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챔피언에 오르면 최고 스포츠 스타로 대접받았던 시절(1965), 그해 9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2회 아세아 아마복싱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8체급을 석권한다. 챔피언 9명 중 한국 선수 8명이 아세아 아마복싱 왕좌를 차지한 것. 그 중 세 선수(서상영, 박구일, 황영일)는 전북 군산체육관(김완수 관장) 소속이어서 대회 관계자와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회 끝나고 반세기 넘게 지난 오늘, 아마복싱 국제대회에서 지방 소도시의 한 체육관 출신 선수들이 금메달 세 개(라이트플라이급, 라이트웰터급, 밴텀급)를 쟁취한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한 기적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시민에게 화답하는 (사진 왼쪽부터) 황영일, 박구일, 서상영 선수와 김완수 관장(1965년 9월)

시민에게 화답하는 (사진 왼쪽부터) 황영일, 박구일, 서상영 선수와 김완수 관장(1965년 9월) ⓒ 조종안

 
군산은 온통 축제 분위기.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이 군산역에 도착하자 고적대의 환영 행진곡이 푸른 하늘로 울려 퍼졌다. 선수들은 가족과 친지, 체육회 관계자들이 걸어주는 꽃다발 속에 파묻히는 등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간단한 환영식이 끝나고 시청으로 이동하는 거리마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선수들이 탑승한 지프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시청 앞에서도 환영식이 성황리에 열렸다. 시민들은 금의환향한 선수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공식 행사를 마치고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개선한 선수들은 김완수 관장과 함께 지프차에 올라 박수와 환호 속에 중앙로, 도선장, 째보선창, 신영동, 역전 광장, 미원동, 명산사거리를 돌아 시청에 도착했다. 시민들은 감격했고, 거리에는 오색 꽃가루가 뿌려졌다.

특히 서상영(徐祥榮) 선수는 그해 12월 '한국일보'가 제정한 65년도 신인 체육상 최우수 신인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당시 신문은 "거리 측정에 능하고, 찬스에 강하다. 푸트워크도 좋다. 특히 백스텝으로 상대를 유인, 스트레이트를 퍼붓는 솜씨가 대단한 선수"라고 평가하였다. 당시 서 선수는 군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현지에서 케냐 선수들과 포즈 취한 서상영(가운데)

1968년 멕시코 올림픽 현지에서 케냐 선수들과 포즈 취한 서상영(가운데) ⓒ 서상영

 
그해 서상영은 한양대, 경희대, 중앙대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는 경희대에 마음 두고 있었으나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이듬해 중앙대에 진학한다. 이어 전매청(專賣廳)은 총 5명(국가대표 3명, 일반 선수 2명)으로 구성된 '아마복싱선수단'을 창단한다. 복싱선수단 결단은 국내 첫 케이스로 군산출신 국가대표 서상영과 황영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상영은 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 경력 보유자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체육회와 KOC 합동전형위원회는 서상영(플라이급), 지용주(라이트 플라이급), 장규철(밴텀급), 김성은(페터급), 이창길(라이트급), 김사용(라이트웰터급), 박구일(월터급) 등 7명을 한국 대표로 출전시켰다. 그 출전 선수 중 6명은 진즉 고인이 됐고, 서상영 복서만 생존해있어 눈길을 끈다.

서상영의 '복싱 인생' 10년, 입문에서 은퇴까지
  
 학창시절 서상영(군산고등학교 3학년 시절)

학창시절 서상영(군산고등학교 3학년 시절) ⓒ 서상영

 
서상영(77)은 군산시 대명동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대흥기계공업사(농기구 제작소) 운영해서 살림은 풍족했다. 그의 중학생 시절은 정치깡패들이 위세를 떨치는 자유당 말기로 학교마다 주먹패가 만들어지고, 음침한 골목에서는 날마다 패싸움이 벌어졌다. 급우들의 주먹자랑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상영은 손용(孫勇) 사범이 운영하는 권투도장을 찾아간다.
  
