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악범죄가 일어나 수사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당 수사관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게 마련이다. 수사관들은 그 기대에 부응할 뿐 아니라 정의감에 추동되어(물론 직업이기도 하지만), 수사를 열심히 한다. 허나, 그들의 수사가 늘 바람직한 결과물을 내는 것은 아니다. '미해결사건'이 어차피 생긴다. 1989년 '뤼네부르크'라는 독일의 소도시에 일어난 비르기트 실종사건도 그랬다. 몇 명의 노인들이 발벗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예 '영구 미해결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사건의 이모저모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비르기트 마이어 실종사건>이다.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를 상세하게 담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989년의 어느 날, 비르기트가 실종되자 뤼네부르크의 수사관들은 수사에 돌입했다. 여러 증거물, 신발자국, 그리고 DNA를 수집했다. 그러나 법의학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여서 정밀분석이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르기트 실종 직전에 4명의 부부가 살해되어 며칠 간격으로 두 명씩 숲에 유기된 사건도 있어 뤼네부르크 수사관들은 이중삼중으로 과중한 업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실종당사자 비르기트의 친오빠가 '마피아 헌터'로 인지도가 높은 함부르크 수사국장 볼프강이어서, 그의 존재감과 무게감이 사건 수사관들에게 적잖은 부담을 주기까지 했다. 
 
사실 유능하고 명민한 수사관 볼프강은 사건 초기부터 뤼네부르크 수사팀의 수사를 예의주시했다. 수사팀에 연락해 의견을 개진했고, 수사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유능한 볼프강의 눈에 뤼네부르크 수사팀은 대체로 무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수사팀이 수사를 포기하고 비르기트 실종사건을 미해결사건으로 분류해 창고에 집어넣자 볼프강은 불만스러웠다. 
 
불만 가득했던 볼프강은 몇 년 뒤 수사국장에서 은퇴한 이후 스스로 수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수사팀을 꾸렸다. 강력사건 수사 분야에서 '고참' 급으로 활동했던 라인하르트와 클라우디아를 섭외했다. 거기에 법률 조문을 해줄 전문가(변호사)도 추가했다. 모두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이었다. 볼프강 팀은 차근차근 조사를 했다. 그러면서 뤼네부르크 수사당국에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뤼네부르크 공식 수사팀은 대번에 거절했다. 경찰이라는 공식기관이 아무리 전직 수사관과 법의학자들이라 해도 민간인 신분인 서너 사람과 공조수사를 하기로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볼프강 팀이 난데없이 열심히 수사하니까 공식 수사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수사를 재개해 그들대로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비르기트의 이웃사람 쿠르트베르너 비크만(아래, W로 표기)을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수사팀의 사소한 실수(혹은, 절차 준수)로 W가 도주해버렸다. 실수가 발생하자 볼프강은 '프로 선수가 아마 선수를 바라보듯' 뤼네부르크 수사팀을 한심하단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천운이 따라서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무려 50일 동안 잡히지 않고 도주하던 W가 대형 교통사고에 우연히 연루되는 바람에 경찰이 의례적 차량수색을 하다가 차량에서 다수의 총기류를 발견하고 W를 긴급체포한 것이다(살인 용의자로서가 아니라, 전쟁무기 규제법 위반혐의로). 그러나 체포 직후 W가 살인사건 용의자임이 밝혀졌고, W는 살인사건 용의자 신분으로 뤼네부르크로 압송되었다. 이제 제대로 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낼 일만 남았는데, 아뿔사! W가 자살해버렸다. 자기가 살던 집을 잘 보존해달라는 유서 한 장, 아내에게 남겨놓고 말이다.

용의자가 자살하자 뤼네부르크 수사당국은 이 사건을 미해결사건으로 다시금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용의자 사망은 사건종결의 근거가 된다. 물론 볼프강은 분노했다. 볼프강은 W의 집을 수색하든, W의 동생과 아내를 신문하든, 사후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식 수사관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물러서야 했다.    

