통연희에 대한 실험이 펼쳐졌다.  

"나에게 남아 있는 수명이 얼마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제 대학원을 갓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예술가 조한민(31)씨는 이 공연이 시작하게 된 계기를 여기에서 찾았다. 살아온 인생에 비해 다소 무거운 주제를 시도한다고 생각한 그에게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인생의 후반부에 비로소 남은 여생을 정리하는 주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반백을 코앞에 둔긴 필자도 아직 넘지 않았던 담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나보다. 하지만 조씨는 현대인이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이라며 소중함을 놓칠뿐이라 단언했다. 

"이게 꼭 노인만 다루어야 할 주제인가요? 인생에 남은 시간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소중하게 쓸 것인가를 생각했어요.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말이죠."
 
 전통연희 공연 <타이머(TIMER)>의 한 장면

전통연희 공연 <타이머(TIMER)>의 한 장면 ⓒ 필립리

 
그는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억지로 하는 일들이 많다며, 서로 다른 질문에 남겨진 인생의 숙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란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했을까. 그는 전통연희를 하는 '연희앙상블 비단'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비(飛)상하는 단(單) 하나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단체의 입봉작으로 이번 작품을 선택했다. 음악과 연희 퍼포먼스의 앙상블을 추구하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했는데, 연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와 긴밀한 협업을 개척하고 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겼던 전통 연희가 그렇듯 '비단'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초월하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연희(演戲)가 지향하는 "즐거움을 행하는" 시도로 보인다.  

"사물놀이, 풍물, 탈춤 등을 하는 집단인데, 어떤 텍스트와 서사를 만나서 그 위에 연희를 얹었어요.이번 공연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사실 전통연희의 서사는 대부분 옛날 이야기이잖아요. 전통이나 마당극이 그렇듯. 그래서 말투가 "...했는디?"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에요."

'변강쇠전' '옹녀'와 다르게 그는 왜 전통연희에서 미래의 이야기는 할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 거기에서 부딪히는 전통요소가 < TIMER >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악기를 두드리거나 몸짓을 했을 때 나오는 전통적인 냄새와 색깔이 있는데, 어떻게 이것을 현대적으로 녹여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전통연희가 해왔던 고민에 대해서도 일침을 던졌다. 

"현대음악과 현대무용의 대부분은 관객에게 맡겨버리더라고요.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해석하게 열어두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죠. 그런데 전통연희를 현대적으로 하려다보니 너무 색깔이 부딪혀요. 너무 짜맞추는 것이 아닌가. 이면이 필요해 억지로 끼워넣는게 아닌가 말이죠."

그래서 작·연출을 한 여울 연출과 치열하게 의논을 한 끝에 연희가 서사의 서브텍스트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극 위주로 된 공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연희와 음악, 춤, 움직임이 섞인 종합예술로 발전했다. 대신 유한한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공연을 위하여

무대의 배경에는 인생에 남겨진 다양한 숫자가 나열된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남은 시간,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남은 시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는 타악은 숫자와 함께 째깍거리는 분, 초의 호흡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죄어온다. 

"저희는 이제 무얼하면 될까요?" 

선생님에게 무심결에 던진 학생의 질문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설계하는 현대인의 고민이다. 모든 것이 숫자로 표시되는 상황. 심지어 자신의 나이에 따라 변하는 결혼 확률, 조건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숫자놀음은 인간의 패턴을 감성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간혹 감정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 누군가의 제어를 받는 듯  동작이 멈춰진다. "단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세상은 급박하게 궁지에 몰린다. 전통연희에서 보기 힘든 연극적 요소를 강하게 밀어붙인 < TIMER >는 사물놀이와 전통연희를 사이사이 배치시켰다. 숨가쁘게 달아오르는 호흡, 텀이 짧아지며 높아지는 속도, 임종까지 남은 숫자은 전통연희의 도움을 받아 무대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몰아넣는다. 

지금까지 완벽한 인간으로 평가받았던 주인공 '한시'는 의외의 제안을 받고 고민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임종식을 준비해주세요." 11년간 4700개의 광고를 만들고,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던 완벽한 광고업자.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마지막 1초까지 허투로 쓰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남긴다. 마지막만큼은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다며. 남들을 위해서 안해본 것이 없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했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극 중 몰입해 모든 것을 잃고 있었던 주인공 '한시'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실험이 그에게 가장 특별한 것임을 알려주려 하지만, 주인공은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우친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바쁘게 살아온 현대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가장 특별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자신을 되돌아보길 바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나요?"
"생각났어요." 
"그거…하지 말아봐요."


