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선수의 KO승 보도한 1966년 4월 29일 치 ‘동아일보’ 기사

이원석 선수의 KO승 보도한 1966년 4월 29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동양챔피언 쟁취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시절(1966년), 그해 4월 28일 일본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벌어진 프로복싱 동양밴텀급 선수권 쟁탈전에서 군산 출신 이원석(21) 선수는 일본의 아오키(靑目)를 KO로 물리친다. 4년 동안 아세아 왕자로 군림해온 아오키를 쓰러트린 이원석 선수는 한국 프로복싱을 동양 최강 자리에 올려놓은 주인공이 된다.
 
"우리 '깨골창'에서 용났네!"
 
이원석 선수가 동양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이 선수 고향 동네 사람들이 기뻐하며 쏟아낸 감탄사이다. '깨골창'은 군산시 신영동 공설시장과 옹기전 골목 사이로 흐르는 샛강(금강지류)으로 당시엔 그 주변 동네를 깨골창(개골창)이라 하였다. 이 선수가 옹기전 골목에서 나고 자란 연유로 용(龍) 관련 속담이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들은 이원석 선수의 동양 타이틀 쟁취를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하였다. 그중 <경향신문>은 "28일 밤 일본 동경 후낙원(東京 後樂園)에서 벌어진 프로복싱 동양밴텀급 선수권 쟁탈 12회 전에서 한국의 이원석 선수는 일본(日本) 선수권자 청목승리(靑目勝利·아오키)를 11회 2분 43초 만에 KO로 물리치고 한국인(韓國人)으로서 다섯 번째 '동양(東洋) 챔피언'이 되었다"고 전했다.
 
초반에 탐색전을 펼쳤던 이원석은 3회전부터 정확한 훅을 구사하며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7회전에서는 저돌적인 인파이트로 우세한 게임을 벌여 경기장을 찾은 교포들을 열광케 하였다. 9회전 이후에는 일방적인 공세로 상대를 그로기 상태에 빠뜨렸으나 노련한 아오키는 클린치로 다운을 모면하다가 11회에 결국 쓰러졌다.
 
신문은 "1963년 9월 비(比:필리핀)의 '컬리 아귀티' 선수를 9회에 KO시키고 선수권을 쟁탈한 후 네 번째 선수권 방어전에서 이(李) 선수에게 KO패한 청목(靑木·아오키) 선수는 한국인에게 동양 챔피언을 넘겨준 네 번째의 일본(日本)인이 되었다"고 부연, 일본인 챔피언을 상대로 일궈낸 쾌거를 에둘러 강조하였다.
 
동경올림픽 출전 꿈 무산되자 프로로 전향
 
 1960년대 초 군산권투구락부 단체사진(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완수 관장,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원석)

1960년대 초 군산권투구락부 단체사진(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완수 관장,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원석) ⓒ 조종안

 
이원석은 자그만 옹기점을 운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불우하게 자랐다. 군산고등학교 1학년 때(1961) 복싱에 입문, 군산체육관(관장 김완수)에 적을 두고 활동하면서 각광받는다. 남보다 뛰어난 체력과 형편이 어려운 가정환경 등이 그의 복싱 입문 동기로 알려진다. 그는 아마추어 시절 강한 라이트 훅과 스트레이트가 주 무기인 인파이터로 평가받는다.
 
1962년 밴텀급 신인왕에 오르고, 1963년 국내 예선전을 전승으로 장식한 이원석은 그해 12월 방콕에서 개최된 제1회 아세아아마추어복싱 선수권대회에 출전, 태국 선수를 KO로 물리치는 등 이변을 일으키며 은메달을 획득한다. 어깨에 날개를 단 그는 1964년 동경올림픽 파견선수 최종 선발전에서 정신조에게 분패, 올림픽 진출의 꿈이 무산되자 실의에 빠진다.
 