"깡패들이 활개치고 다니던 시절이었지. 경찰도 손을 못 댔으니까. 학교도 마찬가지였지. 공부 잘하는 놈보다 힘센 놈이 큰소리치고, 상고의 백골단, 군고의 라이온단 깡패학생들이 설치고 다녔으니까.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싸우는 애들이 많았거든. 권투를 배우면 누가 함부로 건들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시작하게 됐지. 처음에는 미원동(현대극장 맞은편)에 있는 손용 사범 도장(군산권투회)에 다니다가 군산체육관(김완수 관장)으로 옮겼지."

서상영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각광받기 시작한다. 1964년 7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된 제2회 성의경배(成義慶杯) 쟁탈 전국아마복싱대회에서 우승(라이트 플라이급)을 차지한 것. 그는 뛰어난 스피드와 사우스포 특유의 카운터펀치로 상대 선수들을 제압하며 우승, 정상급 복서로 인정받는다. 이듬해에는 고교생 신분으로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된다.
  
 68멕시코 올림픽 출전 앞두고 김완수 관장, 박구일, 황영일 선수 등과 기념사진(서상영을 제외한 선수들과 김관장은 고인이 됐음)

68멕시코 올림픽 출전 앞두고 김완수 관장, 박구일, 황영일 선수 등과 기념사진(서상영을 제외한 선수들과 김관장은 고인이 됐음) ⓒ 조종안

 
65년 아세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서상영은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1966) 방콕 아세안게임 출전권도 거머쥐는 기염을 토한다. 군산고 졸업과 동시에 중앙대학교 체육과에 재적하면서 전매청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막 시작한 때였다. 빠른 스피드와 푸트워크가 좋았던 그는 언론으로부터 금메달 후보 중 최강자로 인정받으며 장도에 오른다.

서상영의 준결승 경기 열리는 방콕 '키티카초른' 체육관에는 한국의 인기 영화배우 허장강, 신영균, 이향, 김혜정 등이 응원을 펼쳤다. 그들은 영화 <방콕의 하리마오>(1967) 촬영차 방콕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 선수는 열띤 공방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대회 은메달리스트인 그는 한국 톱스타들의 열렬한 응원과 호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서상영은 1967년 10월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되는 프레올림픽 대회와 그해 12월 실론의 콜롬보에서 열리는 제3회 아세아 아마복싱 선수권 대회에 한국 대표로 파견된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에서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누르고 출전권을 획득한다. 메달 유망주로 주목받았던 그는 10월 14일 플라이급 1차전에서 우간다의 '로보고'에게 판정패한다.

매일 아침 로드워크로 하루 시작
  
 백발의 신사가 된 서상영 새싹학원 이사장

백발의 신사가 된 서상영 새싹학원 이사장 ⓒ 조종안

 
멕시코올림픽 이후 아마추어 복싱계에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신인 선수가 국가대표급 노장 선수를 물리치는 등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 한동안 경량급의 '왕중왕'으로 평가받던 서상영 역시 1971년 후진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평소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최고 경영인(CEO)이 되고자 지인들의 프로 전향 권유와 유혹을 뿌리친다.

"김기수 선배(세계챔피언)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더니 프로로 전향하라고 권하더라고. 세계 챔피언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정중히 거절했지, 명예도 좋지만, 프로 선수가 되면 몸이 골병들기 때문이었지. 운동하느라 술·담배도 안 배웠거든,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오래 사는 모양이야(웃음). 이원석이 프로 전향 후 고생하는 걸 보면서 교훈을 얻은 것이지. 그렇다고 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부모도 적극 반대해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지."
 
서상영은 사업에 두 번 실패하고 낙향, 15~6년 전 아내가 운영하는 새싹학원 이사장으로 부임한다. 3개의 새싹학원 관리하면서 후배 복서들 만나는 게 요즘 그의 소일거리. 매일 아침 7시 기상, 1시간 남짓의 로드워크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는 가난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정상을 차지한 유명복서 가운데 건강관리 부실로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한때는 주먹 하나로 사각의 링을 평정했던 서상영 이사장.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백발의 신사가 된 그는 "인생 참 덧없다"며 작년에 작고한 김완수 사범을 떠올렸다. 이어 "68 멕시코올림픽 출전 동료 6명과 군산체육관에서 함께 땀 흘리던 박구일, 이원석, 황영일 등은 진즉 '하늘의 별'이 되고 나 혼자만 남았다"며 허허로운 웃음만 지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서상영 김완수 관장 군산의 권투 군산체육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