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 아닌데..."

동물원 매니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수의사는 무심결에 이름을 부르지만, 정작 그녀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런 대접이 한두 번은 아닌듯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원래 이름은 소진이다).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려진 것조차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여자의 마음은 다른 것엔 크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오로지 자신이 돌보는 한 마리의 뱀에만 신경을 곤두 세울뿐이다. 길이 4.6미터의 금빛 비단 구렁이. 50년까지 살 수 있는데, 22년 밖에 안됐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지 꼼짝을 하지 않는다. 껍질을 벗는 탈피 중인데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으면서 동작을 멈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웃음기 없는 여자.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지 힘이 없어 보인다. 뱀이 아파 수의사를 불렀지만, 동물원 사장은 오히려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비로 출장비를 내라며 면박을 줄 정도로 냉정하다. 인간성이라고는 눈곱만큼 보이지 않는 사장에게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는 여자. 동물원에 오기 전, 대학교에서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지만 한 마디도 못하고 내쫓겼던 과거가 있다. 자신의 생각대로 떳떳하게 행동하는 후배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너 되게 멋있어 보여. 뭔가 딱 추구하는 게 있는 느낌? 똑부러지고 아는 것도 많고 용감하고. 나는 남 신경 안 쓰는 그런 게 멋있어 보여."

무작정 동물원에 찾아온 전 남자친구. 일방적인 태도에 당황한 그녀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피한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자기 방식대로 사과하고 받아주라고 강요한다. 다른 사람이 보든 안보든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여자친구도 이용할 부류다. 여자의 논문을 베껴서 학위를 받으려한 남자. 교수가 그녀를 성추행했지만 이마저도 무마하려 한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공통점을 발견하는 과정
 
 인공으로 꾸며진 절제된 정글 느낌이 난다. 인공 나무 사이에 이따금 진짜 나무가 섞여있다. 이끼와 넝쿨이 내려온 흔적이 있다. 무대에선 이따금 스산한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무대 가운데에는 사방이 유리로 된 뱀이 들어가있는 케이지가 놓여있다.

인공으로 꾸며진 절제된 정글 느낌이 난다. 인공 나무 사이에 이따금 진짜 나무가 섞여있다. 이끼와 넝쿨이 내려온 흔적이 있다. 무대에선 이따금 스산한 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무대 가운데에는 사방이 유리로 된 뱀이 들어가있는 케이지가 놓여있다. ⓒ 필립리

 
2021년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에 선정된 신효진 작가의 연극<탈피(脫皮)>(~2월1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실내 동물원에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탈피를 멈춘 뱀과 교감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파충류와 인간으로) 둘의 형체는 다르지만, 외부에서 주는 억압 때문에 세상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게 된 처지는 비슷하다.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피해에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는 여자는 유리로 둘러싸인 케이지에 갇혀 평생을 살아온 뱀과 다를 바 없다. 살 수 없는 환경에 둘러싸인 동물원은 온갖 피해로 노출된 여자의 환경이다. 뱀을 본 대부분의 관람객은 호기심은 있지만 징그럽다고 다가서지 못하는 상황은 여자가 살아온 인생의 축소판이다. <탈피>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서로에게 공통점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되찾고, 어떻게 닿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생명들이 전시되어 있는 기이하고 이질적인 공간 안에 갇힌 파충류. 폭력과 고통이 쌓이는 곳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인간. 이 둘은 원치 않는 폭력을 깨달아가며 그 공간이 어떻게 자신을 궁지로 내몰리는지 보여준다. 뱀을 통해 여자를 떠올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시선을 받는 여자. 이것은 사육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살아나갈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려지기까지 느꼈던 억겁의 시간을 나열한다. 인간이, 동물이 놓인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명쾌한 답을 제시하진 않지만, 이들을 이렇게 내몰려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게 만드는 작품. "이 연극이 누군가에겐 용기가, 누군가에겐 거북한 이야기가 될 것"이란 제작진의 말처럼 피해받는 여성들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서로 아주 다르지만 비슷하게 고통받는 두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구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들에게 씌워진 껍데기를 벗겨내는 마음으로 말이죠."

연극<탈피>를 쓴 신효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욕심으로 오랜 시간 아주 비좁은 곳에서 고통 받아왔던 뱀. 여성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비슷한 낙인 아래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서 공통점을 만든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신 작가의 다른 작품 <머핀과 치와와>(1월 21~30일,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인간성이라는 신화 때문에 스스로 균형을 파괴하고 '정상'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너무 많은 것을 외면하는 현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은 '인간 이성 중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신 작가는 약간의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다루고 있다. 

'나와 아주 다른 존재'와 '나'는 연대할 수 있을까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는 <탈피> 배우들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는 <탈피> 배우들 ⓒ 필립리

 
오독 당해온 역사 속에서 서로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려고 발버둥친다. 이상하고 미쳐버린, 죽거나 죽일 수밖에 없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여성들의 이야기. 다소 윤리적이지 않다고 불편하게 소개하는 이 작품은 "허물을 깨닫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활동을 해온 극단Y는 사회적 제도가 인간의 자아와 육체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고찰한 <미의 기준> 시리즈, 프랑스의 임신중단사를 다룬 <344명의 썅년들>, 다양한 젠더와 드랙을 결합시킨 <퍽킹젠더> 등의 연극을 통해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 규범과 젠더 질서에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다. 더불어 연극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치를 공유하고 질문하며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제작과정 속에서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 맺기에 대해 고민하며 구성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계와 폭력에 저항해왔다.

연극<탈피(脫皮)>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고통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를 구해줄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진짜 이름을 잃어버린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진다면, 그들에게 씌워진 껍데기를 탈피할 수 있다는 바람을 드러내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여자와 뱀은 갇힌 세상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낸다. 초반에 잘못된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가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여성으로, 뱀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르짖는 마지막 대사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가서 이젠 이런 건 없다고 얘기해. 네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고 얘기해.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다고 얘기해. 소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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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문화예술 전문 월간지<문화+서울>(문화플러스서울) 편집장을 지냈으며,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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