공연은 내용뿐 아니라 전통연희가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았던 단 한 번의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전통적인 복장은 볼 수 없다. 검은 쟈켓을 걸치고 상고를 돌리는 예술가, 현대적인 말투를 그대로 옮겨온 사실적 요소, 미래의 느낌을 물씬나게 포장하는 화려한 영상, 공연 중간에 객석의 끝까지 조명을 밝힘으로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는 그동안 전통연희가 시도했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끌여들였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충돌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전통연희 공연 <타이머(TIMER)>의 커튼콜

전통연희 공연 <타이머(TIMER)>의 커튼콜 ⓒ 필립리

 
"서사와 양식이 충돌했어요. 서사는 미래고, 양식은 전통이잖아요. 그것을 등장하는 주인공의 내면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시간들을 연희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이 서사에 방해받지 않고 그래도 전체적인 결은 같아보이고 전통악기를 이렇게 쓸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조씨는 사물놀이의 장단을 해체했다. 예를 들어, '덩덩쿵따쿵(휘모리장단)'이면 쿵만 가지고 다시 재조립해 박자를 다시 맞췄다. 10,8,7…로 카운트다운 하면서 죄어오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극에 도입시켰다. 이것은 사물놀이를 비롯해 점차 긴장감을 몰아붙이는 전통연희의 방식이라며, 장단을 해체해서 재조립함으로써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 연희라고 말했다. 연희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작품, 서사, 극, 음악 등 모든 창작 과정을 거쳤다. 복합장르의 모든 요소에 창작적 가미를 더하니 제작기간만 1년이 걸렸다.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서 연기되어 조금은 다행이라며, 작업량이 방대해서 준비할 게 많았단다. 

"여기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극장 중 가장 큰 곳이잖아요?. 다른 곳보다 투입되는 인프라도 훨씬 좋고요. 예전에는 반주나 객원으로는 참여해봤는데, 꼭 팀으로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디자이너와 감독까지 처음부터 같이 회의를 했습니다. 사단만 12명이고, 연주자, 배우, 크루들까지 포함하면 40명이 넘어요. 큰 프로덕션을 해보는 것도 처음일 정도입니다."

올해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이번 작품은 그에게 입봉작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아르코예술극장의 대극장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순수문화로 할 수 있는 가장 규모가 있는 극장에서 스타트를 끊었다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까. 그런 계기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들려줬다.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 있을 때, 뭔가 작업을 하다가 코로나 영향도 있었고 내가 언제 죽을지 알면 어떻게 살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요즘의 젊은 친구들도 많은 고민과 자기 내면과의 싸움을 하지 않나 생각해요. 전통이 가진 시간적인 의미도 있어요. 어디서부터 전통으로 볼 것인가. 어디서부터 전통이고 어디까지 전통으로 볼 것인가. 그것도 이 공연이랑 맞닿아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연희로 보고 어디까지 연희로 볼 것인가. 그런게 굳이 의미를 찾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연희에 깽판을 치고 싶었어요"
 
 리허설을 마치고 객석에서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연희앙상블 비단의 조한민 대표

리허설을 마치고 객석에서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 연희앙상블 비단의 조한민 대표 ⓒ 필립리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연희에 반란을 일으켜보자는 뜻에서 전작 <깽판: 루키들의 반란>,  <깽판:우리가 살판>을 무대에 올렸다. 정장입고 사물놀이 치는 파격을 선보였는데, 이번 공연에서도 현대적인 복장을 한 채 사물놀이를 진행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당시에는 연희의 모든 것을 해체했다며, 심지어 쓰레기통 가지고와서 치기도 했단다. 당시 교수님도 "그렇게도 해봐야지"라며 격려를 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조 의 세 번째 깽판이냐는 물음에 약간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해소를 했는데, 하고 싶었던 것을 다 뿜어냈다면 지금은 해소를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세계관이다보니 하는 동작도 딱딱해지고, 우리가 풀어질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연주를 하는데 호흡이 있고, 그루브를 타기가 애매한 지점도 있고요. 어떤 분은 저게 무슨 전통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이것은 완전한 깽판을 친 것도 아니고, 시도하는 그 중간 단계인 거 같아요."
 
전작보다 좋은 점은 정돈되어 있고 음악과 서사, 무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이럴수 있었던 배경은 6명 팀원의 일부가 아니라 40명을 이끄는 단체의 대표로서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주인공 '한시'처럼 조씨는 남은 인생의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있을까라는 물음에 다소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됐다. 

"사실 계획이 없이 살아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10년 뒤에 뭐하지보다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고 내일 주어진다는 주의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나이가 들지 않을까요." 

조씨는 남은 인생의 목표는 명인이 되는 것이란다. 하지만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않다며, 나는 나대로 존재하고 싶단다. 젊은 전통인으로 새로운 길을 시작한 그가 인생의 후반부에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나의 자식, 나의 가족, 그동안 수많은 공연장들을 거쳐갔던 관객들로부터  그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장인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런데 기술자는 아니에요. 평소에도 기술자가 아니길 바란다고 생각해요. '악기를 잘 친다'는 의미가 빠르고 화려하게 치는게 아니거든요. 뭐가 되고싶다고 정하는 것이 틀에 갇혀 있는 거예요. 어쨋든 마지막까지 고뇌에 갇혀 힘들게 살았던 '고흐'보단 평생 행복하게 살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색채를 드러낸 화가로 살아온 '고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을 지냈으며,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