정신조 손이 올라가는 순간, 글러브를 바닥에 내던지며 울음을 터뜨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의 여신이 손을 내민다. 당대 최고 인기스타 최무룡·김지미 부부가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섰던 것. 아마 시절부터 지켜보던 최 씨는 이 선수가 억울하게 탈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프로 전향 권유와 함께 세계적인 대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지도 드러낸다.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보살펴주겠다는 최 씨의 확약에 1965년 1월 프로로 전향한 이원석은 최무룡·김지미 부부 저택에 기거하며 훈련에 돌입, 이듬해(1966) 4월 동양챔피언 벨트 쟁취로 화답한다. 그는 승리의 벅찬 감격을 "제일 먼저 매니저인 최무룡·김지미 부부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하여 팬들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최무룡, 이원석의 파이팅에 반해 매니저 자처
 
 1964 동경올림픽 후보 선발 기념사진(왼쪽부터 김완수 관장, 이원석 선수, 황영일 선수/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음)

1964 동경올림픽 후보 선발 기념사진(왼쪽부터 김완수 관장, 이원석 선수, 황영일 선수/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음) ⓒ 조종안

     
한국 프로복싱 수준을 동양 최강 자리로 끌어올린 이원석. 그러나 군산에서 그의 환영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당시 군산권투구락부 3인방(박구일, 이원석, 서상영) 가운데 한사람이자 65년 아세아 아마복싱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서상영(77) 군산새싹학원 이사장에게 이 선수의 프로 입문 과정에 대해 이야기 들어본다.
 
"이원석이 동양챔피언 획득했을 때(1966년 4월) 군산은 환영 퍼레이드도 없었고, 조용했어. 왜냐면 이미 군산을 떠가지고 서울 한국체육관에서 운동하다가 챔피언이 됐기 때문이지. 말하자면 군산체육관 소속일 때 프로로 전향, 서울로 가버린 거지. 그때부터 최무룡·김지미 부부가 매니저였어. 동양챔피언 타이틀 따기 전에 최무룡 부부하고 연을 맺은 것이지.
 
최무룡이 원석이의 파이팅에 반해가지고 매니저 역할을 했던 것이지. 원석이는 챔피언 되기 전부터 인기가 좋았어. 라이벌인 김현과 승패를 주고받는 호각지세였거든. 두 선수 타이틀매치는 꼭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는데 경기 때마다 좌석이 100% 매진되는 등 흥행이 잘 됐으니까. 그래서 최무룡이 원석이를 스카우트 한 거여. 그때만 해도 장충체육관은 우리들(권투선수들) 체육관이었지. 프로권투 인기도 최고였고, 경기도 그곳에서만 열렸거든..."

 
1966년 8월 13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한일 친선 프로복싱 논타이틀 10회전에서 이원석은 일본의 페터급 야마모토(山本)를 판정으로 물리쳐 동양챔피언 등극 후 처음으로 가진 공식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첫 방어전은 그해 12월 3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다. 이날 그는 도전자 야마가미(山上)를 판정으로 누르고 타이틀을 방어한다.
 
이원석은 1967년 9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선수권쟁탈전에서 도전자인 일본의 나카네(中根義雄) 선수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두 번째 방어에 성공, 세계랭킹 진출 찬스를 잡는다. 그는 이듬해 9월 11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필리핀의 타이니 파라시오와 가진 타이틀매치(12회)에서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타이틀을 방어하면서 세계챔피언 등극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동양밴텀급 타이틀 빼앗긴 후 미국으로 이민
 
최무룡·김지미 부부는 1965년 당시 신진 프로복서 이원석과 김인환 선수를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돌봐준다. 특히 김지미는 김기수(1966년 세계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김기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내 주먹을 사라>(1966)의 '히로인' 김기수 선수 애인 역할을 맡은 것. 김 씨는 처음 만난 챔피언과 열띤 연기를 보여줬다고 한다.
 
한국 영화계의 톱스타로 이원석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최·김 부부는 결혼 7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개인 스캔들과 구속기소 사건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1962년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이 1969년 6월 어느 날 기자들 앞에 나와 이혼에 합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때 세계랭킹(WBA) 1위에 오르면서 '동양밴텀급 왕자'로 군림하던 이원석에게도 불운이 닥친다. 최·김 부부가 파경을 맞았던 그해(1969) 10월 23일 동경에서 사쿠라이 다카오 선수와 가진 타이틀 방어전에서 판정패 당한 것. 그는 3년 6개월여 동안 지켜온 동양밴텀급 왕자 자리를 빼앗긴 후 재기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이로써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이원석의 복싱 인생 또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밴텀급 동양챔피언 등극 후 스승인 김완수 군산체육관 관장과 기념사진(1966)

밴텀급 동양챔피언 등극 후 스승인 김완수 군산체육관 관장과 기념사진(1966)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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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1960~1970년대)
기사에 배치된 사진은 2011년 당시 군산체육관 김완수 관장에게 기증받은 것임
이원석 동양챔피언 군산 옹기전 골목 최무룡 김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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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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