볼프강 팀은 W의 인생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가 강도와 성폭력 혐의로 재판받은 경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땅을 파고 뭔가 묻는 활동(?) 자체를 즐겼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W는 심지어 스포츠카를 자기 집 마당 비탈에 묻기까지 했다. 
   

그래서 볼프강 팀은 사실 W의 집 근처의 땅을 모두 파헤치고 싶었다. 하지만 공식 수사팀이 아닌지라 수색영장을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W의 아내가 완강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재혼해 그 집에 계속 살면서 가택수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궁리 끝에 볼프강은 백만장자 매제(비르기트의 남편)에게 그 집과 땅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제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미안하지만 어렵겠다고 응답해왔다. 
 
세월이 더 흘렀다. W의 아내가 병사했다. 볼프강 팀은 이때다 싶어, 그녀의 새남편에게 연락을 취했다. 새남편은 협조적이었다. 결국 볼프강 팀은 W가 살아생전 비밀방으로 사용하던 다락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볼프강 팀은 이십 년 넘게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다락방에 여전히 남아있는, W가 남긴 살인범죄의 증거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었다. W가 왜 자살 유서에서 아내에게 자기 집을 잘 관리하라고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겼는지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래서 볼프강 팀은, 정황자료들과 실증자료들을 모조리 모아 뤼네부르크 수사당국에 수사재개를 요청하였다.

W는 다만 한 사건만 저지른 용의자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89년 비르기트 실종사건 파일이 또 다시 열렸다. 공식 수사팀은 수색영장을 받아 W의 집을 수색했다. 수색하는 김에, W가 한동안 묘지관리인으로 일했음에 착안하여 그가 일하던 묘지 근방도 수색했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공식 수사팀은 "자, 이제는 정말로 끝입니다!"라고 말하듯 사건을 또다시 종결했다. 그래서 비르기트 실종사건도, 혹시나 W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동시대의 여러 미제사건들도 다 없었던 일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볼프강 팀은 수사를 종결하지 않았다. 볼프강은 여동생이 W에게 살해되었다면 W의 생활공간 안에 시신이 암매장돼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W의 차고를 하루 동안 빌려, 땅을 파헤칠 계획을 세웠다. 그날 볼프강 팀은 발굴 전문가들을 추가로 불러들여 땅을 팠다. 꽤 깊이 파내려갔지만 시신은 없었다. 낙심하여 작업을 중단하려는 그때 일꾼 중 한 명이 사다리를 철수하던 중 수상쩍은 구멍을 발견했다. 발굴이 재개됐고, 사람 뼈가 나왔다. 처음엔 작은 발목뼈였지만, 그 뒤로 인체의 모든 뼈가 계속해서 발견됐다. 마지막으로 두개골이 담긴 가방이 나왔는데 바로 그 안에서 두개골과 함께 비르기트가 남편에게 선물받은 액세사리가 나왔다. 즉 그 시신은 비르기트였던 것이다.  
         
 
문득 공식 수사팀과 볼프강 팀 사이에 오래도록 (무려 27년 이상) 흐르던 미묘한 갈등양상들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만약 공식 수사팀 소속의 수사관이었다면 볼프강 팀의 수년간에 걸친 '성가신 요구'를 대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공식 수사팀의 기분과 처지에 공감하는 일이, 피해자 유가족과 볼프강 팀의 기분과 처지에 공감하는 일보다 덜 중요한 일일까? 
 
아닌 게 아니라 찬반이 강력히 맞서는 어떤 사안에서 양쪽 입장을 공평하게 공감한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체 상영시간 4시간에 달하는 <비르기트 마이어 실종사건> 제작진은 볼프강 팀에 확실히 더 기울어져있는 듯 보인다. 부제가 "Dig Deeper(더 깊게 파)"일 뿐 아니라, 볼프강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다고 여러 번 강력히 암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