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정도전이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정권을 잃은 것은 상당부분은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복형 이방원의 기습 공격이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한 순간에 몰락시켰다.
 
하지만 이방원을 책봉했다 해도 어차피 분란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이방원은 제5왕자였다. 아무리 공이 많다 해도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복형제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것이 가능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은 이방원에 맞서 제4왕자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사실로도 명확해진다.
 
어떤 가정법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만약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가 세자가 됐다면, 이야기가 크게 달라진다. 이 경우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나이 어린 이복동생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됐기 때문이다. 만약 이방우가 책봉됐다면, 이방원의 쿠데타 명분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세력을 규합할 명분도 조성되기 힘들었다. 장남을 세자로 만들지 못한 것은 이성계에게 천추의 한이 될 만했다.
 
훗날 정조 임금이 지은 진안대군 묘비명에 따르면, 이방우는 1388년에 아버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식솔들을 데리고 철원에 가서 은둔했다. 그 뒤 매일 같이 폭음하다가 건국 2년 뒤인 1394년에 세상을 떠났다.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쿠데타에 협조하다가 막판에 토지개혁 문제 때문에 등을 돌린 점을 감안하면, 고려왕조에 대한 진짜 충신은 정몽주가 아니라 이방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아들이 새 나라 충신이 아닌 고려 충신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은 이성계에게 뼈아픈 일이 됐다.
 
장자가 고려 충신이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일은 이성계 아들들의 서열을 흐트러트렸다. 이방우의 지위가 둘째아들 이방과에게 옮겨가고 이것이 서열을 정리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제1차 왕자의 난 뒤에 이방원이 이방과를 왕으로 추대했다가 2년 뒤 밀어낸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장남의 죽음으로 인해 실질적 장남이 된 이방과가 동생들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방원이 형들에 대한 우의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사실, 바로 위의 형인 이방간이 이방원에게 맞선 사실 등은 이방우가 탈락한 상황에서는 누구를 책봉했어도 분란을 피하기 힘들었으리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다. 처음부터 이방원을 책봉했다 해도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 경우와 달리 이방원이 세자가 되는 경우에 명확히 달라졌을 것이 하나 있다. 삼봉 정도전과 이방원의 관계가 그것이다.
 
건국 직후에 이성계가 둘째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을 책봉하려 하자,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정도전 역시 처음에는 '나이와 공로를 고려하시라'며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성계를 적극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의 태도는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 데에 기여했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이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자주 했던 말이 있다. "한고조(유방)가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유방이 책사 장량을 기용해 한나라를 건국한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기용해 나라를 세운 것이라는 이 발언은,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이성계가 정도전의 수족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이씨가 조선을 세운 게 아니라 실제로는 정씨가 조선을 세웠음을 술기운을 빌려 은근히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 말을 입에 담아도 괜찮았을 정도로, 정도전은 건국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 그렇게 해도 괜찮을 정도로,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도전이 좀더 적극 만류했다면 이성계가 뜻을 굽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의 소생들 중에서 세자를 택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좀 더 적극 만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덕왕후와 연대해 이방석을 지키는 쪽에 섰다. 이방석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정도전 자신의 정치행보에도 유리했다.
 
<조선경국전> 치전(治典) 편에서 역설한 바와 같이, 정도전은 '군주는 재상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재상 중심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지도를 받을 군주를 희망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성년인 이방원보다는 유년인 이방석이 그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방원이 됐다면, 정도전과 이방원은 이때부터 심각한 갈등 양상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택했다면, 건국 초부터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투쟁이 심각해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명분과 실리 모두 취했음에도 패배한 정도전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정도전이 결국 패한 것은 이방원이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력과 명분에서 우위를 점한 쪽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군사권을 쥐고 있었고, 주상인 이성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병 혁파 운동을 전개했고, 이 결과로 이방원을 약화시켰다. 실력과 명분을 다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이방원이 주상의 아들이기 때문이어서 그랬는지, 이방원을 좀더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이방원이 병장기를 감추는 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방심까지 했다 사병 혁파 문제로 정국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동지인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의 기습을 받앗다.
 
이방원을 좀 더 강하게 견제하지 못한 것, 중요한 순간에 긴장이 다소 풀린 것은 상당부분은 정도전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에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 정도전이 열세에 놓였다면,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랬다면, 정도전이 한층 더 분발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건국 뒤에 정도전은 법전을 만드는 일이나 대외관계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만약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 정도전의 입지가 위축됐다면, 글을 쓰는 일이나 명나라와의 대결 못지않게 국내 권력투쟁에도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됐다면 이방원에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방원이 이성계를 평화적으로 계승해 임금이 됐다 해도, 정도전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도전이 기습을 당한 장소는 지금의 경복궁 앞에 있었던 옛 한국일보 자리다. 이곳에서 기습을 당한 정도전은 죽기 직전에 <자조(自嘲)>란 시를 남겼다. <삼봉집>에 실린 이 시에 "삼십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 송헌 정자에서 한번 취하는 새에 결국 헛되이 되었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처음부터 이방원이 됐다면, 정도전이 술을 마시다가 자조적 시를 남기고 최후를 비참하게 끝맺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건국 직후에 이방원이 세자가 됐다면, 이는 정도전에게 명확히 불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정도전의 몰락을 방지하게 됐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이방원이 됐다면 정도전이 이방원과의 경쟁에 좀더 집중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좋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고, 처음에 나쁜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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